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때를 놓쳐 옷을 적시며 통발을 건지는 이웃. 곁에서 지켜보는데도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한다.
언제부턴가 여행을 하고 싶을 때면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몸이 원하는가, 아니면 마음이 원하는가. 보통은 마음이 여행을 원한다. 몸은 먼 곳, 낯선 곳으로 가는 걸 크게 바라지 않는다. 먼 곳은 가는 과정부터 고단하다. 낯선 곳이라면 잠자리는 물론 쉴 자리조차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은 몸이 가만히 있어도 천길만길 날뛰기도 하고 하염없이 잠잠하기도 하다. 날뛰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명상이나 마음공부도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여행이 진정제가 된다. 하지만 여행을 가자면 몸이 허락해야 한다. 좀더 그럴 듯한 구실을 찾아 몸을 달래야 한다.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 먼 곳에 사는 이웃을 그리는 정. 아이들과 떨어져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
그러나 이런 생각만으로는 몸이 흔쾌히 나서지 않는다. 그렇다면 몸이 여행을 원할 때가 있는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산짐승이 떠오른다. 산짐승은 자기 영역이 있어 그 안에서 먹이를 구한다. 그러다가 그 영역에 어떤 위협이 닥치면 새로운 곳으로 간다. 이들에게 낯선 곳은 설렘보다 절실함이리라.
“잠이 안 와, 집이 없어진당께”
내가 이따금 하는 여행에도 삶의 여유보다는 그 어떤 절실함이 깔려 있다. 도시를 떠나 새로운 곳에 자리잡고자 여행을 다닌 때도 그랬지만, 나름대로 뿌리내리고 산다는 지금도 그 욕구가 조금은 남아 있다. 지독한 가물이라든가 논밭이 무너지는 혹독한 자연 재해를 겪다 보면 일상이 흔들린다. 이웃과 다툼도 그렇다. 산골에서는 가까운 이웃과 부딪치면서 살아가기가 참 어렵다. ‘직장 따로 집 따로’가 아니어서 그렇다. 보기 싫은 사람을 날마다 마주보고 산다는 건 고통이다. 그럴 때는 기회가 되면 떠나고 싶어진다.
최근에 우리 식구의 일상을 흔드는 일이 하나 생겼다. 우리가 사는 지역이 기업도시가 된다고 한다. 이름하여 ‘관광레저형’이란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실감나지 않았다. 그게 뭘 말하는지. 어디쯤에 세워지는지.
그러다 면에서 열리는 오일장에 갔다가 시위하는 광경을 보았다. 기업도시에 편입되는 마을 사람이 ‘골프장 기업도시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다. 산골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시위꾼은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다. 한 몸 추스르기도 힘겨운 나이에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을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 시위대 옆에 붙었다. 그러자 할머니 한 분이 내뱉듯이 한마디 한다.
“잠이 안 와. 집이 없어진당께.”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관련자료를 뒤졌다. 기업도시가 되는 지역이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멀지 않다. 승용차로 10분 거리인 데다가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의 상류 지역이다. 기업도시 문제가 그냥 지나칠 내용은 아니구나 싶었다. 기업도시추진특별법을 검토하고, 환경단체의 주장과 편입될 주민의 호소문도 꼼꼼히 살폈다. 깊이 알수록 이건 아니다 싶다.
먼저 절차에 문제가 있다. 지역 주민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사안을 중앙 정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가 ‘밀어붙이기 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면은 주민이라고 해봐야 5000명 남짓이다. 여기에 2만여 명이 살 도시를 계획하고 있다. 당연히 지역 주민과 충분히 협의하고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도시 개발에 대한 기대만 늘어놓았지, 개발이 미치는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마치 대안이 다 마련된 것처럼 홍보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편에서는 고향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이 안 오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모양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나와 논을 이웃하고 농사짓는 할아버지를 만나도 농사에 대한 이야기보다 기업도시나 돈 이야기가 더 많다. 누구는 논을 몇억에 내놓았다든가, 평당 몇십만원에 팔렸다든가. 일상생활에서 들어보기 어려운 말을 쏟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