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말끝을 길게 끄는 품이 영락없이 그, 조영남(56)이다. ‘행복한 남자’의 표본인 당신을 인터뷰하고 싶다 하자 예기치 않은 답변이 튀어나온다.
“어~, 그렇지. 임진각에서 서귀포까지 나보다 더 행복한 남자 있으면 내가 할복을 해야지.”
이 무슨 터무니없는 자신감인가. 가볍고 예의 없고 허풍기 있고 잘난 체 하는. 역시 생각한 그대로다.
하여튼 시간을 잡고 장소를 정한다. 간결한 일 처리 방식이 쉰 여섯 살 ‘할아버지’답지 않게 쿨(cool)하다.
그는 요즘 무척 바쁘다. ‘조영남 빅콘서트’가 3월21~22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21일은 12년 만에 새 앨범이 발매되는 날이기도 하다. 얼마 전 펴낸 신학서적 ‘예수의 샅바를 잡다’가 잘 팔린 덕분에 강연 해달라 사인회 해달라 찾는 이도 많다. 5월 19일부터는 인사동 갤러리 상에서 개인전을 연다. 아는 이는 다 아는 일이지만 그는 30년 화력(畵歷)을 자랑하는 중견 작가다.
전시회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한 달간은 책 쓰기에 매달릴 작정이다. 요절한 작가 이상(李箱)의 예술과 인생을 논하는 책이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못 말리는 이상 숭배자다. 왜? 천재니까.
어쩌면 그와의 대화는 생각만큼 즐겁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쁘고 유명하고 닳고닳은 50대 아저씨라니. TV 토크쇼에서 보여준 딱 그 정도가 그가 가진 얘깃거리의 전부는 아닐까. 그 역시 “나처럼 온갖 수다 떨고 다니는 사람한테 더 들을 말이 뭐 있겠냐”며 심드렁한 기색이다.
그래도 알아야겠다. 키 작고, 못 생기고, 가수대상 한번 못 받고, 두 번 이혼에 고정 수입처 하나 없는, 열한 살 늦둥이 딸 하나 데리고 외롭게 사는 중늙은이. 그런데 왜 그의 주변엔 늘 돈과, 여자와, 친구와, 명예와, 놀거리와, 기타 등등 세상 사는 온갖 즐거움이 끊이질 않느냔 말이다. 왜 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중년 사내’일 수 있냐 그 말이다.
▒ 첫째 날
프리랜스 카피라이터 최윤희 선생이 전화를 했다.
“내일 조영남 씨 만나기로 했죠? 오늘 마침 그분하고 영화 한 편 보기로 했는데, 합류하지 않을래요?”
바쁘다더니 영화 볼 시간은 있나보다.
광화문의 한 극장. 먼저 도착한 두 양반이 로비 벽에 전시된 조각가 강익중의 타일 작품을 감상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둘 다 예순이 코앞인데 옷차림은 대학 신입생, 딱 그 수준이다.
“그런데 이 타일, 몇 개나 될 것 같아요?”
글쎄…, 8000개, 아니면 1만 개? 어른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타일엔 모두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한장 한장이 다 재미있지만 멀리 물러서서 그 어우러짐을 음미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이거 다 해서 7000장쯤 돼요. 야, 멋지네. 근데 오른쪽에 있는 저 부조는 없애는 편이 낫겠어. 작품 감상을 방해하잖아.”
다음 달부터 ‘월간 미술’에 우리나라 건물에 대한 공간비평을 연재하기로 했단다. 이 건물도 대상으로 삼아야겠다며 꼼꼼히 살펴본다. 시간이 돼 지하 극장으로 내려가려는데 한 중년 여성이 종이와 펜을 들고 다가온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공손한 자세로 펜을 받아들고 열심히 사인을 한다. 생각보다 ‘덜 건방진’ 모습이다.
영화는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 ‘파리 텍사스’와 ‘베를린 천사의 시’를 만든 빔 벰더스 감독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심상치 않다. 구두닦이로, 행상으로 영락한 쿠바의 옛 재즈 연주자들. 1940 ~50년대 아바나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이들은 70~80대, 심지어 90대 노인이 되어 뒷골목을 떠돌고 있다. 카메라는 이들의 삶과 노래와 연주를 담담하게 쫓아간다. 사건도 갈등도 없는, 그저 소박한 다큐멘터리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을 옥죄는 슬픔이 있다. 특히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그들이 마침내 미국 카네기홀 메인 무대에 올라 미국인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 마지막 장면은 오래 두고 잊지 못할 감동이다.
영화가 끝난 뒤, 청소하는 아줌마가 왔다갔다할 때까지 그는 미동이 없다. 좀 있다 “야, 이거…” 하며 일어서는데, 이런, 빨간 눈이 축축히 젖어 있다. 울었구나.
“믿거나 말거나지만 말이지, 내가 90년대 초 바로 저 카네기홀 무대에서 리사이틀을 했다는 거 아니오. 그때는 어려서 그랬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불러젖혔어. 그냥 해치워버렸다구. 근데 지금 막 후회가 되네, 마구 회한이 밀려와. 어? 근데, 당신들은 왜 우는 거요?”
근처 간이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쯤엔 다시 장난기 많은 중늙은이, 그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나도 영화 만들고 싶은 거 있다’며 어린 시절 무용담 몇 가지를 스리슬쩍 끼워 넣는다.
조승초씨와 김정신 권사
조영남은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생년월일이 정확지 않다. 아버지는 1944년이라고 하고 어머니는 1945년이라 우겨 결말이 나지 않았단다. 뭐 자식 태어난 해도 기억 못하는 분들이 있냐니까 “나도 몰라, 원래 그래” 하며 낄낄거린다. 건망증은 유전인 듯 그 역시 무엇 하나 똑바로 기억하는 것이 없다. 첫 결혼은 언제 했냐, 그럼 이혼은 언제 했냐는 물음에도 대답은 하나 “I don’t know”다.
어쨌거나 6·25전쟁이 터지자 그의 가족은 월남해 충남 삽교읍에 둥지를 틀었다. ‘내 고향 충청도’나 ‘삽다리를 아시나요’ 같은 히트곡들은 이 제2의 고향을 소재 삼은 것들이다.
노래 잘하고 그림 잘 그리고 공부까지 잘했던 조영남은 삽다리의 꼬마 스타였다. 장난질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 가을이면 콩 볶아 먹고 동무들끼리 누가 더 방귀 많이 뀌나 내기를 하지 않나, 어렵게 구한 치약을 최신 사탕이라 속여 배탈이 나게 하질 않나, 동네 갓난쟁이가 마당 한켠에 내지른 용변을 흙바닥에 굴려 떡이라고 속여먹질 않나…. 그런데 그의 변명이 가관이다. “내 품성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100% 조상 탓”이라는 거다.
아버지 조승초 씨(그는 아버지, 어머니란 말 대신 조승초 씨, 김정신 권사라는 호칭을 즐겨 쓴다)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내 생애에 직접적으로는 별 도움이 안된 분”이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덜컥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것. 그렇다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쓸데없는 기대나 관심에 주눅들 필요 없었던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안 그런 척하면서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점이다. 그가 1994년에 펴낸 두 권 짜리 인생고백서 ‘놀멘놀멘’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의 아버지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소위 ‘골때리는’ 사람이었다. 병석에 눕기 전 아버지는 나에게 ‘록빼꾸’라는 화투 놀이를 가르쳤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록빼꾸를 사사한 것이 여덟 아니면 아홉 살 즈음이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양반과 상놈을 은근히 찾아대는 충청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앉아 화투를 친다는 사실은 거의 파격적인 행위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군수군 흉을 봤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의 소위 골때리는 파격성은 거기서 끝나질 않았다. 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에게 체계적으로 장난질하는 법을 직접 시범으로 보여줬다. 제일 재미있는 것이 양잿물 뿌리기였다….’
책 제목인 ‘놀멘놀멘’도 아버지의 입버릇에서 따온 말이다.
‘아버지는 서툰 내 목공질을 돌아보시며 걱정스러운 듯이 한마디씩 하시곤 했다. “놀멘놀멘 하라우!” 놀면서 천천히 하라는 말의 이북 사투리였다.’
그러니 그가 “놀멘놀멘 사는 건 다 조승초 씨 탓”이라 우겨도 그저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다. 그 아버지는 조영남이 ‘딴따라’로 이름을 날리기 직전 세상을 하직했다. 입관식 날, 그와 동생 조영수(부산대 성악과 교수)는 묘자리 앞에서 철없이 눈싸움을 벌이다 어머니한테 된통 야단을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 김정신 권사는 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덕분에 조영남은 이른바 ‘모태신앙인’이 됐다.
남편이 병석에 눕자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며 3남2녀를 키웠다. 어머니가 한 부업 중에는 가짜 꿀 만들기도 있었다. 집에 사글세를 살던 부부의 생업이 가짜 꿀 만들기였던 것. 어머니는 그 이웃을 도와 4계절 내내 불도 때 주고 주걱도 휘휘 저어 주었다. 그 때마다 ‘자타가 공인하는 삽다리 예배당 최고 원로 권사님’인 어머니 입에선 찬송과 기도가 흘러 나왔다. 불을 때면서도 ‘내 주를 가까이’를 불렀고 휘휘 저으면서도 ‘주여, 주여’ 기도를 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미국에 신학대학에 다니던 조영남은 한국에 들렀다 어머니한테 옛날 일을 따지고 들었다.
“아니, 어머니는 권사 신분으로 어떻게 십년이 넘도록 그런 비양심적인 일을 도울 수 있었단 말이요!”
그런데 어머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길케 안 하문 방세를 못 받는데 어카간!”
그 어머니는 늘그막에 아들이 주는 용돈 대부분을 헌금한 다음, 남은 돈으로 교인들에게 이자 놀이를 해 또 헌금 내고 생활도 꾸려갔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조영남은 “엄마, 엄마 돈 어디 있어? 예배당 다니는 사람들이 남의 돈 빌려가고 안 주면 나쁜 짓 하는 거 아냐?” 하며 채무자 명단을 내놓으라고 독촉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내 입을 열지 않은 채 저 세상으로 갔다. 잘잘못 따질 것 없이 그저 잊어버리라는 무언의 타이름이었다.
조영남은 고등학교를 두 번 떨어졌다.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 삽다리에서는 ‘최고 실력자’였지만 서울에선 통하지 않았던 것. 할 수 없이 무시험 입학이 가능한 동대문 근처 강문고등학교(지금의 용문고)에 들어갔다.
그의 고교 시절은 지지리 가난했던 것만 빼면 화려 그 자체였다. 밴드부 멤버, 교지 창간 멤버, 미술반 반장, 동신교회 성가대 반장. 두 살 아래인 장래의 인기가수 이장희, 윤형주와 친분을 튼 것도 이때였다.
1962년, 한양대 주최 ‘전국고등학교 음악 콩쿠르’에서 일등을 해 한양대 음대 특차 입학생이 됐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고, 곧바로 서울대 성악과에 도전해 합격했다.
그 후의 삶은 알려진 그대로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명동 ‘쎄씨봉’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곳에서 평생 친구이자 ‘통기타문화’의 대표주자인 송창식,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조동진, 서유석, 김도향, 이상벽을 만났다. 첫 결혼 상대가 된 연기자 윤여정도 ‘쎄씨봉’ 멤버였다. 모두 명문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를 다녔거나 다니던 ‘당대의 엘리트’. 또한 술과 노래만 있으면 아쉬울 것 없는 못 말리는 청춘이었다.
조영남은 그들과 어울리는 틈틈이 미8군 무대에 서 돈을 벌었고, 어찌어찌해 팝송 번안곡 ‘딜라일라’ 하나로 ‘완전히 떠버렸다’. 학교는 장식으로만 다니다 언제 그만뒀는지도 모르게 흐지부지 됐다. 외제 차에 운전사까지 두고 한참 잘 나가던 어느 날, 그는 거짓말처럼 범죄자 신세가 됐다. 그놈의 ‘신고산타령’ 때문이었다.
광화문 시민회관에서 열린 ‘김시스터즈’ 귀국 공연. 게스트로 출연한 조영남은 공연 전날 있었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 떠올라 노래 가사를 이렇게 바꿔 불렀다. “신고산이 와르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느은 소오리에에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으을 치이누나아아….”
그저 멋지게 불러 박수 한번 받아보자고 한 노래였다. 어쨌거나 다음날 새벽 네시, 그는 엉뚱하게도 병역기피죄로 체포돼 본적지인 예산 삽교 부근 홍성재판소로 압송됐다. 이 때 조영남을 구하겠다고 홍성까지 달려 내려온 두 사람이 있었으니, 당시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이던 이태영 박사와 그 아들 정대철이었다. 조영남은 이박사의 ‘로비’에 힘입어 겨우 철창행을 면했다. 이박사 보호하에 한 달을 보낸 뒤 자원 입대한다는 조건이었다.
육군에 입대해서도 용산 본부에 근무하며 군 행사 단골 가수로 성가를 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높은 분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기 때문에 상관이나 고참들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어느날 육군본부 참모장이 그를 불렀다. 무슨 행사인지 모르겠으나 유난히 심혈을 기울여 선곡을 하고 시나리오를 짰다. 부를 노래로는 ‘보리밭’ ‘황성옛터’ ‘딜라일라’가 정해졌다.
그러나 행사 당일 날 그는 와우아파트 건을 능가하는 사고를 치고 만다. 파티에 나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별’ 수십 명과 더불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당황한 조영남은 재빨리 머리를 돌렸다. ‘이 황공무지한 영광에 어찌 보답할까. 최고의 노래라면 역시 민족의 역사와 애환이 담겨 있는 각설이 타령이다.’ 그리고는 ‘보리밭’을 포기하고 냅다 각설이 타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화 이 놈이 이래봬도 정승 판서 자제로서 ‘와우아파트 타령’ 한번 잘못 불러서 여기 군대까지 끌려왔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갈수록 점입가경이자 육본 참모장이 무대로 올라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만두고 빨리 박대통령의 애창곡인 ‘황성옛터’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조일병, ‘각설이타령’을 뚝 그치고 ‘황성옛터’를 시작하는데, 아, 하필이면 왜 이 때 가사가 생각나지 않냐 이 말이다. 결국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만 세 번 거푸 부르다 퇴장 당하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해질 일이었다.
다음날 육본 법무감실로 이송된 조일병은 세 가지 ‘혐의점’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첫째, 왜 대통령 애창곡인 ‘황성옛터’ 부르기를 세 번이나 거부했나, 둘째, 시키지도 않은 각설이 타령은 왜 불렀나, 셋째,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누구를 말하는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는 조일병 대신 법무관실에 근무하던 서울대 동문들이 백방으로 힘을 썼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저 친구는 정치색이 없다, 그저 똥, 된장도 못 가리는 한심한 성격일 뿐”이란 말로 그를 적극 변호(?)했다. 덕분에 겨우 풀려났지만 이후 조영남은 ‘제법 생각 있는 가수’라는 일반의 오해(!)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까지가 조영남 인생의 ‘첫째 날’, 파란만장했던 어린 시절이다.
올림픽도로에서 도산대로로 넘어가는 초입, 잠수함 비슷한 모양새의 빌라 한 채가 눈길을 끈다. 조영남이 사는 곳이다.
거실엔 온통 책 아니면 그림이다. 트레이드마크인 화투장 그림, 태극기 문양 유화, 본인 사진을 콜라주한 작품들. 집 전체가 화실 분위기다. 어지러운 건 사실인데 뭔가 묘한 질서가 느껴진다. 가구, 소품, 그림 할 것 없이 제 주인을 꼭 닮은 까닭이다.
탁자 위에 놓인 통기타와 악보 노트. 참, 이 사람 가수였지. 느닷없는 깨달음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거실 유리문 너머 시원하게 펼쳐진 한강 풍경을 한참이나 보고 있으려니 안방 문이 끼익 열리며 그가 나온다. 더부룩한 머리, 헐렁한 골덴 바지, 멋없는 뿔테 안경. 집에서 보니 그야말로 동네 아저씨다.
그래도 나이보다 10살은 젊어 뵌다. 표정이며 몸가짐에 ‘삼가는 바’가 없어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속마음 드러내지 않기, 소파 깊숙이 품위 있게 앉기, 점잖은 말 골라 하기, 어른인 척, 웃분인 척 무게 잡고 거리 두기…. 작은 키에 큰 머리, 어쩔 수 없이 구부정한 자세지만 군살 없이 날씬한 아랫배엔 아직 청년의 기운이 남아 있다.
“언제 왔어. 어쩐지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우리 할머니 같지는 않더만. 젊은 여자 소리 같았거든.”
소리? 그랬다. 악보도 좀 넘겨보고 신문도 좀 들쳐보고. 그런데 그 손놀림 어디에 젊은 여자의 냄새가 묻어 있더란 말인가. 역시 선수다.
“할머니요? 아, 아까 문 열어주신 분. 칠십은 족히 되셨겠던데…. 누구시죠?”
“10년째 우리 집 살림을 도맡아 해온 분이요. 참~ 좋지. 나한텐 어머니나 똑같아. 날 아들처럼 그렇게 잘 챙겨주시고. 아주 환상적인 어른이시지. 내가 복 많다 복 많다 하지만, 특히 여복만큼은 아주 베스트로 타고 났어.”
그의 ‘여복’ 자랑엔 하나밖에 없는 딸 은지도 포함돼 있다. 올해 열한 살 난 은지는 6년 전 그가 두 번째 아내 백은실 씨와 살 때 공개 입양한 딸이다.
“은실이는 무척 아이를 낳고 싶어했어. 그런데 내가 안 된다 그랬지. 여정이하고 나은 두 아들한테 약속했거든. 배 다른 동생은 만들지 않겠다고.”
조영남과 윤여정은 각기 무명가수와 신인 탤런트이던 스물 셋, 열 아홉 시절 처음 만났다. 5년 가량 이물 없는 오빠-동생 사이던 이들은 한 순간 연인 으로 발전, 조영남이 제대하고 얼마 후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식을 올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년 동안 조영남은 다섯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만큼 많은 미녀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래도 윤여정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조영남의 표현에 의하면 윤여정은 ‘엄청나게 명석하고 통 크고 앗싸하고 야무지고 훌륭하고 매력적인, 대한민국 최고의 여자’다. 결혼 무렵 윤여정은 ‘장희빈’ ‘민비’ 등 TV드라마 헤로인을 거쳐 김기영 감독의 ‘화녀’ ‘충녀’에서 보여준 신들린 연기로 대종상과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한 손에 거머쥔 한국영화계 최고 스타였다.
미국에서 성가(聖歌)가수로 자리잡은 조영남은 내친 김에 작지만 유서 깊은 트리니티 신학대학에 입학, ‘예수는 뭐고 종교는 뭐냐’는 질문에 천착해 들어갔다. 간간이 한국에 들어와 리사이틀도 하고 방송 출연도 해 돈을 벌어갔는데,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자 1982년 영주권도 포기한 채 귀국을 해버렸다.
이후 그는 가수로, 화가로, 작가로, 영화배우로, 방송MC로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갔다. 그 와중에 백은실이라는 새 사랑을 만나 윤여정과 이혼했고, 이후 두 아들은 엄마 손에서 듬직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컬럼비아대 졸업생인 큰아들(26)은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둘째 아들은 뉴욕대에 재학중이다. 그는 잘난 두 아들을 “노력 없이 얻은 훈장”이라며 자랑스러워한다. 자신이 한 일은 등록금 대준 것 뿐이기 때문이란다.
“내 평생 크게 잘못한 게 있다면 두 가지야. 하나는 애들 한참 어릴 때 집 나온 거, 또 하나는 몇몇 여자를 결과적으로 버린 셈이 돼버린 거. 하지만 그게 순리인 걸 어떻게 해. 운명을 거역할 순 없잖아. 물론 누가 그걸 꼬투리 삼아 날 천하에 나쁜 놈이라고 하면 할말 없는 거고.”
은지를 입양한 건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아내 뜻을 존중한 것인 한편, 시시때때로 신경에 와닿은 ‘사회 환원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이러저러한 일로 적지 않은 돈을 버는 처지에 몇 군데 후원금 보내는 걸로 시치미 뚝 떼기도 그렇고, 또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챙겨가며 앞뒤 통박 맞추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아이 하나 데려다 잘 키우면 주위 은공 베풀어준 이들한테도 남다른 보상이 되지 않겠느냐, 뭐 그런 계산이 섰다. 한마디로 그가 늘 강조하는 프랙티컬(practical, 실제 혹은 실증) 정신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딸 은지를 데려오던 날
그리하여 그들 부부는 한 영아원을 찾았다. 미리 답사를 다녀온 아내는 이미 마음 속에 정한 아기가 있었다. 그 역시 ‘간택’을 위해 아이들을 둘러보게 됐다. 늦은 저녁. 모두 자는지 아이들 방은 조용했다. 아내는 2층으로, 그는 1층으로 발을 옮겼다. 복도를 따라 걷는데 보모들끼리 나누는 한숨 섞인 대화가 들려왔다.
“은지가 됐으면 좋겠어.”
“몇 달 있으면 고아원으로 가야 되잖아….”
첫째 방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비쳐 들어오는 전등 빛 사이로 잠든 아이들의 작은 머리통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색색 단내 나는 숨소리를 들으며 방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땅 때렸다.
‘그래, 이건 아니다. 아이가 무슨 고무신인가, 예쁘면 골라가고 미우면 외면하게. 이렇게는 못하겠다. 골라서는 못 데려가겠다.’
그는 아이 둘러보기를 그만두고 원장에게 말했다.
“은지란 아이는 어디 있지요?”
그렇게 해서 다섯 살, 고아원으로 갈 수밖에 없던 은지는 그의 집으로 와 ‘조은지’가 되었다.
은지가 오고부터 집안은 날마다 전쟁터였다.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 못한 아이는 말을 잃어버리고 밤마다 이를 갈았다. 어느 날 아침, 화장실 쓰레기통을 본 조영남은 깜짝 놀랐다. 사탕 껍질이 한가득이었던 것이다. 풍족한 먹을거리에 익숙지 않은 은지가 하룻밤 새 사탕 세 봉지를 몽땅 까먹은 것이었다. “먹을 건 얼마든지 있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음식 앞에서는 자제력을 잃었다. 아이가 “아빠” 하고 달려와 품에 폭 안기기까지는 꼭 1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은지 좀 보여주세요.”
“그럴까? 은지야-, 조은지, 이리 와 봐!”
방문 하나가 배시시 열리더니 키 크고 하얗고 예쁜 소녀가 걸어나와 수줍게 인사한다. 아이가 조곤조곤 몇 마디 다정한 말을 남기고 들어가자 조영남의 감탄이 이어진다.
“아~, 너무 이뻐! 저렇게 이쁠 수가 없어.”
이제 막 은지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했다며 조영남은 엉뚱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엄청 사정해야 한 번 보여줄까 말깐데 증~말 예뻐. 환상적이라구. 그렇게 성스럽고 아름다운 걸 브래지어 속에 꼭꼭 숨기고 다녀야 하다니…. 참 여자들은 이상해. 한참 예쁠 땐 절대 안 보여주다, 늙어서는 언제 그랬나 싶게 간수들을 안 하잖아. 이거,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 아냐.”
공개 입양한 까닭에 은지 자신이나 친구들, 이웃까지도 친 부녀가 아닌 줄 다 알지만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 적은 한번도 없다. 조영남은 “우리 은지가 상황 처리를 참 잘 한다, 고운 맘결에 칭얼대는 일도 없다”고 칭찬한다.
그는 은지를 제법 엄격하게 키운다. 그러나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대화요, 설득이다. 그의 침실 문틀에는 손바닥만한 종이 몇 장이 압핀으로 삐뚤빼뚤 매달려 있다.
‘계약서. 조은지가 밤 10시 넘어서 컴퓨터를 하면 아빠가 컴퓨터를 던져버린다.’
‘반성문. 은지는 아빠 친구가 오셨을 때 인사를 제대로 안 했습니다….’
‘계약서. 조은지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아빠에게 뽀뽀를 해 준다. 비비는 뽀뽀는 아니고 보통의 사랑스런 뽀뽀만 한다.’
조영남의 바람은 하나, 은지가 자유롭고 주체적인 여성이 되는 것이다. 현모양처가 되고프면 그렇게 하고 희대의 자유부인이 되고 싶으면 또 그렇게 하고. 공부야 잘했으면 싶지만 안 될 걸 억지로 강요하는 건 그의 성정에 맞지 않는다. 며칠 전 이런 대화를 했단다.
“은지야, 난 니가 공부 못해도 괜찮아. 요즘 대학이 얼마나 많은데. 꼭 가고 싶으면 아무데나 가면 되지. 근데 아빠 친구들이 딸 대학 어디 갔냐 그러면, 솔직히 좀 쪽팔릴지도 모르잖니. 그러니까 우리 미리 연습 좀 하자. 니가 아빠 친구 역을 해. 내가 대답할게.”
그래서 연극이 시작됐다.
“조영남 씨, 따님은 어느 대학에 들어갔나요?”(은지)
“네. 강원도 산골짝 ○○대학 야간학부에 갔습니다.”(조영남)
심심할 때마다 이 놀이를 했더니 이젠 은지가 알아서 ‘공부하겠다’고 한단다.
평균의 눈, 상식의 눈으로 볼 때 조영남네는 결손 가정, 문제 가정의 표본이다. 엄마는 없다. 연로한 ‘가짜 할머니’가 살림을 도맡는다. 아버지와 딸은 피 한 방울 안 섞였다. 아버지는 맘만 내키면 애인이라도 불러들일 사람이다.
그런데 평화롭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듯 한없이 안정되고 완벽한 평화다. 그의 가정은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게 한다. 서로 자유로우면서 깊이 결속돼 있고, 각자 그 자신이면서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삶. 어쨌건 이 엉터리 같은 아저씨가 꽤 좋은 아빠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그나저나, 음반 준비는 잘 돼가세요?”
“지금 한참 밤새우고 난리요. 근데 이기자, 이거 한 번 들어볼래?”
나직한 기타 반주에 맞춰 결고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산에 뻐꾸기 울면….’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제목은 ‘모란 동백’이다. 가곡 풍에 아름답고 고즈넉한 이 노래는 시인 이제하가 조영남을 위해 작사 작곡한 것이다.
“음~, 참 좋은데요. 근데 이거 벌써 녹음하셨어요?”
“어, 했는데. 그래, 그것도 한번 들어볼까?”
스튜디오로 전화를 넣자 30분쯤 후 택배로 카세트테이프 한 개가 도착한다.
“관현악 반주군요. 전 아까 통기타 느낌이 좋던데. 이번 음반, 컨셉트를 어떻게 잡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언플러그드(unplugged) 스타일이 더 신선할 것 같아요.”
노래를 들어보고 아마추어 수준의 감상 몇 가지를 얘기했는데 반응이 의외다. 귀 쫑긋 세우고 진지하게 듣는 품이, 내 말이 정말 영양가 있다는 건가, 순간 갑자기 황송해지려 한다.
이런 식으로 대여섯 곡의 노래를 품평한다. ‘뽕짝 끼’를 넣어보자, 가사가 너무 무겁다, 읊조리는 창법이 더 멋있겠다…. 이런 즉흥적인 평가들을 그는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는 모양새다. 맞는 말이다 싶을 땐 엄지손가락까지 추어 올려가며 가차없이 자기 생각을 수정한다. 이 남자, 사람 얘기를 ‘들을 줄’ 아는구나.
“야, 덕분에 엄청난 진전이 있었어. 마침 저녁 약속이 하나 있는데 같이 가서 밥이나 먹읍시다.”
전화 몇 통이 왔다갔다한 뒤 집 밖으로 나오니 미모의 아가씨가 모는 중형차 한 대가 턱하니 대령해 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차에 몸을 싣고 얼마를 달린다. 조금 가다 웬 유흥가 건물 앞에서 다시 세 명의 아가씨를 더 태운다. 하나같이 탤런트 뺨치는 미인들. 조영남이 자주 가는 단골업소 ‘언니’들이란다.
차는 강남 신사역 근처 대형고깃집 앞에 섰다. 자리 잡고 앉자 얼마 후 다시 두 명의 아가씨가 더 합류했다. ‘문외한’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야말로 초일류. 여복 하나는 타고났다더니, 농담이 아니네.
그런데 분위기가 요상하다. 전혀 고객과 ‘언니’ 사이 같지 않다. 친한 친구나 삼촌·조카, 아니면 오빠와 귀여운 여동생들?
“한두 해 알아온 사이가 아니신가봐요?”
“그럼. 옆자리 얘는 벌써 9년째 나랑 오빠 동생인데. 처음 만났을 땐 갓 스무 살 어린 티가 풀풀 나더니 이제는 최고참, 가게를 통째 맡아 운영하고 있어요. 내 색시 은실이하고도 친했는데. 나머지도 얼추 거기서 일하는 친구들이고.”
강남 최고의 미녀 6명에 둘러싸인 조영남은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아 뵌다. 그런데도 느끼하다거나 불순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가씨들을 대하는 조영남의 태도는 딱 또래 친구 그 수준이다. 놀랄 만한 적응력. 가위 ‘도올을 만나면 도올이 되고, 조폭을 만나면 조폭이 되는’ 경지다. 이래서 여자들이 그를 좋아하는 건가. 내일 잊지 말고 물어봐야겠다.
저녁 7시, 하얏트호텔 카페테리아. 일껏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더니 주변에 자꾸 사람들이 모여든다. 조영남은 옆 자리에 낯선 사람이 앉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안경을 벗어 놓는다. 이유인즉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내가 조영남인 줄 못 알아보기 때문”이란다.
하여튼 오늘의 주제는 결혼과 이혼과 연애와 여자다. 우리나라에서 조영남만큼 이 분야에 해박한 지식과 프로의식, 뚜렷한 주관과 철학을 지닌 사람은 많지 않다.
우선 그는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 그 상대도 남자라면 누구나 욕심을 가져볼 만한 ‘이쁘고 착하고 어리고 말 잘 통하는 킹카’가 대부분이다. 지금도 그의 곁에는 네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애인, 애인 후보, 여자친구가 적지 않다.
조영남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두번 째 아내가 나타나면서 파경을 맞았다. 그는 첫 아내에게 “솔직히 난 새로 만난 그 여자가 너무 좋다. 그런데 너랑 아이들과도 헤어지고 싶지 않다. 부모 노릇, 남편 노릇 다 하겠다. 그저 사랑방 하나만 내다오. 머지 않아 돌아오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내는 “셋이 살 생각은 없다”며 미련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이혼을 하며 그는 전 재산을 아내에게 넘겼다. 한두 푼이 아니니 조금 나눠 가질 수도 있었으련만 그는 다 털어 줘버렸다. “싸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이나 연애나 마찬가지야. 프랙티컬! 실제적이고 합리적이어야지. 돈 몇 푼 갖겠다고 아등거리다 보면 맘 상하고 몸 피곤해지고. 그리고 난 그때 저울질을 한 거거든. 색시냐 새 여자냐. 다른 건 다 없어도 되겠는데 그 여자 없이는 못 살겠더라구. 그래서 결정한 거요. 내가 정말 원하는 걸 맘 편하게 얻는 쪽으로.”
세상 이목이나 아이들 장래 때문에 고민스럽지는 않았을까.
“노! 그런 게 눈에 뵈면 사랑이 아니지. 이혼은 해방이야. 그 힘든 전쟁을 현명하게 마무리지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하늘을 날 일 아닌가.”
20세 연하인 둘째 아내와는 결혼 첫날부터 각방을 썼다. 1층은 내 공간, 2층은 너의 공간. 그는 “서로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자”고 했고 아내도 얼추 동의하는 듯 했다. ‘자유’에는 다른 이성과의 동침도 포함돼 있었다. 사랑은 소유이고 순결의 맹세라는데 어떻게 그런 파격적인 제안이 가능했을까.
“니들은 다 사기꾼이야”
“사랑이란 건 없어. 실체가 없다구. 다들 자기 삶을 돌아보면 알겠지만, 세상에 그것처럼 잘 변하는 게 없거든. 영원한 사랑이란 바람이고 욕심일 뿐이야. 난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선량한 사람의 숫자와 비례한다고 봐. 그만큼 찾기 힘들다는 거지. 그건 거의 DNA의 차이 때문 아닐까. 뭐가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체질과 운명, 영혼의 문제.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나는 영원한 사랑이란 걸 믿지 않는 쪽이야.”
덧붙여 이런 얘기도 한다.
“내가 친구들한테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니들은 다 사기꾼이고 아주 종자가 나쁜 놈들이야. 왜냐. 지들은 밖에 나가 별 짓 다하면서 아내는 자기만 바라보고 살길 바라거든. 아, 그런 무경우가 어디 있나!”
조영남은 결혼할 때건 여자친구를 사귈 때건 그 여자의 ‘순결 여부’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왜? 자신이 순결하지 않으니까. 더 따지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냐는 어투다.
어쨌건 그는 두 번째 아내와도 이혼했다. 자녀, 애정관 등에 이견이 있었다. 그래도 조영남은 두 번째 아내 백은실 씨를 “윤여정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여자”라고 말한다. 진심이 담긴 표현이다.
두 번째 이혼하면서도 조영남은 재산의 반을 뚝 떼어줬다. 결혼 초부터 농담처럼 해 온 “내 재산 반은 니 꺼”라는 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해본 말이라기엔 너무 속 보이더라구. 그래서 줘버렸지. 그게 프랙티컬이요. 원하는 만큼 안 주면 원수 되기 십상이거든. 그럼 인생 더러워지잖아.”
이혼 후 미국으로 가 재혼한 백은실 씨는 얼마 전 아들을 낳았다. 조영남은 미국에 갈 때마다 그녀와 밥을 먹고, 함께 여자친구 줄 선물을 고르고, 그녀의 새 남편과 술잔을 기울인다. 얼마 전에는 가족과 함께 귀국한 그녀가 친정어머니, 언니까지 대동하고 집으로 찾아와 즐겁게 놀다 갔다. 물론 새 남편과 아기도 함께였다. 조영남은 “그런 게 나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쿨하고 프랙티컬한 삶이 가져다 준 예기치 않은 선물이다.
“대한민국 사람의 반 이상은 일생 단 한번도 자신과 완벽한 화학반응을 이루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죽어가요.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난 평생을 치열하게 그런 여자를 찾았어. 물론 지금도 찾고 있지. 일단 찾았다 싶어도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야. 이전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엄청난 전쟁을 치러야 하거든. 그래도 정말 놓칠 수 없는 여자라면 그런 따윈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아. 그 여자의 이쁨이 모든 걸 커버해버리니까.”
그는 “이쁨이란 게 공통된 무엇이라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내 눈에 미치도록 이쁜 여자를 만나는 것. 그건 누군가의 표현대로 ‘마법의 보자기’에 씌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기적이다.
“사람이 사랑에 빠져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하고 창의력이 샘솟는 때가 있을까. 특히 남자의 궁극적 목표는 사랑이지. 그래서 난 늘 여자 얘기를 하거든. 그런데 그런 날 보고 남들이 그러는 거야. 저놈 이상하다, 저놈 너무 밝힌다…. 그런 말 들으면 난 좀 억울해요. 종교도 철학도 학문도 모두 기능적인 거야. 사랑만이 진정한 신의 영역이지. 설명이 안되잖아?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 내 종교는 여자요. 그 위에 놓을 만한 것이 없어.”
그렇다고 조영남이 결혼 제도를 아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련된 차선책’이라고 추켜세운다. 마법의 보자기는 잭팟 같은 것이어서 일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이다. 그러니 ‘안전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평생 이해와 신뢰를 나눌 수 있는 이성과 결혼 제도를 통해 공고한 결합을 이루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제 사람들은 궁금할 것이다. 그가 오랜 ‘임상실험’을 거쳐 터득한 사랑의 기술은 무엇일까.
“밖의 짐작과 달리 나는 추근대는 스타일이 아니요. 내가 기억하는 한 먼저 구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냥 기다리는 거지. 가만 있어도 알아서 오니까.”
비법이 뭐냐니까 쑥스러운 듯 웃는다.
“글쎄…, 삶에 대한 태도랄까 지향이랄까. 하여튼 난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짓 따윈 하질 않아. 먼저 전화를 거는 법도 거의 없어요. 그저 상대편의 얘기를 들어주지. 끝까지, 아주 열심히,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 여성들은 민감해서 남자가 자신의 말과 행동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그냥 감으로 알아버려요. 그저 꾸밈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여성을 배려해야 거지.”
하지만 그 역시 지금도 시행착오를 겪는단다. 사랑은 다 제각각이라 일반론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 또 그 마법의 보자기라는 것이 코드가 맞는 사람에게만 씌워지는 것도 아니어서, 성공적인 사랑과 이별을 위해선 치사하지만 ‘테크닉’이란 걸 발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조영남은 너무 뜨겁게 다가오는 연인에겐 “come down(진정하라)”이란 말을 자주 한다. 세게 타오르는 불길은 그만큼 빨리 꺼지므로.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사람이 아니다’ 혹은 ‘사랑이 식었다’는 느낌이 들 때도 “헤어지자”는 말은 먼저 꺼내지 않는다. 코드가 안 맞으면 절로 헤어지게 될 일을 미리 말 꺼내 고통스러운 체력싸움으로 몰고 갈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교활하고 계산적인 사람이라고 흉봐도 할 수 없어. 사랑하기도 부족한 시간, 전화통 붙들고 말싸움하느라 속절없이 휘발시켜버릴 수는 없잖아요?”
토요일이다. 그와의 첫 통화로 월요일 아침을 열었고, 내쳐 일주일을 매일이다시피 만났다. 또 올림픽도로변, 그의 집으로 향한다. 장정(長征)의 끝.
집 근처에 있는 불고기집으로 간다. 식당 주인이 친구인가 보다. 편한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자리에 앉는다. 음식 나르는 아주머니들이 알은체를 한다. 유난히 살가운 것이 꼭 단골 연예인이어서만은 아닌 것 같다.
그에게는 몇 가지 눈에 띄는 식당 이용 습관이 있다. 첫째, 밥 나르고 차 나르는 사람들에게 유난히 친절하다. 둘째, 물 달라, 반찬 달라는 심부름을 거의 시키지 않는다. 셋째, 식당 종업원에게 주는 팁은 무조건 만 원짜리 한 장. 아무렇지도 않게 척 건네는 스타일이라 피차 줬네 받았네 인사가 길지 않아 좋다. 넷째, 웬만하면 맛있다, 예쁘다, 기분 좋게 먹는 편이다. 다섯 째, 소식(小食)이 몸에 배 있다.
식사 후 요즘 강남에선 찾아보기 힘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역시 단골집. 조영남은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못내 미안한지 유자차, 콜라, 커피로 바꿔가며 한 시간마다 차를 더 시켜 먹는다.
“주변에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연예인은 기본이고 정계, 학계, 종교계, 예술계, 심지어 주먹 세계까지 웬만한 원로·중진들과는 다 친하신 폭이잖아요.”
“그렇지, 어떤 때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심하다 싶어 좀 겁이 날 때도 있다니까. 어떻게 된 게 처음 만났을 땐 별 볼 일 없던 사람들도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제 분야에서 다 대장이 돼 있으니….”
요즘 그와의 교분으로 단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인물은 도올 김용옥이다. 가수 이장희의 소개로 만나 3년을 하루같이 돈독한 우정을 쌓아왔다. “도올하고 나는 남자가 우정으로 갈 수 있는 맨 끝 단계까지 경험한 사이”라는 것이 조영남의 설명이다.
“사람들이 그래. 조폭들하고 있으면 형제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도올이나 백남준, 김성수 성공회 대주교 같은 분들하고는 어째 그리 죽이 잘 맞아 돌아가냐고.”
조영남은 ‘무서울 정도로’ 깊고 폭넓은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해 “아마도 예인 기질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공부는 노력으로 되지만 예술적 자질은 타고나는 것. 사람들은 그런 재능에 경외심을 갖기 마련이다.
“얼마 전 제주대에서 ‘예술과 인생’이란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학생들한테 이런 질문을 던졌지. DJ와 김정일이 나란히 서 있으니 어느 쪽이 더 세련돼 보이더냐. 대부분 ‘김정일’이라고 답하더군. 그래서 내가 그랬지. 맞다, 그건 김정일이 영화를 많이 본 인간이어서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은 촌스러운 옷을 입고 있어도 세련돼 보이게 마련이다, 잊지 마라, 예술은 그토록이나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
역류 타기가 진짜 인생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난 내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라고 생각해요. 돈, 사랑, 명예, 재능, 빠짐없이 갖췄잖아. 특히 직업이 끝내주지. 나 좋아서 부른 노랜데 박수갈채는 물론 돈까지 척척 집어주니까. 아, 난 천벌을 받을 거야. 별로 노력한 것도 없이 이런 행운에 둘러싸여 있다니….”
그러나 조영남이 갖고 있는 인간적 매력의 상당부분은 후천적 노력을 통해 계발된 것이다.
예를 들어 겸양.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상당히 겸손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사람들 앞에서 “난 이런저런 것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자랑을 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상대편에게 자신의 논리, 생각, 관심사를 강요하지 않는다. 주로 듣는 편이며, 그중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으면 지체없이 동감을 표시한다. “맞아, 바로 그거야!” “대단한데!” “졌다 졌어!” 이런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조영남은 청탁을 하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당장 작은 이익은 볼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경력과 명성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영남은 얼핏 생활인이라기엔 지나치게 헐렁하고 가벼워 보인다. 실제로 그는 주머니에서 얼마가 나가는지, 통장에는 얼마가 있는지 등의 돈 계산에 별 관심이 없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글 쓰고 그림 그리고 노래하고 방송 타고, 되는 대로 스케줄 잡아 되는 대로 밀어붙인다. 지나치게 솔직해 쓸데없는 오해도 받기 일쑤다.
그런데 이 역시도 단견이다. 가까이서 본 조영남은 대단히 신중하고 명확한 사람이다.
우선 돈. 계획 없이 벌고 계획 없이 쓰는 것은 맞다. 그런데 대원칙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빌리거나 빌려주지 않는다. 친한 친구나 가족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래도 꼭 도와야 할 상황이면 차라리 그냥 줘버린다. 대신 밥 사고 술 사는 돈은 아끼지 않는다.
매해 그는 “올해가 최고였어, 내년부터는 내리막일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는 공연이 더 잘 되고 그림 값도 오른다(현재 조영남의 화투장 그림은 한 점에 1000만~1500만 원을 호가한다). 애초에 지금 얼마가 있으니 얼마를 아끼고 얼마를 더 벌어야 한다는 계산이 없는 탓이다. 돈 몇 푼 더 건지겠다고 잔머리를 쓰는 대신 본업에 충실하니 성공이 절로 따라오는 것.
코스닥이 한참 활황일 때 그에게도 “1000만원만 넣고 잊어버리면 100배로 만들어 돌려주겠다”는 제안이 여러 번 들어왔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큰돈을 번 사람이 주변에 많았지만 그는 끝내 한눈 팔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라 그래도 보나마나 신경 쓰일 텐데 뭐. 난 예술가잖아. 그런 데 정신 분산시키면 노래, 그림에 먼지가 끼거든. 돈 못 벌어도 좋으니 부차적인 일로 속 태우며 살고 싶지 않은 게요. 그냥 벌면 버는 만큼 재미있게 쓰면서 살 거야. 벌고 쓰는 균형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누추해지지.”
조직에 묶여 있는 이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지만 ‘몸’이 곧 자산인 조영남에겐 ‘마음 편히 살겠다’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재테크 전술인지 모른다.
“노자는 물처럼 살라고 했지. 그건 틀린 말이야. 인간은 역류를 탈 줄 알아야 해요. 물살 따라 흘러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내 색깔을 낼 수 있어야지. 그러려면 솔직하고 용기가 있어야 돼. 엄청난 에너지가 요구되니까. 나만 해도 너무 솔직하다는 이유로 오해를 받거나 심지어 ‘덜 떨어진 인간’ 취급을 받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렇다고 소신을 굽혔다간 결정적인 순간에 낭패를 보게 돼지. 하나의 거짓말이 참말로 둔갑하려면 다섯 개의 거짓말이 더 필요하거든.”
이렇게 거짓이 아닌,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꿈꾸는 조영남은 확고한 실증주의자다.
“난 내가 본 것, 내가 경험한 일에만 의미를 둬요. 종교인이면서도 사기를 일삼고 죄책감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가 적지 않지. 그런 걸 보면 종교를 가진다고 해서 인간이 선해지거나 구원을 얻는 건 아닌 게 분명해.”
그는 신학대학 시절 ‘예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예수가 설파한 진리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거지. 그런데 이건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거든. 예수는 그 진리를 몸으로 실천했고, 그래서 신이 된 거요. 예수처럼은 될 수 없더라도 역시 노력을 해야겠지.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다 보면 그 속에서 자유가 생겨. 굳이 금기를 세우고 규율을 만들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 구절은 바로 이걸 뜻하는 거야.”
사랑이 진리이고, 진리는 자유이니, 사랑이 그대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리라.
“난 나뭇잎처럼 쓸려가고 싶어. 언제나 사람들이 날 낙엽처럼 쓸어버려줄까. 그래도 죽는 날까지는 죽도록 사랑할거야. 연애하다 죽는 게 내 소원이라구.”
▒ 그리고… 새벽
어느덧 오전 2시. 기운 계단 내려 디뎌 거리로 나선다. 어둔 하늘 모퉁이, 작은 별 서너 개가 까무룩 잦아든다. 청담동에도 별이 있었구나.
터덜거리며 걷던 조영남이 이런 말을 툭 던진다.
“요즘은 시시때때로 울음이 나와.”
‘대한민국 최고 행복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다. 불 꺼진 도시 때문에 문득 센티해진 것일까.
“그저 가만 있다가도 불쑥 그런 증상이 찾아와. 음-,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꼭 해야 할 말도 차마 할 수 없는 현실이랄까. 가령 얼마 전 TV에 나가 예수 얘기를 했을 때 말이야.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 그러면 내 진실은 이거야. 그냥 공자, 소크라테스, 그렇게 다 같은 인간이다. 근데 그 말을 못했어. 위선을 떨었다구. 기독교인들이 뭐라 그럴까봐.”
평생을 정면 돌파하는 자세로 살아온 그에게는 며칠 전 저지른 그 ‘위선’이 못내 아픈 상처가 돼 버렸나보다. 솔직하다 못해 용감한 그도 이렇게 나이를 먹어 가는 건가.
지난 나흘, 그는 정말 우리 앞에서 충분히 발가벗었던 것일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인간도 타인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될 수는 없다는 것을. 특히나 감춰져 있는 그 무엇이 상처거나 미움이거나 고독이거나 위악인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