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중년 남성을 위한 패션 명품 가이드

“당신을 위한 딱 한 벌, 인상이 바뀌면 인생도 바뀐다”

  • 김묘환 < CMG 대표 >

    입력2004-09-01 17: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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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딩크를 패션 리더로 급부상시킨 세계적 명품들. 에르메스 타이에 루이뷔통 가방, 아르마니 슈트와 몽블랑 만년필. 전략인 세상, 시장 옷 열 벌보다 명품 슈트 한 벌이 더 값진 이유.
    한달여간 온 나라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2002월드컵. 붉은 물결 출렁이던 광화문 거리의 장관은 우리나라에 대한 외국의 인상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은자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정열적인 동양의 자존심, 코리아’로의 변신. 필자처럼 패션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의미심장한 변화다. 붉은악마로 대변되는 코리아 열풍은 우리가 말하는 패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불과 십수년 전, 88서울올림픽 당시와 비교해보면 패션업계를 강타한 문화충격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올림픽 유니폼 디자인 중 각국 국기 도안을 이용한 것이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관련 공무원들이 보인 반응은 ‘국기 모독죄’(그런 죄목이 실제로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운운하는 극도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에는 어땠는가. 전국의 붉은악마들이 연출해낸 거리 패션은 우리 자신은 물론 외국인들조차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세계적 패션 이벤트였다.

    남성용 패션 명품을 소개한다면서 월드컵 얘기를 꺼내는 건 무엇보다 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 때문이다. 그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패션 센스까지도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됐다. 그의 패션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명품족 히딩크’ ‘노블리안 히딩크’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명품’이란 어떤 것을 의미할까. 그냥 비싼 외제 패션용품이면 다 명품일까. 또 명품과 명품이 아닌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히딩크는 명품족인가

    우선 팬티도 아르마니 상표만 입는다는 히딩크는 정말 명품족일까. 나는, 히딩크는 통념적 의미의 명품족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네덜란드인이기 때문이다. 네델란드는 우리가 더치페이라 부르는 더치트리트(Dutch Treat)의 발상지다. 그만큼 검소하고 실용적이며 비즈니스적 사고에 충실한 국민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풍토에서 나고 자라 스포츠계 인사로 활동한 히딩크가 ‘내추럴 본 명품족’이 아닐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가 명품족으로 ‘오해’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명품족이란 수식어를 달고 다니게 된 것은 비싼 옷만 입거나 자기만의 뛰어난 패션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용모가 화려해서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를 잘 아는 이들은, 히딩크를 명품족으로 둔갑시킨 건 그의 여자친구, 엘리자베스라고 말한다. 아프리카 출신의 역사학도 엘리자베스를 만나면서 히딩크가 생활의 멋과 여유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적어도 4년 전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던 히딩크는 운동복 차림을 즐기는 평범한 스포츠인이었다. 그런 그를 엘리자베스는 불과 2년여 만에 삶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신사로 바꿔놓았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스포츠 지도자들이 MBA과정을 이수하며 ‘필드의 경영자’라는 지도자상을 구현해왔는데 그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이미지 컨트롤이다. 경영기법 도입에 적극적인 스포츠 지도자들은 경기장에서 유니폼 대신 절제된 정장을 즐겨 입는다. 그 배경에는 스포츠도 비즈니스라는 개념이 깔려 있다.

    히딩크가 월드컵 기간 내내 짙은 감색에 그레이 톤 버튼다운셔츠와 미니모티브 장식의 넥타이를 착용한 것은, 그것이 극도로 절제된 지도자의 이미지와 최고 리더로서의 경영마인드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차림이기 때문이다.

    “가방이 아닙니다, 욕망입니다”

    명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표준화된 척도는 없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명품에 대한 기준을 물으면 그야말로 다양한 답변이 나온다. ‘비싼 물건’이라는 원초적 대답부터, ‘구하기 힘든 것’‘유명한 상표’ ‘오래된 상표’ 같은 공통 분모적 요소와 함께, ‘가짜가 만들어지는 상품’이라거나 ‘중고가 거래되는 상품’ 같은 더욱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답변도 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명품이라 분류되는 상품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로 보인다. 이전까지만 해도 패션 명품은 특수계층을 위한 수공예품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자연히 희소가치가 있고 구매 과정이 특이하며 경제력만으로는 소유하기 어렵다는 측면에 더 큰 비중이 두어졌다. 그런데 1954년, 패션사에서 오래도록 기억할 만한 사건이 터진다.

    그해 만들어진 제임스 스튜어트와 그레이스 켈리 주연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작품 ‘이창(Rear Window)’. 이 영화에는 유명한 쇼핑 신이 나온다. ‘에르메스’의 영원한 명품 ‘켈리백(Kelly Bag)’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레이스 켈리가 상점 점원에게 작은 핸드백을 들어 보이며 가격을 묻는다. 종업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8000달러(1954년임을 기억하자)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어떻게 핸드백 하나가 8000달러냐”고 되묻자 종업원은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이건 가방이 아닙니다, 욕망입니다”라고. 이어 1956년,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같은 가방으로 임신한 배를 가리는 사진이 라이프지 표지를 장식하면서 그 핸드백에는 켈리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켈리백과 영화에서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한 목을 장식하고 있던 스카프. 여기에 명품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단어가 등장한다. 바로 ‘욕망’이다.

    서구 귀족사회가 몰락하고 난 뒤 형성된 새 질서, 즉 근대적 자본주의 시민사회에서 명품의 가치 확립은 이렇게 시작됐다. 경제적 성취를 달성한 자들의 기존 질서에 대한 동경과 욕망의 해소. 이런 배경 아래 본격적인 명품의 탄생이 이어진다. 아니 태어난 것은 그 훨씬 이전이지만 비로소 새로운 문화 코드로 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게다.

    바킨백(Birkin Bag)이나 켈리백 등 여성들에겐 영원한 동경의 대상인 에르메스도 시작은 남성들을 위한 가죽 마구 제품이었다. 에르메스의 170여 년 역사는 독일계 이민인 티에르 에르메스가 파리 마들레느 광장 인근에서 마구용품을 수공 제작하면서 시작됐다. 처음 에르메스의 성가를 높인 것은 특유의 견고함이었다. 이후 7대에 걸쳐 에르메스 가문은 ‘개성 있는 품위’로 표현되는 에르메스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에르메스는 코코 샤넬 등 전설적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5년, 프랑스의 유명 작가 콜레트는 에르메스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에르메스 제품의 견고성과 품위, 그리고 불필요한 장식을 최대한 억제하는 단순미는 한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함을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평을 들으며 오늘날 에르메스 왕국의 기틀을 구축한 이는 3대 계승자인 에밀 에르메스다. 그는 당시 두 가지 일에 심취했다. 첫째는 수집벽이다. 그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사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에밀은 지금도 파리 생토노레 거리에 있는 에르메스 박물관을 설립했다. 후손들이 이곳의 소장품을 둘러봄으로써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되길 기대한 것이다. 실제로 에르메스의 디자이너들은 지금도 에밀의 수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그가 둘째로 몰두한 일은 여행이다. 전세계를 돌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고객을 만들어 나갔다. 에밀은 여행 중 만난 대부분의 사람을 그의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발휘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에르메스의 정신은 역사성 속에서 항상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흔히 명품은 오래된 것 내지는 고전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에르메스는 어느 시대건 늘 혁신을 추구해왔다. 지퍼를 처음 채택한 브랜드도 에르메스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레드 컬러를 제품에 처음 도입한 것도 에르메스다. 이번 월드컵에서 붉은악마들이 온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처럼 에르메스가 핸드백에 레드 컬러를 사용한 것은 당시로선 대단한 모험이었다. 나일론을 명품 소재의 반열에 올려놓은 브랜드 하면 흔히 프라다를 떠올리지만, 남성 제품에서 나일론 섬유를 소가죽과 결합해 선보인 첫 브랜드 역시 에르메스다.

    남자들을 위한 에르메스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넥타이다. 매년 10여 개의 테마로 100여 점의 새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지만 미니 모티브(작은 무늬)의 넥타이를 보면 사람들은 금세 에르메스를 떠올린다. 겉에 브랜드를 알리는 표식이 없음에도 기막히게 에르메스를 짚어 내는 것이다. 필자 역시 정장보다 캐주얼한 차림을 할 때가 많음에도 몇 장의 에르메스 넥타이를 갖고 있다. 선물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1995년 뉴욕의 바니스에서 115달러란, 당시 평범한 비즈니스맨에게는 거금이랄 수 있는 돈을 주고 구입한 저니 시리즈 넥타이는 8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가장 애용하는 제품이다. 시간이 흘러도 항상 새로운 느낌을 주며 어떤 스타일의 재킷과도 잘 어울린다. 더 중요한 이유는 주로 만나는 부류의 사람들(패션업계)이 필자를 ‘에르메스를 입는 사람’으로 기억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에르메스의 또 다른 명품 중에는 비즈니스맨을 위한 다이어리 겸용 파우치(손지갑)가 있다. 비즈니스의 상대가 에르메스 파우치에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해 메모를 한다면 필자는 그 사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명품은 단순한 제품 가치보다 그것을 소유한 자의 안목까지 함께 발산하기 때문이다.

    ▶ 지도자를 위한 슈트 | 안젤로 리트리코

    명품의 탄생에는 하나같이 극적인 스토리가 존재한다. 에르메스처럼 오랜 시간 귀족계층의 전유물이었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초기에는 스타마케팅(지금은 계약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당시에는 의도가 분명치 않았다. 서로가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결합한 정도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나 PPL(Product placement, 영화나 드라마등에 홍보 목적으로 상품을 소품으로 등장시키는 간접 광고 방식)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심었다. 잘 알려진 예로는 그레이스 켈리와 에르메스 외에도 오드리 헵번이 ‘사브리나’ ‘오후의 연정’ 등의 영화에서 애용한 지방시가 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 남성복 하우스인 ‘안젤로 리트리코(Angelo Litrico)’는 대중 스타가 아닌 세계적 권력자를 통해 그 이름을 세계에 알린 드문 경우다.

    1920년대 이탈리아 시실리 섬에서 태어난 안젤로 리트리코는 패션사에 커플룩을 처음 발표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와의 일화다.

    1950년대 후반 세계 정세는 한국전쟁 후 가속화한 동서냉전 기류 속에서 미소간 극한 대립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59년 유엔총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연설 도중 당시로선 대단한 해프닝을 벌인다. 자신이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단상 위에 올려놓고는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느냐고 묻는데, 바로 이 구두를 신고 왔다”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흐루시초프는 서방 세계인 이탈리아의 한 무명 브랜드에 거창한 신고식을 치러준 것이다.

    리트리코는 신문에서 당시 세계적 화제 인물이던 흐루시초프의 사진만 보고 양복을 지어 모스크바로 보냈는데, 그 옷을 입어본 흐루시초프가 매우 만족해 하며 답례로 소련제 카메라를 선물하곤, 직접 자신의 정확한 치수를 보내 유엔총회 방문 패션 일습을 부탁한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구두도 포함돼 있다. 이 해프닝으로 리트리코는 미국에 널리 알려지게 됐고, 뉴욕에서 패션쇼를 할 때에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인 37개 국어로 인터뷰를 하는 등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 또 하나의 명품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이후 리트리코의 고객은 리처드 버튼, 존 휴스톤과 같은 은막 스타들뿐 아니라 유고의 티토 대통령, 아르헨티나의 페론 대통령, 이집트의 나세르 수상,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닉슨 대통령 등으로 넓어져 갔다. 그야말로 세계 정상들의 패션을 전담하는 명품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1986년 안젤로 리트리코는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처음 문을 열었던 로마 시실리 거리에는 그 형제들의 손으로 세계 최고의 양복이 만들어지고 있다.

    네덜란드 사람 히딩크 감독까지 몰입하게 만든 ‘조지오 아르마니’의 위력은 남성 명품에선 가히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대 후반,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베스트셀러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아르마니 넥타이와 양복, 그리고 셔츠도 아르마니를 입는다… 가게의 주인은 손님이 이런 차림으로 와주었으면 하는 옷들을 그 자신도 차려 입어야 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아르마니 패션의 위력은 대단하다. 몇년 전 벤처 붐이 한창일 때 이른바 잘 나가는 젊은 CEO들은 언론 인터뷰 때마다 자신이 아르마니 신봉자임을 강조했다. 핸섬하고 능력 있는 젊은 리더들에게 붙는 그 어떤 거창한 수식보다 그가 아르마니 마니아라는 사실은 그가 능력 있고 돈 잘 벌며 남다른 안목까지 갖춘 인물임을 웅변해주었다.

    아르마니는 밀라노 리나센토 백화점의 바이어였다. 이탈리아 브랜드인 니노세루티에서도 일했다. 그가 세계적 디자이너로 발돋움한 계기는 할리우드의 영화의상을 맡으면서부터다. 맨 처음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한 영화는 리처드 기어를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케 한 1980년 작 ‘아메리칸 지골로’다. 이외에도 흑인인 에디 머피에게 상류사회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한 ‘48시간’, 1920년대 스타일로 패션계에 복고 열풍을 불러일으킨 ‘언터처블’ 등 100여 편의 영화의상을 담당했으며 지금도 그 일에 푹 빠져 있다. 스스로 “단지 취미를 일에 연결시킨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영화의상 제작은 그를 단시간 내에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르마니는 20세기 후반의 그 누구보다 영화, 좀더 실제적으로 표현하면 스타 캐릭터를 잘 활용한 사업가다. ‘아메리칸 지골로’를 보면 ‘조지오 아르마니가 의상 담당자가 아니라 감독이었나’ 싶을 만큼 그의 패션이 영화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리처드 기어의 옷장을 열면 잘 정돈된 아르마니의 슈트가 나타난다. 이중 몇 벌을 선택한 후 아르마니 상표가 선명히 드러나는 셔츠들을 또 골라낸다. 이어 그가 여는 작은 서랍에는 아르마니가 즐겨 사용하는 예의 작은 패턴 무늬 넥타이가 들어있다. 이것들로 치장한 리처드 기어는 1980년대 호모섹슈얼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스타일리스트로 다시 태어난다. 그의 모습은 아르마니가 1980년대 모던 패션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주지시킨다. 아르마니는 훌륭한 디자이너이기에 앞서 뛰어난 마케터였던 것이다.

    조지오 아르마니는 매우 복잡한 브랜드다. 우리는 그저 아르마니라 통칭하지만 최고가의 ‘조지오 아르마니 블랙라인’부터 ‘콜레지오니’ ‘엠포리오 아르마니’ ‘아르마니 익스체인지’까지 무려 29개의 컬렉션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이것들을 관리하기도 복잡할 텐데 아르마니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하우스 브랜드인 ‘마리오 발렌티노’를 위해 가죽 컬렉션을 제공하고, 심지어는 이탈리아 공군의 유니폼까지 담당하는 등 일반인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초인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워크홀릭 상태이면서도 그는 생트라페즈, 브로니 등 유럽 여러 곳에 산재한 자신의 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이야말로 70세 가까운 나이에서도 그를 트랜드 세터(유행의 창시자)로서 혹은 아르마니 왕국의 교주로 존재케 하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그는 말한다.

    “나는 모델을 위한 옷을 만들거나 유행을 좇지 않는다. 나는 고객들이 패션의 희생물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일하는 사람과 옷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조화되기를 원할 뿐이다.”

    실제로 그의 컬렉션에서 새 유행이나 파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절제된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절묘하게 조화된 슈트, 과장하지 않은 생활 속 멋이 살아 숨쉬는 캐주얼 등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이렇게 아르마니는 성공한 비즈니스맨 혹은 성공을 꿈꾸는 남성의 스타일, 그 정점에서 당당히 군림하고 있다.

    ▶ 프로페셔널을 위한 장인정신 | 루이뷔통

    대중적 명성에 있어 ‘루이뷔통(Louis Vuittong)’을 능가할 브랜드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모조품에 가장 많이 시달린 브랜드이기도 하다.

    170여 년 전 순회공연을 하는 오페라 가수들의 여행용 가방을 만들면서 시작된 루이 뷔통의 역사는 19세기 유럽 제국주의의 끝 모를 팽창 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당시 유럽 귀족들은 인도, 아프리카 등 대부분 열대 지방인 식민지 여행을 위해 특별한 도구를 필요로 했다. 찌는 듯 더운 날씨에서도 내용물을 잘 유지하고 보호할 수 있는 대형 가방이 그것이었다. 그런 욕구를 누구보다 완벽하게 충족시켜준 것이 바로 루이뷔통의 장인정신이다. 당연히 유럽 귀족들의 여행 준비 첫 항목은 루이뷔통 가방을 맞추는 일이었다. 이런 인기 덕에 이미 100여 년 전부터 루이뷔통 모조품들이 유럽 각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사태에 직면해 루이뷔통이 내놓은 비방은 기존의 캔버스 천을 복잡한 패턴으로 구성된 모노그램 캔버스 시리즈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 디자인은 지금도 루이뷔통의 대표적 스타일로 여겨질 만큼 오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모방이 어렵도록 심혈을 기울여 창안한 이 시리즈는 특유의 LV 심볼과 함께 루이뷔통의 아이덴티티를 너무도 뚜렷이 표현하고 있어서(실제로 이 디자인은 세계 최초로 회사 심볼을 제품에 사용한 예로 기록되고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흔하게 모방하는 제품이 돼버렸다.

    에피 앰배서더 브리프 케이스(에피 시리즈의 서류 가방)에서 모노그램 캔버스의 어젠더(가죽 서류철)를 꺼내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하는 비즈니스맨에게서 감각적이면서도 차분한 전문가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건 100년도 넘게 이어져 온 루이뷔통의 이미지가 투영된 까닭일 것이다.

    ▶ 애인이 더 좋아하는 세련미 | 프라다

    프라다의 역사는 1913년에 시작됐다. 여행광이던 창업주 마리오 프라다는 밀라노에 최고 품질의 가죽제품 매장을 열겠다는 꿈을 갖고 두 개의 매장을 열었다. 이후에도 프라다는 여행을 계속하며 세계 각국의 새로운 재료들을 들여와 상품 개발에 응용했다. 여기서 유명한 하트만 트렁크와 군대 텐트 소재인 포코노 방수천을 이용한 상품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프라다의 진정한 발전은 창업주의 손녀 미우치아 프라다의 손에서 시작됐다. 패션사업에 출사표를 던진 것. 1978년 미우치아는 프라다 브랜드로 가죽 컬렉션을 발표했고 곧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프라다 브랜드의 컨셉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옷을 만든다’는 것. 여타 명품 브랜드와 분명하게 차별되는 지점이다. 가죽 컬렉션에 이어 1989년에 시작한 의류 라인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프라다의 ‘아름답게 소박하고 소박하게 아름다운 옷’은 이제 세계적인 패션 코드가 됐다.

    패션을 공부한 적이 없는 사회주의자 경력을 지닌 미우치아 프라다가 빠른 시간 안에 이런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안티룩(Anti Look,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또 하나의 트랜드)의 거장이라고까지 불리는 그녀의 색다른 관점과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가 1990년대 중반 남성복과 남성용 액세서리를 선보였을 때 시행착오 없이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 프라다에 깊이 매료된 여성 고객들이 그녀의 남편과 애인을 위해 프라다 워모를 구매하거나 추천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죽제품에서 출발한 프라다의 남다른 장인정신은 남성용 구두와 가방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급 남성복 브랜드다. 창업자의 이름을 딴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 gildo Zegna)’는 뛰어난 품질과 착용감으로 유명하다.

    에르메네질도 제냐가 이탈리아를 뛰어넘어 해외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다. 이 무렵 창업자의 두 아들 알도 제냐와 안젤로 제냐가 회사 경영을 맡게 됐고, 이들은 고급 소비자 층을 겨냥한 남성 기성복 시장에 진출했다.

    오늘날 제냐는 원자재에서부터 완제품 생산, 판매 단계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직접 제어하는 ‘수직통합체계(Vertical Management System)’를 구축한 대표적 기업이 됐다.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창조적 디자인, 그리고 최고급 천연원료만 사용하는 것을 기업철학으로 삼고 있으며, 이는 10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제냐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최상의 착용감을 위해 고객의 체형에 맞도록 기성복을 보완하는 반 맞춤복 시스템 ‘수 미주라(Su Misura)’다. ‘수 미주라’는 이탈리아 말로 ‘당신의 사이즈에 맞춘다’는 뜻. 모든 고객의 신체 사이즈를 컴퓨터로 정확히 보존 관리해 고객이 원하는 원단과 스타일만 고르면 세계 어느 매장에서나 주문 가능하도록 했다. 주문 후 3주가 지나면 자신의 체형에 꼭 맞는 옷을 전달받을 수 있다.

    또 다른 이탈리아 메이커인 ‘로로 피아나(Loro Piana)’는 제냐와 함께 세계 모직물 산업의 두 기둥이다. 19세기 초 트리벨로의 상인으로 출발해 직물 제조업에 뛰어든 뒤 6대에 걸쳐 럭셔리(최고급 수공품)의 전통을 계승해오고 있다. 특히 최고급 소재 중의 하나인 캐시미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스웨터류도 최고급이다. 정장 라인은 제냐와는 달리 완전 주문 생산 방식의 맞춤 슈트로 세계 고급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좋은 재료에서 완벽한 제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 브리티시 트래디션의 대명사 | 폴 스미스

    패션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나라가 세계사에서 차지했던 비중만큼이나 크고 중요하다. 익숙하게 들어온 영국풍, 즉 ‘브리티시 트래디션(British Tradition)’이란 단어와 함께 연상되는 이미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스코틀랜드의 타탄체크(Tartan Check), 백파이프(Bag Pipe) 연주 복장, 거기 주로 사용되는 색상들…. 트위드(Tweed), 개버딘(Gabardine), 홈스펀(Home Spun) 등 소재 이름만 들어도 패션 종사자들은 영국을 떠올린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영국패션의 영향력은 국가 영향력 쇠퇴와 더불어 빛을 잃어가는 듯하다. 대표적 브랜드인 ‘닥스’나 ‘아쿠아스큐텀’은 일본 회사에 팔렸고, 레인코트의 대명사 ‘버버리’도 해외 매각 일보 직전에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영국정부의 개입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신사의 나라 영국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브랜드가 바로 ‘폴스미스(Paul Smith)’다. 폴스미스는 적어도 최근 몇 년간 남성복에서 최고의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다.

    폴 스미스는 빈민가에서 태어나 한번도 패션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없는 사람이다. 다른 디자이너들의 물건을 사다 파는 컬렉션 숍으로 시작한 그가 불과 4년 만에 자기 이름을 건 브랜드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천재였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 동안 국내의 몇몇 기업이 폴스미스를 소개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것은 그만큼 폴스미스가 지극히 영국적인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즈룩이라고 부르는 모던 브리티시룩은 에드워드 왕조시대의 해학적 정서를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스타일을 말한다. 미국의 전후세대가 1970년대 보수적 부모세대에 대한 반항으로 유행시킨 것이 히피 스타일이라면 영국에는 모즈룩이 있다. 히피 스타일은 사라졌지만 모즈룩은 여전히 인기있는 복고 아이템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 모즈룩의 중심에 있는 것이 폴스미스다.

    폴스미스가 지닌 명품적 요소는, 우선 몇 년을 입어도 항상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 명품다운 차별성도 뚜렷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폴스미스가 실용적 스타일에 강렬한 느낌의 소재와 색상들을 채택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폴스미스를 구입해 보자. 장롱 문을 열었을 때 언제나 가장 먼저 선택하는 옷이 될 것이다.

    ▶ 보보스를 위한 뉴 스타일 | 씨피 컴퍼니·케네스 콜

    부르주아지와 보헤미안의 합성어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리더들의 특성을 상징하는 신조어 보보스(BOBOS). 삭막한 도시 생활에서 한편으로는 쟁취와 도피라는 이율배반적 욕망에 몰두하는 신질서의 리더들을 뜻한다. 패션계에서도 보보스는 가장 중요한 고객층이자 컨셉트다.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메가 트랜드가 된 것이다.

    보보스 스타일은 새로운 명품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 첫번째가, 소리 소문 없이 자기 스타일을 지닌 오피니언 리더들의 캐주얼로 자리잡은 이탈리아의 도시형 캐주얼 브랜드 ‘씨피컴퍼니(CP Company)’다. 국내에 소개된 것은 8년 전. 이젠 씨피 마니아들이 생겨날 정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장인정신, 가치, 열정으로 대표되는 씨피 스타일의 전형은 이탈리아 군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고글이 달린 후드 점퍼다. 아주 제한적 수량만 공급하는 이 스타일은 다른 대부분의 씨피컴퍼니 옷들과 마찬가지로 천연고무로 코팅하고 가먼트 다잉이라는 하이 테크닉까지 가미해 모방 상품이 도저히 만들어 질 수 없는 옷이다. 그만큼 씨피컴퍼니의 옷을 입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분명히 구분되며, 게다가 고가인 까닭에 보보스가 아니면 접근이 쉽지 않은 명품으로서의 ‘장점’을 갖고 있다.

    또 하나의 대표적 보보스 스타일은 미국 브랜드 ‘케네스콜(Kenneth Cole)’이다. 어번 캐주얼 라이프 스타일이 컨셉트인 케네스콜은 불과 20년밖에 안된 브랜드임에도 뉴욕을 대표하는 패션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발 판매로 시작해 토털패션업체로 성공하기까지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맹렬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 케네스콜은 미국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랄프로렌’, ‘캘빈클라인’ 이후의 미국을 대표하는 브리지 라인으로 자리 잡았다.

    케네스콜은 도시의 오피니언 리더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라인을 선보인다.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도 최대한의 여유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보보스들의 열광적인 성원을 받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디지털 세대가 추구하는 슈퍼 밸류, 즉 최고의 품질에 최적의 합리적 가격을 유지하는 마케팅 능력이다. 한편으로는 품목별 한정 생산으로 명품족의 차별화 욕구를 훌륭히 만족시킨다.

    ‘몽블랑(Mont Blanc)’은 프랑스가 아닌 독일의 대표적 만년필 업체다. 1906년 독일 함부르크의 문구상 클라우스 요하네스 포스와 은행가인 크리스티안 라우센, 베를린의 엔지니어 빌헬름 잠보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작은 만년필 회사를 세운 것이 몽블랑의 출발이었다.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알프스 몽블랑 정상의 만년설을 상징하는, 뚜껑의 하얀 별은 전세계 리더들에게 고급 필기구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몽블랑은 ‘섹시’한 액세서리다. 남성정장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액세서리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특히 상의에 몽블랑을 꽂은 남성은 조직의 리더로 인식될 만큼 대단한 명품의 위력을 발휘한다. 단순히 필기구라기보다는 중대 결정에 최종적으로 서명하는 도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패션은 구두에서 끝난다’는 말이 있다. 기능성은 물론 몸치장의 전체 톤을 완성하는 데 그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아 테스토니(a. testo ni)’는 1929년 구두 기능공 집안 출신인 아메데오 테스토니가 피혁가공으로 유명한 볼로냐에서 작은 구두방을 열면서 시작됐다. 구두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2차 세계대전 당시 군화를 만들며 성장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핸드백·벨트·지갑 등 다양한 가죽제품을 내놓으면서 토털 브랜드로 성장했다.

    테스토니는 인지도는 높지만 광고에 매우 인색하다. ‘좋은 제품은 그 자체가 광고’라는 기업정신에서 비롯한 나름의 마케팅 방식이다. 오래 신어도 싫증 나지 않는 편안함과 단순하며 간결한 디자인이 테스토니의 전통. 그런 이유로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세계적 명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히딩크도 차는 시계 ‘태그 호이어(Tag Heuer)’. 이미 액티브한 삶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충분히 알려져 있는 명품이다.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이 차고 다녀 유명세를 탄데다, 특유의 견고함과 뛰어난 기능으로 인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상대적으로 적절한 가격대도 매력을 더한다.

    명품 패션감각이란 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름의 안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처럼 어려서는 어머니가, 결혼 뒤엔 아내가 골라주는 옷만 입어온 이들에겐 더욱 그렇다.

    명품 소비의 ‘正道’

    명품을 제대로 소비하는 건 경제력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다. 평소 안목을 키운 상태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컨셉트를 찾는 것이 명품 소비의 올바른 길일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제품을 단지 명품이라는 이유로 몸에 걸친다면 그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두른 격이 된다. 중요한 것은 명품이냐 아니냐보다 내게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다.

    패션 경향에도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유행 따르기에 급급하란 뜻이 아니라, 감각을 유지하고 시대 분위기에 잘 맞는 제품을 고를 수 있는 정도의 상식은 갖추고 있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대다수 한국 남성의 공통된 특징은 의욕은 앞서는데 감각이 따라가질 못한다는 것이다. 구매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명품족들의 소비는 웬만한 사이즈의 옷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폭발적이 된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훌륭한 스타일의 소유자란 항상 다른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옷도 다른 느낌이 나게 입을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는 점이다. 명품이라도 이것저것 마구 사들이기만 한다면 시장 패션과 다를 바 없다. 명품 소비는 단연 양보다 질이 우선이다.

    명품의 상대적 가치 평가는 어떻게 가능할까? 에르메냐질도 제냐의 160수 슈퍼 파인 타스마니안 울 슈트를 구입했다 치자. 일반적으로 국내 브랜드 신사복의 4~5배 정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두고 무조건 과소비 했다, 너무 비싼 물건을 샀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우선 세번수(細番手) 모직물은 특성상 구김이 덜 간다. 표면 조직이 조밀해 오염도 상대적으로 덜 하다. 자연 일반 옷에 비해 손질을 적게 해도 된다. 세탁이나 다림질 등의 후처리 횟수가 적어진다는 사실은 옷의 수명이 늘어남을 뜻한다. 디자인이 뛰어남은 말할 것도 없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도 혼수품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들은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물려준 루이뷔통의 여행 가방을 물려받고, 또 ‘샤넬’이나 ‘마담 그레’의 옷을 대물려 입는 것을 당연시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명품 브랜드들은 모두 이렇게 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는 가치를 목표로 한다.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고가 제품을 마구 사재기하는 행동은 사치이고 낭비일 뿐인 것이다.

    소비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있다. 일반인에게는 과소비로 비칠지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가진 이들은 적절한 소비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돈이 돌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고용이 창출되고 투자도 이뤄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미덕이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중적 잣대가 적용되는 대표적 분야가 패션 소비다. 경제가 어려울 때 고급 패션물은 그야말로 경제난의 원흉으로 지목돼 곤욕을 치른다. 반대로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가장 쉽게 부추겨지는 소비가 또 패션이다. 패션이 이렇듯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것은 일부 졸부들의 잘못된 소비 행태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명품이 탄생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명품을 만들어내고 그 생산을 장려하는 국가들을 보자. 모두 선진국이다. 명품을 무조건 사치품으로 몰아붙이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진정한 세계적 패션상품이 탄생할 수 없다.

    언론은 히딩크가 조지오 아르마니 마니아이며 명품족이라고 떠들어댔지만, 정작 필자가 히딩크의 셔츠 주머니에서 발견한 건 우리 브랜드인 제일모직 빈폴의 모노그램이다. 남들은 평생 한번만 우승해도 영광이라는 세계 여자 프로 골프 무대에서 1년에 4차례나 우승한 박세리의 가슴에도 얼마 전까지 우리 브랜드 아스트라의 로고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스타들이 우리 브랜드를 프로모션하고 있으며 만만치 않은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왜 우리 패션업계에선 세계적 명품이 등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한번쯤 고민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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