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장은 그에게 서양화가인 오지호 작가를 소개하면서 “그분 성격이 간단치 않아서 신문사 사장인 나나 우리 기자가 찾아가도 절대 안 만나준다. 취재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먼 길을 찾아온 신사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사장은 옆에 있던 기자에게 “오 선생에게 전화라도 한번 넣어보라”고 했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 들은 오 작가는 “당장 만날 테니 그분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기자는 허둥지둥 취재수첩과 카메라를 챙기느라 부산을 떨었다.
텅 빈 미술관
대낮에 신문사에 들이닥친 신사는 재일한국인 2세 사업가이자 30여 년 동안 수만 점의 미술품과 사료를 수집해 한국에 기증한 컬렉터 하정웅 씨(75)다. 이때의 인연으로 그는 5차례에 걸쳐 2300점의 그림을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했고 상설전시장 ‘하정웅컬렉션기념실’의 주인공이 됐다.
▼ 고(故) 오지호 선생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자그마한 키에 몸집도 작은 분이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집에서 기르던 큰 개를 데리고 큰길까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늦가을 누런 벼가 출렁이는 논을 뒤로하고 서 계신 그 모습이 멀리서 봐도 참 어여뻤어요.”
▼ 반갑게 맞아주던가요.
“폼 잡고 ‘내가 누군데’하고 뻐기는 기색이 일절 없었어요. 만나자마자 환한 얼굴로 내 손을 잡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자’ 하셨지요.”
▼ 무슨 얘기를 나눴나요?
“못 배운 ×들(재일동포)이 고국의 국회의원 한자리나 차지할까 하고 한국에 들어와 푼돈 기부하면서 환대받고 여자 끼고 술이나 마시면서 뻐긴다고 ‘개×’ ‘똥×’라 욕했어요.”
▼ 초면에 당황스러웠겠네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까…. ‘재일동포 1세대가 고국에서 하지 못한 것을 우리 2세대가 하겠다. 고국의 인품 있는 분을 만나고 싶어 무작정 비행기 타고 찾아오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 않으냐’고 했지요. 그랬더니 ‘하 선생을 만난 오늘부터는 재일동포를 더는 욕하지 않겠다’고 해요. 오 선생처럼 저명한 문화인조차 우리 재일동포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가진 걸 보고 결심했어요. 존경받고 인품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 그 인연으로 광주시립미술관에 그림을 기증한 건가요.
“결과적으로 그런 셈이죠. 그날 방문 이후 아들 오승윤 작가와 친구가 됐으니까요. 나와 동갑내기여서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친구로 지내왔어요. 그런데 2006년에 그만 세상을 떠나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전 어느 날 한국에 왔더니 이 친구가 광주에 시립미술관이 생겼다고 함께 가보자고 해요. 공공미술관이 생겼다는 얘길 들으니 무척 기뻤지요. 지방까지 문화가 활성화됐다는 의미여서 더 반가웠고요. 이 친구가 ‘기념으로 그림 한두 점을 기증해달라’고 해요.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좀 더 많이 기증해줬으면’ 하는 속내를 아니까 일부러 딴청을 피웠어요. 한두 점이라고 했으니까 ‘석(세) 점?’이라고 되물었지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뛸 듯이 기뻐해요.”
家電·부동산 사업으로 성공
▼ 1차로 기증한 그림이 모두 212점이잖아요.
“관장의 안내를 받아 전시실로 갔는데 열쇠로 문을 따는 거예요. 그 공간이 110평쯤 됐어요. 관장이 그곳을 제 기념전시실로 만들 계획이라면서,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작품 50점 정도를 기증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요. 근데 갑자기 늘어난 기증 작품 숫자보다, 미술관을 만들어놓고 작품이 없어 전시실 문을 잠가놓고 있다는 게 더 놀라웠어요.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이건 시설(건물)이지 미술관이 아니다. 이런 곳에 미술관이라고 떡하니 간판을 달아놓은 건 사기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허가가 난다니 황당하다’고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