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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특주는 다시 태어날까?

전설로 남은 ‘특별한 술’

김포특주는 다시 태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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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특주는 다시 태어날까?

김포금쌀 막걸리는 쌀을 주원료로 해서 술빛이 희디희다.

“대를 이어갈 수 있으면 하십시오.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목 좋은 곳에서 다른 장사를 하시면 될 겁니다. 양조업은 세월의 힘을 견뎌내야 터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이준씨에게는 굳이 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나름대로 파란 많은 세월의 힘을 견뎌온 술도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권씨는 8년 전 아버지에게서 김포탁주합동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4년 전 그 양조장을 폐업하면서 막걸리 양조업을 중단했다. 폐업 당시 김포탁주합동은 매달 100만원씩 적자를 보는 형편이었다. 5명의 주주가 매달 20만원씩을 보태야 양조장이 운영될 수 있었다. 권씨는 적자를 볼 거라면 자신에게 2년 동안 경영권을 맡겨달라고 다른 주주들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양조장은 매각 결정이 났고 지분을 나눠 갖는 방식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권씨는 어떻게 하면 다시 막걸리 양조장을 할까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던 차에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양조장을 다시 시작하려던 그의 각오가 실행에 옮겨지게 됐다. 그는 막걸리 양조를 다시 시작하면서 좀 더 차별화된 막걸리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하여 브랜드화한 김포금쌀을 가지고 막걸리를 빚기로 하고, 술도가 이름도 ‘김포금쌀탁주’라고 짓게 됐다.

권씨가 다시 술을 빚게 된 것은 막걸리 바람 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업인 막걸리 양조업을 잇겠다는 집념 때문이다. 그의 집안이 견뎌온 힘은 무엇일까. 김포탁주합동을 운영했던 권씨의 부친 권종옥(83)씨를 만났다. 권종옥씨를 통해 지금은 소문으로만 남은 김포특주의 옛 명성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싸라기 술도 귀하던 시절의 찹쌀 술

김포는 경북 선산과 더불어 일찍이 약주로 명성을 얻었던 동네다. 그런데 김포에서는 약주를 더 특화시켜 특주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누가 꼽았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팔도 명주로 김포특주, 안동 제비원소주, 한산 소곡주, 부산산성 약주, 경주법주, 마산과 목포의 정종, 개성소주, 해주 방문주, 동래 동동주가 꼽혔다. 이 중 김포특주가 곧 김포약주다.

권종옥씨의 부친인 권성규씨가 양조업을 시작한 것은 광복이 되던 1945년이다. 권성규씨는 당시 김포의 금성양조장에서 사무 일을 보다가 양조장을 인수하게 됐다. 금성양조장은 1925년에 설립됐는데, 원래 주인은 김춘원씨로 권성규씨의 처남이다. 권성규씨는 양조장을 인수하면서 양조장 이름을 하성양조장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양조업을 시작하게 됐다.

권종옥씨는 19세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양조장 일을 했다. 그는 1947년 누룩에 쓸 밀을 구매하러 개성 장에 갔던 적이 있다. 지금은 군사분계선이 지나가 김포 나루들을 이용할 수 없게 됐지만, 그 시절 그가 살던 김포군 하성면 일대에는 한강 하구의 이름난 포구가 있었고 주로 배를 타고 마포를 오갔다. 임진강과 만나는 애기봉 아래쪽 김포시 하성면 신리 마근포에서는 배를 타고 개풍군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는 일꾼들과 함께 밀 50가마를 배에 싣고 와서 그해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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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명| 술 평론가 sultour@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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