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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자주적 세계화론

문민정부 개혁설계사 박세일 전 청와대수석의

21세기 한국 자주적 세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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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가혁신체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와 기업문화도 크게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는 회사지배구조 개혁은 다음의 문제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 나라의 회사는 미국식 지배구조를 그대로 본받을 수 없다고 본다. 회계의 투명성, 경영의 책임성 등을 높이는 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적용해야 할 보편적 원칙이기 때문에 우리도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주주 중심 기업관(shareholder capitalism)’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유럽이나 일본에서 나타나는 소위 주주, 경영자, 근로자, 채권자, 소비자 등 기업관련 당사자들의 이해의 조화를 목표로 하는 ‘이해조화형 기업관(stakeholder capitalism)’이 바람직하고 공동체적 가치관이나 전통문화와 정서에 더 잘 어울릴 것이다.

현재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문제도 너무 미국식 일변도로 진행하고 있다. 오랫동안 관행이 돼온 장기고용제도의 이 점을 가능한 한 살리고 지키는 방향에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노력이 강화돼야 한다. 고용조정 대신에 노동시간이나 임금수준을 조정하는 등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무조건 자유해고라는 미국식 고용조정방식만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 이는 종업원의 애사심 충성도 헌신성 등 우리 나라의 가족주의적 기업문화의 장점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특히 노동자들의 동기유발 애사심 직장만족도 등이 생산성 향상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지식노동자의 시대, 지식기반의 경제가 오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해고의 자유만을 찬미하는 것은 대단히 이율배반적이다. 결국 엄청난 문화적·경제적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물론 구조조정과정에 해고가 불가피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해고라는 결과가 아니라 종업원을 아끼는 마음, 가능한 한 해고를 피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그러한 ‘기업의 마음’ ‘기업의 문화’가 있어야 한다.

기업에 이러한 마음과 문화, 에토스가 없으면 앞으로 어디서 기업발전의 새로운 활력을 찾을 것인가? 어디서 종업원의 충성과 애사심, 지식노동자의 헌신과 열정, 기업 내 숙련 축적과 협력적 노사관계 등을 만들어낼 것인가?

결국 세계화를 하되 우리는 자주적 세계화를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서구와 다른 문화와 역사와 전통을 지닌 아시아국가들이 본받을 만한 ‘아시아형 세계화’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공동체윤리와 연대의식의 복구다.

세계화의 폐해 중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가 공동체의 붕괴라는 것은 지난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세계화 자체가 사회의 소득과 부의 분배를 크게 악화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따라서 여러 이유로 세계화의 흐름을 타지 못하는 낙후계층에 대하여 공동체적 배려가 반드시 제도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단기적인 경제성장은 있겠으나 장기적으로는 공동체가 분열하고 피폐해져 결국 세계화의 도전에 실패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9년째 장기호황을 누린다는 미국도 세계화에 따른 소득과 부의 분배악화는 예외가 될 수 없다. 1973년 제1차 오일 쇼크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의 소득분배는 계속 악화되고 있다. 지난 25년간 미국의 최하 20%에 속하는 계층의 실질소득은 약 15% 떨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 세계화과정 속에 극단의 시장개인주의(market individualism)를 추구하면서도 공동체적 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정신적 요인을 우리 나라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국은 독점자본 엄격 규제

흔히 미국은 기업활동의 천국이라고 한다. 분명히 기업의 자유가 크게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기업의 자유는 공정하고 엄격한 법과 제도의 규율하에서만 허용된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듯이 미국의 독점금지법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혹하다. 이번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내에서 가장 우수한 민완 검사들이 대기업의 독점화와 시장지배의 폐해를 막기 위하여 한시도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고 있다. 검찰은 독점화 가능성이 보이면 항상 기소하고 법원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대기업에 분할명령도 한다.

뿐만 아니다. 미국의 조세법은 그 내용과 집행이 엄정하기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미국에서 조세포탈은 그대로 기업활동의 포기를 의미한다. 금융산업관련법의 대단히 상세한 규제조항들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외에도 소비자보호법, 제조물책임법, 근로자권익보호를 위한 각종 노동관련법, 환경보호관련법 등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그 적용과 집행이 대단히 엄정하다.

미국에서는 소송을 할 때 변호사비용 등의 소송비용을 각자가 부담하는 본인부담제도이기 때문에 대기업을 상대로 개인이 얼마든지 소송을 할 수 있다. 만일 패소자부담제도라면 패소시 대기업의 변호사비용도 제소한 개인이 부담해야 해 그만큼 대기업에 대한 국민의 제소 가능성은 낮아진다. 반면에 우리 나라는 주지하다시피 패소자부담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독점금지법 위반이나 소비자보호법 위반의 경우 등에서는 실제 발생한 손해 내지 피해의 3배까지를 대기업에 배상시킨다. 소위 3배 배상제도가 그것이다. 따라서 대기업의 부당 불법행위에 대한 규제 효과가 그만큼 높다. 동시에 개인이 대기업의 잘못을 제소하여 큰 부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는 현재 약 100만명의 변호사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착수금 없이 성공보수제로 일한다. 제소시에는 돈을 요구하지 않고 성공시 소송가액의 20~40%를 보수로 받을 것을 전제로 소송활동을 한다. 따라서 피해를 본 개인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하기가 대단히 쉽다. 미국에서는 1년에 약 2만 건의 회사상대소송이 일어나고 있다.

한마디로 대기업과 대자본의 횡포와 타락 가능성을 견제하고 순치할 법적·제도적 장치가 대단히 잘 갖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기업에 대한 법적·제도적 견제는 한편으로 대기업의 경제활동에 대한 사회적 정당성(legitimacy)을 크게 높이는 기능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호에서도 지적했지만 미국사회의 주류에는 아직 칼뱅주의적 금욕정신과 근면의 노동윤리가 지배적이다. 부자들이 근면하고 사치하지 않으며 자신이 쌓은 부를 자식들에게 세습하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4만개가 넘는 공익기금을 만들어 자신의 재산을 공익을 위한 활동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각종 자선활동에 기부한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부자들이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으며 부(富)의 사회적 정당성이 대단히 높다.

사회안전망 구축해야

세계화과정에 공동체적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약자보호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 혼자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할 수는 없다. 정부와 기업의 노력, 종교단체, 시민단체 등 각종 지역공동체의 협조, 그리고 본인 자신의 자구노력 들이 효율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따라서 실업보험 등 제도로 나타나는 사회적 안전망 구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시민사회에 이웃 사랑과 이웃 나눔의 공동체적 가치관과 윤리를 재창조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단순한 시혜적 안전망이 아니라, 공동체적 연대감과 공동체적 나눔의 정신이 뒷받침되는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들의 자원봉사활동(voluntarism)이 대단히 활발한 미국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이웃의 공부를 못 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무보수 가정교사를 자원하는 활동, 병약자·노인·장애인 등의 거동을 보조하고 그들의 각종 사회활동을 도와주는 활동, 영세지역에서 무료탁아 활동, 학대받는 아동보호양육활동, 젊은 이혼모의 정신적 상담과 경제적 지원활동, 환경보호와 소비자보호를 위한 고발활동, 지역문화 활성화 활동 등 수많은 공동체적 연대를 실천하는 자원봉사활동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미국 성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반드시 주 평균 4시간 이상의 자원봉사를 하고 이러한 자원봉사활동단체가 전국에 약 140만개나 된다.

이러한 자원봉사활동, 무보수의 공익 증진활동, 이웃사랑활동이야말로 미국사회의 공동체적 연대를 강화하는 강력한 접착제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냉엄한 시장논리하에서 무한경쟁을 하는 대단히 개인주의적 사회이면서도 다른 한편 이와 같은 공동체를 위한 자원봉사활동, 이웃사랑활동이 대단히 왕성하기 때문에 미국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유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국사회는 시장개인주의가 가져오는 공동체해체 위기를 극복하는 나름의 제도·의식 그리고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물론 우리 나라에도 미국식 법률제도와 칼뱅주의적 정신 그리고 자원봉사의 문화가 무조건 그대로 들어와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저들의 노력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반성해보자는 말이다.

환언하면 우리는 이 세계화의 도전 속에서 공동체적 윤리와 연대를 강화하는 어떠한 법적·제도적 노력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역사와 전통 속에 있는 어떠한 사상적·정신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켜 이를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해야 하는가, 어떠한 문화적·가치적 전통을 다시 살려 내 이웃사랑과 이웃나눔의 시민문화를 다시 활성화할 것인가 등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 없이 세계화란 이름으로 무조건 미국식 시장개인주의 도입을 서두르면 그러한 세계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올바른 자주적 세계화 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미래 국가개혁주체를 형성하여야 한다.

세계화는 단순한 국제화와는 다르다. 미국화(美國化)는 더더구나 아니다. 세계화는 단순히 국가간 경제교류의 증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제3의 물결이라고 하는 신기술혁명이 수반하는 문명사적 변화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 개인과 자연의 관계 등 모든 근대적 가치와 산업주의적 패러다임이 바뀌는 변화다.

그 결과 모든 조직(학교 정부 기업 정당 언론 사법 등)과 모든 정책(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이 모두 재창조(reinventing)돼야 한다. 한마디로 총체적 구조조정과 개혁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를 보면 한마디로 ‘개혁이 경쟁하는 시대’다. 어느 나라가 시스템의 총체적 개혁과 구조조정을 더 잘하는가를 놓고 서로 경쟁하는 시대다. 이에 성공하면 그 나라와 국민은 21세기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승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패자가 되는 것이다. 승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자주적 세계화에 성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 자주적 세계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세계화라는 도전을 올바로 해결할 ‘의지와 능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등장해야 한다. 한마디로 미래 한국을 개척할 정치적 주체세력을 형성하는 문제다. 미래개혁세력, 정책능력세력, 전문가세력의 정치적 등장이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나라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개혁의 과제일 것이다.

광복 후 처음에는 독립운동세력이, 그리고 다음에는 군부세력이 우리 나라의 정치를 지배해왔다. 그 후 민주화세력이 우리 나라의 정치를 책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 나라는 독립운동을 하고 민주화투쟁을 하던 시절의 극한 대립적 권력투쟁형 정치, 권위주의적 1인 지배의 사당(私黨)정치, 돈에 의존하는 금권정치, 지역감정을 볼모로 하는 분열정치, 무(無) 비전과 무(無) 정책의 아마추어 정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정치에는 비전과 정책보다는 구호와 돈이 중심이고 팀이나 시스템보다는 개인이나 연고가 중심이다. 이래서는 분명히 21세기 세계화의 도전, 지난 호에서 지적한 5대 도전을 결코 이겨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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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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