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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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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의 미학
열차를 탈 때마다, 긴 플랫폼을 걸어갈 때마다, 열차 계단에 첫 발을 올려놓을 때마다, 중얼거린다. 나는 내 영혼을 만나러 떠난다! 그리고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 부르르 떠는 열차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열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할 때, 또 중얼거린다. “열차가 아니었으면,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그들이란 한국 근대 소설의 효시로 불리는 ‘무정(無情)’(1917)의 주인공 이형식과 박영채, 김선영과 김병욱이다. 소설이 끝날 무렵 어긋난 운명의 주인공들은 한자리에 모이는데, 그 장소가 바로 부산행 열차다. 맺지 못할, 아니 풀지 못할 인연들이 달리는 열차에서 해후한다! 소설이 아니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비록 우연성이 지나치기는 하지만, 이 열차칸 장면을 나는 사랑한다.

조금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 장면이야말로 소설 ‘무정’을 근대의 세계로 진입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열차, 그러니까 근대의 산물을 바로 소설에 끌어들인 작가, 그리하여 주인공 형식과 영채, 선형과 병욱과 나란히 또 하나의 주인공의 자리를 소설에 마련한 작가 이광수야말로 근대 작가임을 새삼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20세기 초 작가 이광수가 열차를 통해 주인공들의 해후를 매개함으로써 소설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처럼, 21세기 초 서울-부산 간 초고속 열차는 내 운명, 즉 내 소설적 삶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초고속 열차로 인해 나는 일산 호숫가에 살던 삶을 꾸려 부산 해운대 바닷가로 옮겨온 것이다. 새벽 어스름 잠에서 깨어나 저 멀리 창밖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볼 때면 매번 처음 바다와 마주하는 양 ‘아, 바다!’ 하고 감탄을 하는데, 그것은 열차가 떠나기 직전, 열차칸에 앉아 내지르는 ‘아, 열차!’의 탄성과 다르지 않다. ‘초고속 열차가 아니었으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아침 저 바다를 만날 수 있었을까?’

한 달에 두어 번 초고속 열차를 타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것을 나는 축복으로 여기며 산다. 축복이란 별 게 아니다. 내가 나를 배려할 때 나오는 감사의 마음이다. 일 때문에 서울에 가거나 부산에 가지만, 마음은 여행자의 기분을 한껏 누리는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거기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발견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린다. 서울역 광장에 서본다. 광장 시계탑, 구역사, 비둘기떼, 광장 앞 고가도로, 거대한 빌딩 숲, 그리고 전면이 유리인 신역사.…그것들은 늘 그래왔듯이, 어제처럼 오늘도, 또 내일도 그렇게 놓여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내 눈, 내 가슴이다. 노을에 불타는 구역사를 본 적이 있는가. 보고, 또 본 적이 있는가. 2층 난간에서 여섯 갈래 열 갈래의 플랫폼을 내려다본 적이 있는가. 보고, 또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난간에서 떠나는 모든 것을 우람하게 감싸고 있는 위, 그러니까 천장을 올려다본 적이 있는가. 보고, 또 본 적이 있는가.

인상파 화가들, 특히 모네와 마네는 열차와 열차역 풍경에 민감했다.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근대인인 까닭이다. 열차를 화제(畵題)로 한 마네의 그림 ‘아르장퇴유’와 ‘철도’가 세상에 나온 것은 1870년대. 그리고 같은 시기 모네는 ‘생 라자르’ 역에 몰두했는데, 생 라자르 역,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림을 그는 무려 7점이나 그렸다. 생 라자르 역은 파리 북부 지방으로 들고나는 관문이다. 모네는 수련 연못으로 유명한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거처를 정한 뒤 수시로 생 라자르 역을 통해 파리를 오고 갔던 것. 그가 간 길, 그 역을 따라 그의 인상파 기법을 추종하는 화가들이 모여들었고, 이후에는 그가 남긴 그림을 따라 세계의 이방인들이 그 길, 그 역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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