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물은 서로 돕는다(상호부조론)<br>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김영범 옮김, 르네상스
이 이야기는 110여 년 전 러시아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 혁명가인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상호부조론’(원제 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에서 주장한 동물 세계의 원리 그대로다. 크로포트킨은 다윈주의자들이 역설하는 생존경쟁보다 협력과 연대에 기초한 상호부조가 인류의 문명과 동물의 세계를 이끌어온 힘이라는 점을 동물학, 역사학, 인류학의 해박한 지식으로 입증한다.
그는 ‘다윈의 불도그’라는 별명을 지닌 영국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의 논문에 자극 받아 이 책을 쓰게 됐다. 헉슬리가 다윈의 핵심적인 사상보다 용어 몇 개를 가져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사상에 과학적인 외피를 입힌 사람이라고 크로포트킨은 믿었다. 헉슬리는 1888년 ‘19세기’라는 잡지에 논문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을 발표한다. 헉슬리는 이 논문에서 동물의 세계를 검투장에 비유했다.
“그 싸움에서는 가장 강하고, 가장 빠르고, 가장 교활한 자가 살아남아 또다시 싸운다. 어차피 살려주는 것이 아니기에 관객은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죽이라고 표시할 필요조차 없다.”
생존경쟁 비판
헉슬리는 이 논리를 인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해 사회진화론적 해석을 시도했다.
“삶은 자유경쟁의 연속이다. 한정적이고 일시적인 가족관계를 넘어서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라는 토머스 홉스의 이론에 따른 투쟁이 존재의 일상 상태다.”
크로포트킨은 1883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죄목으로 5년 금고형을 언도받고 프랑스 클레르보 감옥에 갇힌다. 그는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한동안 미뤄뒀던 ‘종의 기원’ 문제를 되짚어보게 된다. 당시 저명한 동물학자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대 학장이던 칼 케슬러의 논문을 우연히 읽게 됐다. 케슬러는 1880년 1월 러시아 박물학자 대회에서 발표한 ‘상호부조의 법칙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원고를 통해 종의 생존과 진화에서는 생존경쟁의 법칙보다 훨씬 중요한 상호부조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논파했다. 그는 이 논문을 정교하게 가다듬지 못한 채 몇 달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크로포트킨은 1888년 클레르보 감옥에서 석방된 지 한 달 뒤에 나온 헉슬리의 논문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을 읽고 나서 반박 논문을 준비했다. 그는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1890~1896년 같은 잡지에 상호부조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실어 헉슬리를 논박했다. 이 논문들을 모아 1902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상호부조론’의 1차 목표는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생존경쟁 개념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다윈 추종자는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가장 협소하게 제한해버렸다. 그들은 동물의 세계를 반쯤 굶어 서로 피에 주린 개체들이 벌이는 끝없는 투쟁의 세계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근대의 저작물들은 정복당한 자의 비애라는 슬로건을 마치 근대 생물학의 결정판인 양 퍼뜨렸다. 이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도 따를 수밖에 없는 생물학의 원리로까지 끌어올렸다.”
크로포트킨은 ‘종의 기원’을 접한 뒤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를 탐험하면서 생존경쟁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 적이 있다. 미지의 땅을 탐험하며 그가 경험한 것은 동물들의 치열하고 냉정한 생존경쟁이 아니라 서로 돕고 의지하는 상호부조였다. 그는 곤충과 조류,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종의 경계까지 넘어선 상호부조를 통해 자연이 주는 혹독한 시련을 넘겨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개별적인 투쟁을 최소화하는 대신 상호부조를 최고조로 발전시킨 동물 종이야말로 가장 번성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의 관찰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