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는 옛것을 안은 아늑한 도시다.
이렇게 힘주어 말하는 사람은 전주, 그 풍취 있는 도시의 게스트하우스 ‘귀거래사’의 주인 이병천(58) 씨다. 얼마 전까지 전주 문화방송의 능란한 프로듀서로 일하다가 올봄에 정년을 맞아 새로운 삶, 새로운 공간,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지역 방송국의 프로듀서였고 지금은 게스트하우스 ‘귀거래사’의 주인장인 그의 본령은 그러나 소설이다. 지금보다 아주 젊었을 때는 시인이었다. 음풍농월로 취미 삼아 매끄러운 시어를 골라 쓰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1980년대 초반, 그 뜨거웠던 시대의 뜨거운 시인이었다. 그러다가 프로듀서로 밥벌이를 했고 그 틈에 시 대신 소설을 더 많이 썼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한옥 체험 숙박업소의 주인이 아니라 당대의 마음을 일상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소설가의 관점에서 전주를 말하는 중이다.
내가 물었다. 전주 하면 고대 문화에서 조선 왕조, 그리고 한옥마을이 금세 연상되는데, 왜 이런 도시에 여행자, 특히 젊은 여성 여행자가 많은가. 이병천 씨는 즉각적으로 말했다.
“여행의 트렌드가 바뀐다. 적어도 이곳 전주만 놓고 보면 그렇다. 과거에 여행이라 하면 집안 가장이 행선지 정하고 운전하고 가서 고기 구워 먹는 것이었다. 아니면 젊은 남녀들이 해수욕장에서 눈이라도 맞춰보려 했는데, 요즘 많이 달라졌다. 전주만 해도 젊은 여성 천국이다. 곳곳이 젊은 여성이다. 삼삼오오 모여서 오고 혼자서도 오고.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는 아예 여란(女亂)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젊은 여성으로 가득 찬다. 그다음이 가족이고 연인인데 그래도 절반이 못 된다. 젊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왜 그런가, 이를 여러모로 생각하는 중이다.”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鳥倦飛而知還
그리하여 우리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전주는 들어가는 풍경부터 남다른 곳이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든 기차를 이용하든, 그 관문은 한옥 형상이다. 물론 시멘트로 구축한 톨게이트에 전주역이지만, 그 형상만큼은 기본적으로 한옥이다. 조선 시대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통의 도시라는 전주의 정체성이 이로써 확인된다.
백제 시대에는 완산이었고 삼국 통일 이후 경덕왕 때 순수하고 온전하다는 뜻의 ‘전(全)’이 붙어 전주가 됐다. 고려 시대 대학자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전주를 두고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며 백성의 성품이 질박하지 않고 선비는 행동이 신중하다”고 썼는데, 나는 무려 1000년 전쯤의 이 기록을 개인적 체험을 통해 여러 번 확인한 적 있다.
내가 겪은 사람들 중에 목소리가 신중하되 유머가 있고 눈매가 잔잔하되 한없이 그윽하며 행동이 느린 듯하되 우직하게 걷고 또 걷는 이들의 행로를 살펴보면, 결국 전주와 연결된다. 이를테면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해직된 이후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아침’을 이끌면서 오랫동안 민주언론운동을 한눈팔지 않고 해온 정동익 선생은 내 결혼식의 주례를 맡았을 때도 특유의 온화한 웃음과 기품 있는 유머를 보여줬다. 서울시의 문화 정책을 십수 년째 연구하는 서울연구원의 라도삼 박사 또한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우직함과 여유로운 웃음으로 인상 깊다.
“전주가 쫌 그렇다. 대구나 부산 쪽하고는 완연히 다르고, 같은 호남이라고 하지만 광주하고도 다르다. 그렇다고 앞에서 웃고 돌아서서 뒤통수를 치느냐 하면, 그건 전주와 무관한 일이다. 견디고 버티고 끝내 마음먹은 일을 은근히 밀어붙인다 하면, 그게 전주와 가깝다.”
완주 용진면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전북대를 거쳐 전주문화방송에서 삶의 절반을 다 보낸 이병천 씨의 말은 신뢰할 만하다. 어쩌다 전주에 들어와 몇 해 살아본 소감이 아니다. 이 도시와 지역에 대한 애증이 뒤엉킨 말이다.
이렇다 할 산업시설도 적고 인재는 하나같이 호남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버리는 20세기 후엽의 역사에서 전주는 부산, 인천, 광주, 대구, 대전 같은 지역 거점 도시 중에서 이른바 발전과 개발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뒤처져왔다. 그러다가 전주국제영화제 이후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전주한옥마을이 서울의 홍대 앞, 서촌, 신사동 가로수길 같은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가 되면서 전국구로서의 명성을 갖게 됐다.
풍남문의 동쪽, 풍남동. 원래부터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던 곳인데 일제강점기에 풍남문 서쪽으로 일본인이 많이 살게 되고 상권도 이동하자 풍남문 동쪽의 실핏줄 같은 골목으로 들어온 조선인들이 한옥을 지으며 형성된 곳이 한옥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