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무엇이 소녀를 작가로 만들었을까

무엇이 소녀를 작가로 만들었을까

2/2
세 개의 커다란 기둥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고 싶다는 그 미묘한 감정의 밑바닥에는 ‘복순이와 나 사이의 실력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복순이는 거뜬하게 경기고녀(당시 최고의 명문으로 알려진 경기여고의 전신)에 합격할 수 있었던 반면, 소녀 완서는 엄마가 항상 보내고 싶어하던 경기고녀에 입학할 만한 실력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복순이는 우등상도 타고 개근상도 탔지만 나는 아무 상도 못 탔다. (…) 우리 사이는 더욱 뜨악해져 있었다. 나는 내 느낌이 질투와 열등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참담했다. 복순이와 나는 그렇게 헤어졌다.”

질투심과 열등감으로 스스로를 아프게 하던 이 예민한 소녀의 감성은 긍정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된다. 그녀의 진면목은 그동안 그녀를 지켜온 세 개의 커다란 기둥이 사라지자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된다. 그 세 가지 기둥은 바로 할아버지, 엄마, 오빠였다. 조선이 해방되자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억울하게도 친일파로 몰려 동네 젊은이들에게 문패를 떼이는 수모를 당하고, 6·25전쟁이 터지자 엄마는 좌익활동 전력이 있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한순간도 안심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오빠는 설상가상으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다리에 총을 맞아서 거동조차 못하게 된다. 어머니와 오빠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불가능해지자, 이제 대학생이 된 그녀는 드디어 정신적으로 독립하게 된다.

1·4후퇴라는 긴급 상황에서 모두가 피난을 마친 후 텅 빈 서울에 덩그러니 남은 한 가족, 그것이 ‘나’와 오빠와 올케와 어린 조카들, 그리고 어머니였다. “독립문까지 뻔히 보이는 한길에서도 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 집도 없단 말인가.” 이 커다란 도시에 오직 ‘우리 가족’만 남아 있다는 공포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하지만 그 무서운 사실은 또한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오직 자신만 보았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영혼의 든든한 방어벽

동족이 동족을 죽이고 밀고하고 모함하며 ‘빨갱이’라는 꼬리표만 달리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던 그 시절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이 파란만장한 가족사에서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미션을 깨닫는다.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그녀에게는 이제 전에 없던 자신감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식량창고’로 보이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최악의 상황에서 진정한 주체로 거듭난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순간,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순간, ‘내가 이 모든 것의 증언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순간. 그녀는 미래의 작가이자 용감한 주체로 거듭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녀에게 전쟁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든든한 영혼의 방어벽이 되어준 것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 오빠. 그 모든 정신적 지주가 사라져도 여전히 ‘나’를 지켜주는 것, 그것은 문학을 향한 멈출 수 없는 동경이었다.

신동아 2015년 5월호

2/2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목록 닫기

무엇이 소녀를 작가로 만들었을까

댓글 창 닫기

2023/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