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는 인간의 욕망과 사리를 존중했다. 그는 “옷 입고 밥 먹는 일이 바로 윤리이고 물리(사물의 이치)다. 이를 빼면 윤리도 물리도 없다. 세상의 온갖 것이 모두 옷과 밥 같은 부류일 뿐이다”고 했다. 또 자신의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순도자(殉道者)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이탁오의 사상편력을 서술하면서 경정향(耿定向)과 대립한 사실과 원굉도(袁宏道) 형제와 교류한 정황을 중요한 축으로 삼았다. 이 구도는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이탁오 평전으로 일찍이 룽좌쭈(容肇祖)의 ‘이탁오 평전’(1937년, 상해 상무인서관)과 ‘이지연보’(1957년, 북경 삼련서점)가 나왔는데, 여기에도 이탁오와 경정향이 대립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또 원굉도 형제와 교류한 사실은 첸보청(錢伯誠)이 관련 점교본에서 밝힌 바 있다. 단 이 책은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참조하여 사실관계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또한 이탁오의 사상을 서구 사상과 다각도로 비교했다. 이탁오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 길을 가는 데 힘쓴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저자들은 그 원리가 감성이나 직관을 바탕으로 어떤 사회 현상을 겨냥해서 무작위로 제시한 것이어서, 칸트가 ‘인간은 목적이지 도구가 아니다’라는 인본주의 명제를 명확하게 제시한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오히려 이탁오의 관점은 프랑스의 몽테뉴나 볼테르, 영국의 존 버니언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또 이탁오가 참된 지식을 추구한 것은 프랑스의 디드로와 비슷하다고 했다.
두 저자는 이탁오의 사상에서 체제 비판의 급진성을 읽어냈지만, 결국 그의 사상이 그리고 전근대 중국의 사상이 서구 사상보다 열등하다고 봤다. 마테오리치와 이탁오의 만남에 대해 “한탄스러운 것은 오래된 중국에 설령 타고난 재능과 사상을 지닌 뛰어난 사람이 있다 해도 박학한 선교사 하나를 상대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서양 제일류의 대학자이며 사상가인 베이컨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더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누가 중화 민족의 낙오를 초래했는가?” 하고 한탄했다. 이런 언설에는 계몽주의적 관점과 전반서화파(全般西化派)의 논리가 숨어 있다.
‘천길 위를 나는 봉황’
두 저자의 비교사상론은 일본의 시마다 겐지(島田虔次)가 이탁오를 평가한 방식과 견줄 만하다. 시마다는 1948년 4월, 즉 중국혁명이 일어나기 1년6개월 전에 “이탁오가 욕망을 긍정하고 사(私)를 강조했고 군주 중심이 아닌 민 중심적인 정치관을 내세웠으며 리(理)의 다양한 발현을 주장했다”는 점을 논했다. 그리고 이탁오에게서 중국 근대 사유의 좌절을 보았다. 시마다는 아시아적 정체론을 타파하고 왕양명에서 황종희, 고염무에 이르는 사상사에서 루터, 로크, 루소의 사상을 읽어냈다. 시마다는 명과 청을 연속적으로 파악하고 중국의 근대가 부르주아 시민혁명이 아니라 인민공화국 혁명에서 완성됐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유럽을 통해 중국적 독자성을 검출했을 뿐 중국을 통해 유럽을 독자적으로 보려는 관점은 희박했다. 시마다에 비해 이 책의 두 저자는 이탁오의 사상이 지닌 역사적 성격을 명료하게 밝히지 못했다. 중국을 통해 유럽을 상대화하려는 관점은 더욱 더 희박하다고 하겠다.
이탁오는 경정향에게 부친 서한에서 “광자(狂者)는 옛 인습을 따르지 않고 지난 자취를 밟지 않으며 식견이 높아, 이른바 천길 위를 나는 봉황이다. 누가 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원굉도는 이탁오를 두고 “노자(老子)는 본성이 용(龍)이었고, 초인(楚人)은 공자를 봉황이라 노래했네”라고 했다. 그를 변환자재한 사상가이자 시대를 잘못 만난 인물이라고 본 것이다. ‘천길 위를 나는 봉황’ 이탁오는 시대를 너무도 앞서간 존재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허균이 그의 저술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고, 박지원 등 조선 후기 진보적 지식인들도 그에게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의 선구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에 의해 이탁오의 저서가 널리 소개됐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근대 사상을 논하기 위해서도 이탁오는 되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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