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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철암의 ‘까치발’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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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변의 집들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서 있다.
  • ‘까치발’이 방과 방, 집과 집을 잇댄다. 줄지어 서 있는 가옥들이 철암의 오래된 기억을 떠받친다.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강원 태백시 철암동 ‘까치발 집’.

철암에 가기로 했다. 철암이라, 오지다. 멀고도 깊고 아득해 자동차로 그곳에 가려면 몇 군데 중요한 거점을 거칠 수밖에 없다. 영월, 정선 다 지나서 철암인데 그 사이를 그냥 지나칠 만한 용기가 없다. 그래서 몇 군데를 들러보기로 했다. 영월과 정선 그리고 태백 사이의 작은 마을들, 옛 탄광지역, 지금은 폐광된 곳이 많고, 스키장과 콘도와 카지노와 모텔이 협곡을 따라서 줄지어 선 곳들, 그러니까 함백, 고한, 사북, 정암을 따라 철암에 가기로 했다.

‘힐링 시대’의 시골과 도시

제천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정선 쪽으로 달리면서 김동완(45) 씨와 통화를 했다. 건국대 커뮤니티비즈니스센터(Community Business, 이하 CB센터)에서 일하는 김 씨는 내게 CB센터가 하는 일과 최근의 성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개괄해 설명했다. 나는 겉으로 CB센터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 속으로는 김 씨를 잠시 생각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후배지만, 그 믿음직스러운 성실함과 끈기는 오히려 나를 가르치는 바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폐허가 된 곳에서도 마지막까지 남아서 일하는 강자다.

“철암으로 가기 전에 고한시장에 한번 들러봐요. ‘시장에 처음 와본 초콜릿’이라고 괜찮아요.”

“뭐, 초콜릿. 시장에 처음 와본….”



“예, 우리 CB센터에서 직접 지원하는 사업인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거예요. 마을 가꾸기 사업을 곳곳에서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진짜 생활환경 개선이 돼야 하거든요. 단순한 환경 미화나 지역 특산품 판매가 아니어야 해요. 기본적으로 직접 주민이 참여해야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아이디어가 제공되고 초기 세팅이 가능한 재정 지원도 이뤄져야 합니다.”

“이미 붕괴할 대로 다 붕괴해 마을을 재생하고 가꾸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요즘 힐링이다 귀촌이다 해서 농촌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고 그렇죠. 어쩌다 관광하러 온 사람들이야 그렇다 해도 지역에 깊숙이 들어가보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한 곳이 많아요. 며칠 힐링 여행하는 사람이야 잘 보이지 않겠지만, 마을의 시설도 그렇고 관계도 그렇고 가슴 아픈 일이 많죠. 이걸 차근차근 재생하고 가꾸는 게 CB 사업이에요. 고한시장에 가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 거예요.”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강원 정선군 고한시장에서 초콜릿 가게를 운영하는 박은주 씨.

운전 때문에 주로 김 씨가 얘기를 하고, 나는 가만히 듣는 쪽이었는데, 들으면서 거의 동시에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역작 ‘시골과 도시’가 떠올랐다. 윌리엄스는 이 저작에서 자본주의 산업 문명이라는 이름의 도시화를 문제 삼는다. 그는 시골과 도시에 관한 간편한 이분법부터 해체한다. 즉, 낙후하고 전근대적인 시골이 도시라는 미래로 발전해왔다는 식의 간편한 도식 말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쌍두마차로 발전했다. 곧 도시는 욕망의 집산지가 되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그 과정에서 시골은 파괴돼 버렸다. 시골과 도시는 직선상의 시간 축에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지점에 있으며 도시의 발달이란 끊임없이 시골을 억누르고 착취해서 이룩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시골에서 도시로 돈 벌러 간 청년이 훗날 크게 사업을 일으켜 자기 고향에 학교도 세우고 회관도 세우는 식의 이야기란 낭만화한 허구라는 얘기다. 적어도 잉글랜드에서는 말이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근대 잉글랜드의 산업화는 대도시의 신흥 자본가들이 시골의 농지를 강압적으로 사유화하고 농민을 토지로부터 이동시켜 도시의 임금 노동자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는 ‘시골에 대한 잔혹한 침탈’이라고 표현했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현상을 중화하는 문화적 작용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런던이나 맨체스터의 도시 문화인들이 자기들의 생산물인 악마의 맷돌(산업화)과 악마의 소굴(도시화)을 비판하면서 오래된 시골 마을을 ‘유기적 공동체’로 이상화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시골을 낭만적으로 추억하는 현상에 대해 윌리엄스는 당장 두 시간만 차를 타고 시골로 가보라고 말할 정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골은 목가적인 전원 공동체가 아니라 막강한 도시에 압도당한 채 빼앗기고 쇠퇴해 신음할 뿐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의 ‘힐링 문화’도 한편으로 그런 요소가 없다고 전혀 장담할 수가 없다. 김 씨는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면서 정선, 태백 일대의 마을 재생 사업을 제대로 응시할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

시장에 처음 와 본 초콜릿

고한시장은 어두컴컴했다. 비가 내렸다가 갑자기 눈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탓에 시장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이 어두워 보였다. 그래도 시장 한복판은 몇 해 전과는 달라 보였다. 5년 전 고한시장에서 라면을 먹었는데, 그때는 허름한 시설에 비가 새는 차양에 군데군데 역한 냄새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많이 달라졌다. 우선 커다란 채광창이 고한시장의 한복판을 산뜻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채광창은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자연스럽게 하늘 전체를 가리는 우산이 되고 아마도 빛이 따사로운 때에는 고한시장을 차분하면서도 환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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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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