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호라 월정사라! 달(月)의 정(精). 기묘하고 에로틱한 이름이다.
- 산이 처녀 젖가슴처럼 풍만하게 솟아오른 겨울날 그곳에 가봤는가.
- 고즈넉하면서도 그윽한, 그야말로 달의 정기가 서린 그곳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아보라.
물론 눈 덮인 겨울 산사의 풍경이란 어쩌면 가보지 않고도 수십 번이나 가본 듯한 ‘진부한 이미지’일 수도 있다. 마치 파도가 철썩이는 동해를 보고 싶다든지, 해지는 서녘의 붉은 놀을 보고 싶다든지 하는 낭만적 수사란 1970~80년대 대중소설이나 영화에서 늘 반복되던 그야말로 진부한 형식, 진부한 틀, 진부한 언어, 그리하여 언뜻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내용은 텅 비어 있는 공허함과 다를 바 없으나, 누구라도 실제로 그러한 풍경 앞에 서면 한없이 충일해지는 것은 거역하기 어렵다.
웃자란 젖가슴 닮은 겨울山
겨울, 눈 쌓인 월정사에서의 하룻밤!
이 또한 마찬가지다. 언뜻 진부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체험을 하기가 쉽지 않으며 어쩌다 그런 체험을 하게 되면 아마도 평생 동안 누군가에게 자랑 삼아 얘기할 만한 그런 광경이다.
“월정사 가봤어?”
“어디, 저 강원도. 거기 뭐라던가, 설악…산? 아니 오대산?”
“그렇지. 오대산 월정사!”
“삼층인가 십층인가 석탑 있는 곳?”
“8각이요 9층이지.”
“검색해볼까?”
“아냐, 됐어. 요지는 뭐냐, 월정사에 가봤냐는 거지, 월정사!”
“…?”
“눈 펑펑 내리는 날, 폭설 탓에 안전장치 없는 승용차가 도로 구석에 이마 처박던 날, 야트막한 구릉이겠거니 생각하며 상원사까지 용기백배해 올라가던 차들이 바퀴 헛돌아 맥을 못 추고 황급히 견인차 부르던 날, 인도를 벗어나면 무릎까지 눈에 파묻히던 날, 그렇게 무릎까지 파묻히는 바람에 멀리서 누가 보면 흡사 천지 간의 설경에 혼을 빼앗겨 월정사, 상원사에 이르기도 전에 벌써 삼라만상에 고개 숙여 속죄하며 흐느끼듯 보이는, 미리 다녀간 객들 때문에 전나무숲길에 발자국 요란하기는 해도 눈 돌려 숲을 보면 온갖 설화가 다투어 피던 날, 게다가 보름달이라, 아, 월정사 연푸른 밤하늘 위로 허연 달이 떠오르누나. 스무 살 여자애들 웃자란 가슴처럼 산이 풍만하게 솟아오르던 날, 달빛을 받아 오히려 적막한 산야가 더욱 그윽하고 전나무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치성을 드리는 듯한 그런 날, 꼭 그런 날에 월정사 가봤어?”
“…아니.”
“난…가봤어. 하룻저녁을 거기서 묵었지.”
“…한 잔도?”
“허어, 안 할 수야 없지.”
갈지자로 펼쳐진 ‘지혜의 길’
이 산하에 강원도가 있고 또 그곳에 오대산이 있어 월정사 같은 대찰이 서 있으며, 또한 그 위로 터 잡은 웅혼한 상원사가 존재한다. 힐링이라고 했던가. 바로 이 두 사찰은 따로 어디 ‘힐링캠프’ 같은 곳을 찾아가 돈 내고 프로그램 따라 하고 선물도 받고 하는 그런 일을 치르는 것보다 훨씬 더 즉각적으로 이를테면 감동이라든지 충일감이라든지 마음 깊숙이 저미는 미묘하고도 숭고하기까지 한 감정을 선물한다. 자연! 그리고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유한한 존재가 빚어낸 초월을 향한 진지한 공부와 숭고한 기도의 터가 있어 보는 순간 마음이 정돈되는 곳이다.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길은, 평소 같으면 자동차로 5분 정도 봄의 햇살이며 가을의 바람을 음미하며 한가로이 도달할 거리지만 폭설 이후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길은, 임의로 그어진 선들에 불과했다. 앞서 달려간 차의 흔적이 차선이 되고 그 뒤를 조심스레 밟아가며 야트막한 경사로를 따라 상원사를 지향해 올라간다.
차륜은 자꾸 정해진 길 밖으로 벗어나려 했다. 그것을 제어하기 위해 조향장치를 꽉 잡고 더러 브레이크를 살며시 밟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차륜은 정직하게 멈춰서기보다는 앞선 차들의 흔적을 벗어나 옆으로 미끄러지려고 했다. 물론 속도는 시속 20㎞도 되지 않을 만큼 느렸고 길가에는 폭설이 잔뜩 쌓여 바퀴 어느 한 쪽이 미끄러지더라도 당장 큰 사고는 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만일 그렇게 바퀴 하나가 중심에서 이탈해버리면 그것을 되돌릴 방도가 마땅치 않은 길이었다.
사행의 길에는 불행하게도 그런 차가 적지 않았다. 어떤 차는 악착같이 가속페달을 밟아 눈밭을 벗어났고 어떤 차는 운전자가 눈에 파묻혀 있던 돌멩이를 잔뜩 구해와 뒷바퀴 양쪽을 지지한 다음에야 곤란한 지경에서 벗어났다.
평소 같으면 육중한 몸을 부드럽게 꺾으면서 지나갔을 코너에는 버스 한 대가 그냥 서 있었다. 상원사로 오르던 그 버스는 다행히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위에서 내려오는 승용차가 문제였다. 폭설로 인해 잔뜩 좁아진 길이었기 때문에 큰 버스나 트럭이라도 만나면 요령껏 교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전방의 상황을 지켜보니, 버스는 승용차가 스쳐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두 차가 마찰 없이 비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코너였다. 그러나 상원사에서 내려오던 승용차는 불안해 보였다. 풋 브레이크와 핸드 브레이크, 게다가 엔진 브레이크 같은 개념에 익숙지 않아 보였다. 필시 발로 연신 브레이크를 밟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게 내려오면서 그 차는 갈지자(之) 행보를 거듭했다. 그러다가는 길가에 처박히거나 아니면 대기 중인 버스의 이마를 들이받기 십상이었다.
승용차는 간신히 멈춰 섰다. 중년 부부가 보였다. 버스에서 남자들이 내렸다. 예닐곱 명이 승용차의 좌우로 가서 유리창을 내리라 말하고는 차창 틀을 힘주어 잡았다. 그 상태로 승용차는 천, 천, 히 내려와 관광버스의 옆구리를 간신히 비껴갔다. 그리고 어찌되었던가. 모를 일이다. 남자들은 버스에 올랐고 버스는 상원사로 올라갔으며 나 또한 그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승용차 운전자가, 버스 기사가 현장에서 강의한 브레이크 사용법을 충분히 숙지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삼라만상이 관계 맺는 원융의 공간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쓴 표석.
주차장에서 상원사로 향하는 입구에 높이 3m도 더 되는 큰 바위에 기품 있게 들어앉은 익숙한 글씨체가 보인다. ‘신영복체’의 바로 그 글씨다.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쓴 글씨(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문수성지)가 널따란 돌 위에 가지런하면서도 장중하게 들어앉아 있다. 표석의 쓰임새대로 ‘오대산 상원사’가 세로로 장중하게 쓰여 있고 그 옆에 ‘적멸보궁’과 ‘문수성지’가 적당한 자리에 위치했는데, 낙관(落款)처럼 보였다.
산도 명산이요 절도 대찰이요 세워놓은 바위도 늠름하거늘, 이런 풍경에 덧붙여 쓰는 글씨 역시 조잡해서도 안 되고 주위 기운에 눌려도 안 되고 그렇다고 용렬한 필세로 힘자랑을 하는 것도 가당찮거늘, 신영복체는 크고 작은 것들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서로 손을 뻗어 보태고 나누면서 사위의 기운을 담아내고 있다.
그곳으로부터 10분 남짓이면 상원사 문수전 앞마당에 이른다. 오대산 월정사 하면 전나무숲길로 유명하지만 상원사에 오르는 오솔길 옆의 나무들도 ‘원래 태곳적부터 그 모습 그대로인 듯’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웅자(雄姿)다. 계절마다 오가는 관광객으로 인해 번잡할 것도 같은 상원사요 월정사이건만 화두를 잡아 든 선승이 최고의 안거처로 오대산 이 깊은 골짜기를 우선 꼽는 까닭을, 눈보라 치는 상원사 문수전이 웅변하면서 서 있다.
문수전에는 부처님 대신 문수동자와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다. 그런 까닭인지, 신 교수가 쓴 현판 글씨 ‘문수전(文殊殿)’ 세 글자는 나뉘어 있지 않고 서로 몸을 잇대어 있다. 세상은 나뉘어 있지 않음을, 삼라의 만상이 관계 맺어져 있음을 글씨는 말하고 있다. 10여 년 전, 지금은 월정사 주지로 있는, 당시 상원사 주지 정념 스님의 부탁으로 현판 글씨를 쓴 신 교수는 그때의 남다른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보살이다. 불자가 아닌 나로서는 ‘지혜’의 의미를 현판에 어떻게 담아야 할지 난감하였다. 달포 이상 장고했다고 기억된다. 생각 끝에 결국 세 글자를 이어서 쓰기로 했다. 분(分)과 석(析)이 아닌 원융(圓融)이 세계의 본 모습이며 이를 깨닫는 것이 지혜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짧은 찰나라 하더라도 그것이 맺고 있는 중중(重重)의 인연을 깨닫게 되면 저마다 시공을 초월하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다. 꽃으로 가득 찬 세상은 얼마나 엄숙한 화엄(華嚴)의 세계인가. 지혜란 바로 그런 깨달음일 터이다. 불가의 연기론(緣起論)이며 나로서는 ‘관계론’의 뜻을 담는 것이기도 했었다. (신영복, ‘변방을 찾아서’ 중 ‘지혜, 시대와의 불화’에서 인용)
눈이 밝지 아니하여 명당을 셈하여 짚어볼 줄 모르고 산세의 높고 낮음에 대해 운운할 문장도 없거니와, 그럼에도 이만한 풍경에 올라서고 보면 ‘참으로 좋구나!’ 하며 숨 한 번 들이쉬게 된다.
그 자체로 그런 풍모인 덕분에 상원사 오르는 길이나 경내에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라든지 ‘느림’이라든지 하는 안내 문구는 차라리 군더더기에 가까웠다. 힐링이라는 낱말조차 남루하게 만드는 폭설 속 ‘힐링’의 골짜기다.
기묘하고 에로틱한 달(月)의 정(精)
월정사 템플스테이는 내용이 알찬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에 힐링과 멘토가 크게 유행하고 그 바람에 산야 도처에 힐링캠프니 치유센터니 명상의 집 같은 곳이 웃자라는 세태지만, 월정사의 템플스테이는 이러한 트렌드 상품보다 역사가 더 깊고, 그 내용이 알찬 것으로 유명하다. 프로그램이 여느 사찰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발우공양에 스님과 차 마시며 대화하고 참선과 예불을 드리며 일기가 좋을 때는 암자를 순례하고 산사 아래의 전나무 숲길을 걷고 명상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는 대체로 1박2일이나 2박3일의 짤막한 ‘체험형 프로그램’이다. 이보다 더 진지한 것으로 아예 한 달가량 세속과 절연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스님처럼 머리를 깎고 30일 동안 수행하는 단기 출가학교도 있다.
최근에 절집을 찾아 하룻저녁이라도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고자 하는 세속의 사람들을 위해 템플스테이의 시설을 개선해 이전보다 찾는 이가 더 많아졌다. 때마침 평창스페셜올림픽이 열려 군내의 가장 큰 사찰인 월정사의 템플스테이도 이 기간에는 헝가리에서 찾아온 스페셜올림픽 참가자와 그들을 돕기 위한 국내의 자원봉사자를 위한 숙소로 제공됐으니 이곳의 시설이 규모에서나 내실에서나 상당히 알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월정사와 더불어 마곡사, 범어사, 용문사, 금산사 등의 템플스테이가 겉모습만이 아닌 그 내실 덕분에 찾는 이가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월정사는 템플스테이뿐만 아니라 천년의 숲길 걷기, 한암대종사 수행학림, 종교화합 축구 대회, 산사 음악제, 청소년 비보이 배틀, 조선왕조실록 반환운동 같은 다양한 종교 문화 활동을 벌여왔다. 상원사 청량선원 생활 10년 등 선사로 소문난 정념 스님이 월정사의 주지를 맡은 이후로 생긴 풍경이다. 정념 스님과 더불어 월정사의 한주(閒主·결재 대중의 모범이 되는 스님) 스님으로 있는 현기 스님 또한 월정사의 기풍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49재를 치른다든지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종교활동에 참여한다든지 사찰 밖의 고명한 학자 지식인 언론인 등과 ‘관계맺음의 사회’를 도모한다든지 하는 일이 두 스님에 의해 아름답게 펼쳐져왔다.
월정사의 템플스테이는, 우선 수련복으로 갈아입고 사찰 내의 몸가짐이며 마음가짐을 스님들로부터 배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경내에서 주의해야 할 행동이나 언행, 사찰 내 각 전이며 실의 의미와 쓰임새, 산중의 새벽에서 저녁에 이르는 일, 월정사의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해 먼저 배운다.
익히 듣던 바대로, 템플스테이의 취침 시간은 저녁 9시이고, 새벽 3시30분이면 일어나야 한다. 평소 도심지에서 번잡한 약속을 처리하고 밀린 일을 마무리한 후 새벽까지 리모컨을 놓지 않고 영화와 잉글랜드 축구 등을 지칠 때까지 보다가 곧장 쓰러져 잠에 들었던 나로서는 9시 취침 새벽 3시 30분 기상은 지레 겁나는 일이었다.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며 몰래 이불 뒤집어쓰고 스마트폰을 눌러대다가 차라리 밤을 하얗게 지새버릴까 싶었으나 차라리 그 전날에 아예 잠을 줄이고 가급적 피로에 피곤을 누적해 저녁 9시를 맞이하면 그나마 잠에 들겠지 하는 새로운 ‘시차 적응 전략’을 세웠는데, 놀랍게도 그 작전이 맞아떨어졌다.
월정사 현기 스님의 깊은 말씀이 있으신, 저녁 공양 이후의 ‘현기 스님과의 차담’ 시간에 잠시 꾸벅 졸기는 했으나 어렵사리 9시까지 버텼고, 이후 잠에 골아떨어졌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의 월정사를, 그 기막힌 눈이 거룩한 위로처럼 드리워진 사찰이며 산책로며 오가는 차량 한 대 없는 도로 위를 걸어볼 수 있었다. ‘달’의 ‘정기’ 아니런가. 보름달이 높이 떠 하얗게 세속을 비추고 있어서 특별한 가로 조명이 없어도 능히 사찰 안팎을 걸으며 체감온도 영하 17도의 오대산 골짜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 있었다.
강퍅한 사람도 詩人 되는 곳
이런 곳에서라면 아무리 마음이 강퍅한 사람도 한순간에 시인이 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시인이라면 오죽하겠는가. 한국 서정시의 드높은 경지를 일구고 있는 시인 고형렬의 시 ‘지금 월정사’가 생각나는, 그런 고즈넉하면서도 그윽한, 그야말로 달의 정기가 서려 있는 월정사의 새벽이었다.
오늘 오대산 하늘을 찾아와서
달은 월정사 마당을 비춘다
마음의 그림자는 적광전 벽에 붙어 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탑은 똑바로 하늘로 솟아 있다
앉아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예언을 하신
아버지가 계시는
저쪽 진영당은 문이 닫혀 있다
처마와 마당에 달빛이 지나간다
아아 무섭고 슬프다 너흰 공부를 똑바로 해라
적광전에 부처님만 혼자 계신다
달은 월정사 마당을 지나간다.
달빛의 도움을 받으며 눈발 흩날리는 오대산 골짜기를 올려다본다. 나무를 따라 눈을 들고 능선을 따라 목까지 들어 저 먼 데를 올려다본다. 어릴 적, 눈물 훔치며 읽었던 소설 ‘만다라’의 대미는 저 오대산 골짜기에서 끝이 났다. 소설 속 법운 스님은 고뇌 속의 파계와 파계 속의 구도를 거듭하던 지산 스님이 암자 앞에서 얼어 죽은 것을 발견해 폭설 속에서 홀로 다비식을 치른다. 다비를 하는 도중 법운 스님이 소설 속에서 내내 앓고 앓던 ‘병 속의 새’라는 화두가 풀린다. 비좁은 암자 안에 싸늘하게 얼어버린 지산 스님을 누이고, 불길을 만들어 그 암자를 태워 다비식을 치르는 그 순간, 불길 속에서 새 한 마리가 뛰쳐나와 날아가는 것을 법운 스님은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지산의 시체를 등에 업었다. 뜻밖에도 시체는 가벼웠다. 영혼으로만 살다 죽은 사람의 육체는 무게가 없다던 말이 생각났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산은 영혼보다는 육체의 욕망에 멱살을 잡혀 몸부림치던 파계승이 아니었던가.(…)
희끗희끗 눈발이 흩날렸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나는 서둘러 장작을 날라 방에 쌓았다. 공양간을 뒤져보니 장명등에 넣으려고 준비해둔 석유가 반 초롱쯤 남아 있었다. 장작더미에 골고루 석유를 뿌렸다. 그리고 그 위에 지산을 눕혔다.(중략)
나는 성냥불을 던졌다. 확 불길이 솟았다. 석유 먹은 마른 장작더미는 배암의 혀처럼 불꽃을 떨며 황홀하게 타올랐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만다라’를 살펴보니, 소설 앞 대목에서 큰스님 아래 여러 스님과 대중이 모여 앉아 설법을 듣고 또 저마다의 화두를 붙잡고 논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 깊다. 소설이 묘사한 화두와 설법 장면은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가히 영혼의 모든 무게를 내던지는 것이었으되, 1박 2일의 템플스테이가 그러한 것을 터럭만큼이라도 닮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아무튼 다시 날은 밝았고, 아침 공양 후 전나무숲길을 걷는 것으로 월정사 템플스테이는 끝이 났다. 흡사 탈속한 듯이 1박2일의 그럴 법한 흉내는 내었으되, 곧 산을 떠나 고속도로에 오르면 맹속의 질주에 몸을 떨 것이며 서울에 이르러 꽉 막히게 될 올림픽대로며 온갖 신호등 따위에 신경이 곤두설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1박2일은 그저 무위로 그칠 일이 되는가. 어쩌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는 것은 세속도시의 번잡함이 오히려 편해지는, 그런 상태로 돌아가 또 얼마쯤을 지내다보면 ‘아! 월정사’ 하고 마음이 일렁거리리라는 점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월정사가 있고 보름달이 있고 눈 내린 새벽이 있고 신성하기까지 한 전나무숲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다.
월정사에서 우리는 세속도시의 번잡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