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여행 3부작 옴니버스 영화다. 사진학과 졸업반의 두 남녀 대학생이 졸업작품전을 위해 제주도에 여행을 왔고(1편), 제주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여학생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엄마를 찾아 육지로 올라가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사는 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엄마를 찾게 된다는 것이며(2편), 남편과 아이의 뒤치다꺼리로 일상을 허비(했다고 생각)해온 한 여인이 제주도에서 이틀간의 꿈같은 휴식을 보낸다는 이야기(3편)다.
세 편의 에피소드 모두 상업영화권이 구사하는 이런저런 논리와는 멀어도 한참 먼 내용이다. 특히 2편의 잔상이 기억에 많이 남는데, 엄마를 찾아 나서는 아이의 이런 저런 과정에서 감독은 오히려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신 앞에서 쩔쩔매는 엄마에게 아이는 울고불고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과거의 문제로 싸우지 않는다. 엄마는 결국 마음속 파도를 막아내지 못하지만, 아이는 요즘 아이들 말마따나 ‘쿨하게’ 엄마를 달랜다.
배창호 영화의 특징은 일종의 예술적 순혈주의, 더 나아가 종교성마저 느껴지는 순결성에서 찾을 수 있다. 단순한 듯 보이는 2편의 에피소드는 그의 영화가 진실로 퓨어리즘, 곧 순수의 결정체를 위해 죽자 사자 하며 내달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대개 이 2편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워즈워드의 시는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가정을 ‘잠깐 버리고’ 나온 중년의 여인이 잊고 살던 시성(詩性)을 회복하는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이 주부(배창호 감독의 부인으로 연극배우 출신인 김유미 씨가 맡았다)는 제주도 호텔의 벤치에 홀로 앉아 상념에 빠진다.
그녀는 잘 안다. 지나간 세월은 잡을 수 없고 후회한들 소용없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이 곧 아이와 남편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역시 잘 안다. 삶은 지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이야말로 바로 그 점을 얘기하는 것이다. 워즈워드의 시 전문이 극중 인물의 내레이션으로 읽혀지는 대목은 배창호의 영화가 마치 순수 문예주의의 복원을 꿈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역설적으로 신선한 경험이 된다.
배창호의 ‘사고’를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채 남애항으로 가던 길목은 뜨거운 태양이 본격적으로 내리꽂히기 직전인 요즘 같은 계절에는 진실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이 길은 아예 1박2일의 여행 코스를 잡는 것이 더 좋다. 후다닥 눈만 만족시키고 돌아올 것이 아니라 입과 혀까지 달래주기에 딱 좋은 여행길이다. 들를 곳은 동해 연안 도시들이다. 자연산 회가 넘쳐나는 곳이라는 얘기다. 멍게 맛조차 여느 도시에서 먹는 맛과 확연히 다르다. 그러니 시간을 조금 여유 있게 잡는 것이 좋다.

2005년 대형 화재로 소실됐다 최근 복원된 낙산사.
이른 아침 7시쯤 서울을 출발해 맨 처음 간 곳은 낙산사다. 그리고 ‘고래사냥’의 촬영지인 남애항에서 가볍게 회를 먹고 하조대에서 낙조를 보기로 했다. 당일로도 다녀올 수 있는 코스지만 동해의 풍광이 쉽게 놔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낙산사는 알려진 대로 몇 해 전에야 복원 공사가 완성된 터였다. 2005년 양양군 일대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고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됐다. 낙산사가 유명한 것은, 특이하게도 해변에 조성된 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세워졌다. 신라 의상대사 시절에 지어진 절이다. 서기 600년대라는 얘기다. 상상이 가는가. 당시 사람들이 무슨 수로 이 절벽에 이런 절을 지었을까.
절에 얽힌 이야기도 신화를 듣는 듯 신비롭고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지은 절이라고 하는데, 의상이 하루는 바닷가 동굴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친견하고자 이곳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관음보살로부터 수정 염주를 받은 후 이를 안치한 곳이 낙산사라는 것이다. 그가 보살을 직접 봤다는 얘기다.
의상대(義湘臺)는 의상대사가 당시 면벽 수도한 절벽 위에 세운 정자다. 홍련암(紅蓮庵)은 관음보살이 바다에서 붉은 연꽃을 타고 솟아오른 자리 옆에 지은 암자다. ‘믿거나 말거나’라고 하겠지만, 낙산사에 가면 이 두 곳을 꼭 찾아가 보게 된다. 관음보살은 현실 세계엔 없는 존재일지 몰라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있는 존재일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릴 때의 그 관음보살이니까.

‘고래사냥’의 촬영지 남애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