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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술을 마셔야만 하는지 샐러리맨 인생 그리고 싶었다”

웹툰 ‘미생’ 작가 윤태호

“왜 술을 마셔야만 하는지 샐러리맨 인생 그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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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부장님이 생애 첫 구입한 만화책이라며 ‘미생’을 꺼냈다. “술 한잔하며 후배들과 하고 싶은 얘기가 여기 다 있다”며. 그래서 만난 미생의 작가 윤태호. 직장생활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그는 어떻게 샐러리맨의 눈물 젖은 소주잔을 실감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왜 술을 마셔야만 하는지 샐러리맨 인생 그리고 싶었다”

‘미생’68수 중에서

일에는 철두철미하지만 사내 정치엔 젬병이라 승진에서 뒤처진 만년 과장이 팀원들과 함께 동료 직원의 부정을 밝혀냈다. 이 직원은 검찰에 형사 고발됐고, 결재 라인에 있던 상사들은 줄줄이 한직으로 물러났다. 조직을 위해 큰일을 한 셈인데, 거참 세상 묘하지. ‘왜 조용히 처리하지 못했느냐’ ‘동료를 버렸다’ ‘너희는 깨끗하냐’…. 싸늘한 시선이 등 뒤에 꽂힌다. 만년 과장은 말한다. “이것만 기억하자. 우린 해야 할 일을 한 거다.”

샐러리맨이라면 직접 겪었거나 보았거나 들었을 법한 이 이야기는 포털 다음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미생(未生), 아직 살지 못한 자’의 한 대목이다. 미생은 어려서부터 바둑을 두었지만 프로 입문에 실패한 ‘고졸 백수’ 장그래가 대기업 종합상사에 입사해 겪는 직장생활을 그린 작품이다.

미생의 인기가 뜨겁다. 장기간 다음 웹툰 중 인기 1위, 평점 1위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일본 유명 만화 ‘시마과장’을 뛰어넘었다는 평도 듣고 있고 ‘직장인 필독서’란 별칭도 붙었다. 평소 만화를 사보지 않던 30대 중후반 직장인들이 미생 단행본을 앞 다퉈 구매해 예약판매 기간에 이미 재판(再版)에 들어갔다고도 한다. 직장생활에 대한 적확한 묘사, 바둑에 빗대 풀어내는 직장생활의 순리, 무엇보다도 그저 ‘시민, 서민, 대중으로 퉁 쳐서 평가받던’(작가의 말) 샐러리맨에 대한 위로가 월급쟁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원인터내셔널 영업3팀에 천 과장이 새로 와 김 대리와 장그래 사원의 군기를 잡다가 오 팀장에게 혼쭐난 10월 9일 오후, 미생의 윤태호 작가(43)를 만났다. 그의 눈은 빨갰다. 밤새 작업하고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세종대에 강의를 다녀온 뒤 한 시간 자다 깼다고 했다. 미생은 145회까지 매주 두 편씩 연재할 예정인데 10월 중순 현재 막 절반 지점을 통과했다.

“바쁘지만 요즘처럼 맘 편한 때가 없어요. 데뷔 이후 주변 사람들이 제 작품을 읽는 모습을 목격한 건 처음이거든요. 제 인생에서 가장 반응이 뜨거운 작품이에요.”



윤 작가는 강우석 감독이 2010년 동명영화로도 제작한 웹툰 ‘이끼’(2008)로 유명 작가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끼는 대한민국만화대상 우수상, 부천만화상 일반만화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고, 영화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도 불구하고 300만 이상의 관객이 찾았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을 소름 끼치게 풀어낸 이 스릴러물이 대중 일반에 확산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 만화 후반부에는 ‘삼덕기도원 집단살인’ 장면이 나온다. 살인마의 눈빛, 뒤엉킨 시체, 흥건하게 고여 밟히는 피…. 주인공 유해국의 아버지와 이장 천용덕의 비밀이 밝혀지는 이 장면은 너무도 서늘하고 섬뜩하다.

“월급쟁이 남편, 이해하게 됐다”

“왜 술을 마셔야만 하는지 샐러리맨 인생 그리고 싶었다”

윤태호 작가는 “미생은 내 인생에서 반응이 가장 뜨거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렇게 디테일하게 그릴 생각은 없었는데 첫 신을 그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풀려나갔어요. 연재도 3개월 더 길어져 연재 초반부터 끝나기만 기다리던 영화 제작진이 많이 힘들어했죠. 이끼는 결이 예민한 작품이라 항상 아슬아슬했고 저 스스로도 불안했어요.”

미생은 다르다. 그의 동년배들은 “내 얘기”라 하고, 그 아내들은 “남편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작품인 줄 모르고 미생 단행본을 사서 읽은 이웃 주민들과 아이들 친구 부모들에게 뒤늦게 사인해주기도 했단다. 그는 “이끼가 이름을 만들어준 작품이라면 미생은 그 이름을 단단하게 해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생은 3년 전 출판사가 제안한 기획에서 시작됐다. 허영만 화백의 ‘꼴’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자 출판사는 그에게 바둑의 고수가 위기십결(圍棋十訣·바둑을 두는 데 명심해야 할 열 가지 비결) 등을 동원해 세상 사람들에게 일갈하는, 직장인들에게 도움 될 만한 정보가 집약된 작품을 주문했다. 그래서 제목도 ‘고수’였다. 하지만 그는 “직장생활 한 번 안 해본 내가 무슨…”하며 기획 의도를 바꿔나갔다.

“별일 없어 보이는데도 매일 상사를 흉보고, 그러면서도 왜 집에 안 가고 회사에 남아 있으려 하는지 궁금했어요. 또 술은 왜들 그렇게 많이 마시는지. 지금까지 보통의 샐러리맨을 위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관찰해보자 했습니다.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가로등과 같은 은은한 불빛을 비춰 얼추 보이는 지점만 그려내더라도 이 사람들은 자체 발광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까. 샐러리맨으로 살면서 자기 입장을 대변받지 못한 부분이 반드시 있을 것도 같고….”

“누구 한 명의 땀방울로 되고 안 되는 시절이 아냐. 한다, 안 한다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하느냐도 아니라, 언제 하느냐의 문제가 더 많아. 왜 자꾸 혼자 떠안으려고 해? 당신 아니어도 될 일은 돼야 한다고.” - 김 부장

“자기가 먼저 설득되지 못한 기획서는 힘을 갖지 못해요. 누군가는 이 기획서를 믿고 사막 한가운데를, 망망대해를 지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스스로 설득되지 않은 기획서를 올리는 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죠.” - 맞벌이주부 선 차장

평생 한 번도 직장 다녀본 적 없다는데, 미생은 회사 생리에 대해 C레벨 간부급 내공을 보여준다. 윤 작가는 “모두 취재에 응해준 기업인들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그는 미생의 배경을 대기업 종합상사로 삼고 취재할 곳을 알아봤지만 번번이 퇴짜 맞았고, 우여곡절 끝에 몇 명의 샐러리맨에게 취재 도움을 받게 됐다고 했다. 미생 ‘고문역’들의 직급을 묻자 “그것도 비밀. 취재원 보호는 확실해야 하니까” 한다. 우리나라에 대기업 종합상사는 예닐곱 개에 불과한데….

“아, 찍지 마세요(웃음). 제가 직급과 직책을 구분할 줄도 몰랐거든요. 대리-과장-차장-부장 순이라는데 그럼 팀장은 뭐지? 그랬어요. 그런 저를 붙들고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실제 경험을 들려주는 분들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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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남 기자│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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