
이번 총선은 중간평가가 아니다. 따라서 새 정부에 힘을 실어주자는 안정론의 우세는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1988년 총선도 시기적으로는 이번 총선과 같이 대통령 취임 후 두 달도 안 돼 치러졌지만 결과는 여소야대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정치 환경은 판이하다. 1987년 대선은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가 어부지리를 얻은 선거였다. 민심은 좌절했지만 의회권력마저 군부 후계세력에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3김의 카리스마는 여전히 강력한 흡인력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이번 총선은 이명박의 대선 압승과 야당세력의 지리멸렬 속에 치러진 ‘원사이드 게임’이었다. 그 결과가 ‘아슬아슬한 과반’이니 이야말로 강력한 경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총선 결과가 ‘과반의 경고장’이라면,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경고의 본질적 의미를 진정 국민을 섬기는 정신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때 이르지만 좋은 매’가 될 것이다. 사실상 이제부터 본격 출발하게 된 이명박 정부가 성공하려면(적어도 실패하지 않으려면) 국정철학부터 가다듬어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선진화로 간다고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국정 철학이 부재하다면 이명박 호(號)의 순항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실용(實用)인지는 의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고 무엇이든 그 반대로만 하면 실용적 우파인가. 사회의 상식이나 규범을 벗어나는 도덕적 하자가 있어도 일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 실용 인사인가. 충돌하는 가치의 양면성을 고려하기보다 효율성만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것이 실용 정책인가.
이명박 정부는 성장과 국민통합을 모토로 내세웠다. 박정희의 발전체제가 반대의 논리를 배제한 성장 제일주의였다면 이명박의 신(新)발전체제는 경제성장을 통한 국민통합을 지향한다. 실용주의는 그것을 위한 실천의 방식이다. 그러나 성장과 통합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성장을 위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를 완화하고, 재벌의 출자총액제한을 폐지하고, 수도권 개발규제를 풀고, 감세(減稅)를 한다고 할 때 재벌의 사금고(私金庫)화 및 문어발식 확장, 수도권 난개발과 환경 악화 및 지방과의 균형발전 저해, 국가재정 감소에 따른 복지비용 축소 등 국민계층간, 지역간, 이해집단간 이해와 갈등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를 어떻게 설득해 타협을 이끌어내고 조정해 갈등을 최소화하느냐가 정치 리더십이다. 그것을 이념이 아닌 실용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실용정부의 역할이다.
노조도 재벌도 공정한 법치로
그러자면 정책의 정합성(整合性)을 바탕으로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정책의 정합성이란 시대적 당위성에서부터 일의 순서, 비용 대 효율의 균형 등으로 이해관계의 조율이 가능할 때 획득된다. 이를테면 규제완화가 정부(관료)의 불투명성을 제거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공정한 시장은 건전한 시장경제를 위해 필수 조건이다. 이 두 조건이 균형을 이룰 때 정책은 충분조건으로서 정합성을 가질 수 있고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노사 문제 또한 예외가 아니다. 법치주의가 노동조합에는 강하게, 재벌에는 느슨하게 적용된다면 노사갈등을 피할 수 없으며, 그런 법치로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다.
다수 국민의 동의 없이 국회 의석수로 밀어붙이려한다면 아무리 여대야소라고 한들 극심한 갈등비용을 지급할 수밖에 없다. 4년 전 국회 과반수를 이룬 노무현 정부가 민의와는 동떨어진 ‘4대 개혁입법’을 몰아붙이려다 급속히 몰락한 것이 가까운 예다. 노 정부는 정책을 이념의 틀에 맞추려다가 실패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가 이념이 아닌 실용을 국정의 잣대로 삼은 것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어떤 실용인가라는 점이다. 실용주의가 국정철학이라면 ‘어떤 실용인가?’는 중요한 의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