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튼 사이먼 미술관은 로스엔젤레스 북동쪽의 파사데나 시(市)에 있다.
파사데나 한복판에 보물섬처럼 아름다운 노튼 사이먼 미술관(Norton Simon Museum)이 있다. 노튼 사이먼(1907~1993)의 개인 미술관인데, 본래 이름은 파사데나 미술관(Pasadena Art Museum)이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야심 찬 확장사업을 추진하다가 빚더미에 올라앉는 바람에 운명이 바뀌었다.
노튼 사이먼은 캘리포니아에서 식료품 사업으로 재벌이 된 인물로, 1960년대 미국 최고의 미술품 수집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는 4000점이 넘는 유럽 명작을 수집했는데, 이들 소장품을 전시하고 보관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고민이었다. 그래서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에 기증할 생각도 했다. 이때 아이디어 하나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형편이 어려워진 파사데나 미술관을 인수하는 것이었다.
1974년 사이먼은 부채뿐만 아니라 소장품까지 모두 책임지는 조건으로 미술관을 인수하고, 이름을 지금과 같이 바꿔달았다. 그리고 300만 달러 이상을 투입해 미술관을 보수하고 확장했다.
소장품 가치 10억 달러 이상
이 미술관에는 1만1000여 점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세계적인 명품도 많다. 대부분 노튼 사이먼 재단(Norton Simon Foundation)과 노튼 사이먼 예술재단(Norton Simon Art Foundation)으로부터 장기 임차하는 형식으로 소장하고 있다. 소장품 중 전시된 작품은 900여 점. 사이먼이 미술관을 인수한 이후로는 소장품을 외부에 임대하지 않았는데, 2007년부터는 미술관을 널리 알리려는 차원에서 선별적으로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of Art in Washington) 등에서 순회 전시한다. 2009년에는 뉴욕의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과도 상호교류 협정을 맺었다.이 미술관의 소장품을 시가로 환산하면 1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조16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재벌이 아니고서야 언감생심 이런 미술관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미술관은 더 이상 사이먼 개인의 미술관이 아니라 공익재단이 운영하는 공익재산이다. 미술관의 연간 운영예산은 약 200만 달러로 관람료, 수익재산, 기부금, 정부 보조금, 회원의 회비 등으로 충당된다. 미술관 건물은 파사데나 시로부터 1년에 1달러를 내고 빌린 땅에 세워졌다(임대기한은 2050년까지). 미국에서 개인이 세운 공익 미술관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사이먼이 인수하기 전, 파사데나 미술관 시절에는 샌프란시스코는 물론 인근 샌디에이고를 포함해서도 유일한 현대미술관(contemporary art museum)이었다. 1962년에는 미국 팝아트(Pop Art)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 사이먼이 이 미술관을 인수한다는 것은 현대미술관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그는 지역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사이먼의 주도로 1979년 LA에 새로운 현대미술관인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LA)이 만들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사데나 미술관도 유지되고 새로운 현대미술관도 세워진 셈이다.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은 1940년 이후 동시대 작품을 기획 전시하며 젊은 작가를 발굴,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벽 없는 미술관’ 도입
노튼 사이먼은 오리건 주 출신으로 버클리 대를 다닌 인텔리 사업가다. 대학을 중퇴하고 일찍부터 사업에 뛰어들어 식료품 사업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미국 서부에서 가장 큰 식료품 회사인 헌트 푸드(Hunt Foods)를 일궜다. 이후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주로 유럽 명품을 사들인 사이먼은 자신의 뛰어난 사업 수완을 미술품 수집에도 활용했다. 미술관을 세우기 전까지 ‘벽 없는 미술관(Museum without Walls)’ 개념을 도입해 자신의 소장품을 전 세계 미술관에 대여해 수익을 올리는 동시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명작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미술관을 만든 이후부터는 대여 정책을 중단하고 자체 전시에 집중했다.
사이먼의 미술품 수집과 관련해서는 에피소드가 많다. 그는 1972년 뉴욕의 한 딜러로부터 10세기에 제작된 남인도의 동조각상을 90만 달러에 구입했다. 그런데 인도 정부가 이 작품이 도난당해 해외로 밀반출된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자 사이먼은 “지난 2년간 아시아 예술품 구입에 1600만 달러를 썼는데 대부분 밀반출된 것이었고, 동조각상 역시 불법 반출물이라는 것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뉴욕타임스 1973년 5월 12일자). 하지만 다음 날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엔 정반대 내용의 기사가 났다. 사이먼이 문제가 된 작품이 합법적으로 미국에 수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76년 사이먼은 해당 작품을 인도에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인도 정부는 반환받기 전 9년 동안 이 작품을 노튼 사이먼 미술관에 전시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는 직접 정치에 나서진 않았지만, 정계에서도 큰 힘을 발휘했다. 그의 반대와 방해로 재선에서 탈락한 공화당 상원의원이 있을 정도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이던 로널드 레이건은 훗날 사이먼을 비롯한 캘리포니아 재벌들의 후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미국에서도 재벌의 힘은 막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이먼은 아내와 이혼 후 1971년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 제니퍼 존스(1919~2009)와 재혼한다. 존스에겐 세 번째 결혼이었다. 존스는 1940, 50년대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활약했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도 받은 바 있다.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모정’과 ‘무기여 잘 있거라’는 한국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사이먼은 재혼 후 사업보다는 미술관 운영에 전념했고,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여러 교육기관에 임원으로 참여하며 사회봉사 활동을 많이 했다. 그의 사후에는 제니퍼 존스가 미술관 운영을 전담했다. 그는 미술관을 증·개축하며 미술관 전체를 새롭게 단장했다. 존스는 영화 ‘로마의 휴일’ 주인공인 그레고리 펙, NBC TV 유명 뉴스앵커 톰 브로코 등 유명인사들을 미술관 이사로 참여시켜 이들을 미술관 발전에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드가 작품 100점 넘게 소장
에드가르 드가의 ‘Little Dancer of Fourteen Years’(1878~1881).
그는 인상파 화가 드가(Edgar De Gas·1834~1917)를 유달리 좋아했다. 미술관에는 드가의 작품이 아주 많고, 걸작도 여러 점 눈에 띈다. 사이먼은 1955년부터 1983년까지 30년 가까이 드가 작품을 꾸준하게 구입했는데, 조각품이 87점이고 그림 등이 40여 점이다.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을 텐데도 이렇게 많이 구입한 것을 보면, 드가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듯하다.
드가는 무희들을 즐겨 그렸다. 여인의 누드도 많이 그렸다. 특히 목욕하는 여인이나 목욕을 갓 마친 여인을 화폭에 담았다. 방금 목욕을 끝낸 여인만큼 풋풋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어디 있을까. 여인의 살 냄새와 비누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순간이다. 옛 대중목욕탕 시절, 막 목욕을 마치고 발그스레한 얼굴로 목욕탕 문을 나서는 젊은 여인의 모습은 아직도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목욕 후 몸을 말리는 여인(Woman Drying Herself After the Bath)’은 나의 상상을 그대로 묘사해준 고마운(?) 그림이다. 그런데 당시 유럽에서는 집에 욕실이 따로 없었던 모양이다. 목욕하는 곳에 침대가 있다. 침실에 물을 떠다놓고 대야에 물을 부어 목욕을 한 것 같다. 오른쪽에는 벗은 옷들이 걸려 있다. 목욕을 하면서 문을 열어둔 것도 특이하다. 개방적인 시절이었거나, 집에 혼자만 있었던 모양이다.
드가는 무희가 춤추는 모습에 집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체의 움직임에 관심이 생겼고, 그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래서인지 인체의 근육과 움직임을 매우 역동적으로 표출한 조각 작품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직접 발표한 조각 작품은 오직 한 점뿐으로 ‘14세의 무희 소녀(Little Dancer of Fourteen Years)’다(나머지 작품은 그의 사후 공개됐다). 이 작품은 미국 주요 미술관이 거의 다 소장하고 있는데, 노튼 사이먼도 놓칠 리 없다.
이 작품의 모델은 마리(Marie van Goethem). 1881년 6회 인상파전(展)에 처음 선보였는데, 매우 복잡한 평가를 받았다. 유리통 속에 넣어 전시됐는데, 매우 추하고 의학용 복제품 같다는 혹평이 대부분이었다. 머리와 얼굴이 원시인 같다는 말도 나왔다. 드가와 마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억측과 논쟁이 난무했다. 이 작품은 본래 왁스로 만들어졌다. 드가가 사망한 후 부인과 딸이 이 조각을 동(銅)으로 주조하기로 하고, 1920년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개의 동 작품을 주조했다. 이렇게 해서 여러 미술관이 동일한 작품을 소장하게 됐다. 리본과 스커트는 별도로 만들어 붙였기 때문에 미술관에 따라 제각각이다.
드가의 ‘Woman Drying Herself After the Bath’(1876~1977).
‘인상파 리더’ 피사로
드가는 프랑스 파리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변호사가 되길 원했다. 그는 아버지 뜻대로 파리에서 법대에 진학했으나 열심히 공부하진 않았다. 21세 때 당시 최고의 고전주의 화가이던 앵그르를 만나고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1870년 보불전쟁이 터지자 30대 중반이던 드가는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눈을 다쳐 평생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 후 미국 뉴올리언스에 잠시 체류하다 1873년 파리로 돌아왔다. 이듬해 시작된 인상파전의 창립 멤버였지만, 그 자신은 인상파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주의자(realist)라고 불리길 원했다.
드가는 은둔의 삶을 살았다. 예술가는 혼자 지내야 하고, 사생활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외관상으로는 평온한 인생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홀아비 염세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보수적이고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노튼 사이먼 미술관의 정원과 연못.
피사로는 ‘인상파의 리더’다.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열린 8번의 인상파전에 모두 참가한 유일한 화가다. 그는 후기 인상파로 분류되는 쇠라, 세잔, 고흐, 고갱과도 친하게 어울렸다. 54세가 돼서도 쇠라와 시냐크로부터 새로운 회화기법인 점묘법을 배우며 함께 작업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는 인상파 화가 중 가장 연장자로서 멘토를 자처하며 많은 화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특히 세잔에게는 정신적으로 많은 힘이 돼줬다. 세잔은 불과 9세 위인 피사로를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일컬었다.
미술관에 나타난 나치 약탈품
피사로는 카리브 해의 버진아일랜드에서 나고 자랐다. 상인인 아버지는 프랑스 국적의 포르투갈계 유대인, 어머니는 서인도제도 원주민이었다. 피사로는 12세때 공부하러 프랑스에 왔고 이때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17세가 되자 아버지는 그를 버진아일랜드의 화물회사에 취직시켰다.피사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결국 21세 때 직장을 그만두고 베네수엘라에 가서 2년간 본격적으로 그림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25세가 되는 1855년 파리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마흔한 살 때는 어머니의 하인과 결혼했다. 포도밭 관리인의 딸이었다. 파리 근교에 살면서 7명의 아이를 낳았고,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나치가 집권하면서 독일이 반(反)유대인 정책을 펴자 유대인들은 갖고 있던 명품들을 값싸게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 일부는 나치 권력자에게 부당하게 뺏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대인들의 품을 떠난 명품들이 유럽과 미국의 여러 미술관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소송을 거쳐 원소유자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대부분은 미술관에 기증됐다. 이렇게 나치 시절에 사라진 작품은 65만 점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연이 깃든 그림 중에는 1897년 피사로가 그린 명작 ‘비내린 오후의 세인트 오노레 거리’(1897)도 있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은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국영 미술관에 걸렸다. 원소유주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고, 그는 그림을 나치에게 불법적으로 강탈당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그림을 반환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 사건은 LA에서 소송이 진행됐고, 최근 LA연방법원은 그림을 돌려달라는 원고 측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피사로는 생존 당시에는 작품을 그다지 팔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그의 작품은 100만 달러를 쉽게 넘어선다. 200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4점 묶음이 1500만 달러 가까이에 팔렸다. 단일 작품 중에서 2009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700만 달러를 상회하는 가격에 팔린 작품도 나왔다.
샤이어와 ‘푸른 4인방’
노튼 사이먼 미술관은 20세기 초 현대 작가들의 작품도 풍부하게 소장한다. 이는 갈카 샤이어(Galka Scheyer·1889~1945)라는, 독일 태생의 한 여인 덕분이다. 샤이어는 화가이면서 미술상이자 컬렉터였는데, ‘푸른 4인방(the Blue Four)’라는 화가 그룹을 적극 후원했다. 4인방은 당시 첨단의 아방가르드 작가 파이닝거, 칸딘스키, 클레, 졸렌스키인데, 훗날 모두 현대 미술사의 최고 거물이 된다. 샤이어는 1915년 졸렌스키를 만났고, 1921년 졸렌스키의 소개로 나머지 세 사람도 알게 됐다.샤이어는 1924년 푸른 4인방을 미국에 처음 소개했고, 1925년 뉴욕에서 이들의 전시회를 유치, 적극 홍보했다. 이후에도 샤이어가 푸른 4인방을 지속적으로 후원하자, 미국에서도 유럽의 모더니즘이 확장돼나갔다.
1930년 LA에 정착한 샤이어는 1945년 사망 후 소장품을 UCLA에 기증했는데, UCLA는 그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에 1953년 푸른 4인방과 다른 현대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된 450점의 샤이어 컬렉션이 일단 파사데나 미술관에 맡겨졌다. 파사데나 미술관이 노튼 사이먼 미술관으로 바뀌고 1976년 사이먼이 샤이어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자 샤이어 컬렉션은 공식적으로 노튼 사이먼 미술관의 소장품이 됐다. 이런 연고로 졸렌스키의 ‘Blonde’, 클레의 ‘The Tree of House’, 파이닝거의 ‘The Tug’, 칸딘스키의 ‘Open Green’ 등을 노튼 사이먼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미술관은 아름다운 정원에 둘러싸여 있다. 정원에는 유명 조각작품들이 전시돼 있고, 자그마한 연못도 만들어져 있다. 이왕 노튼 사이먼 미술관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시간을 넉넉하게 할애해 정원도 천천히 거닐어보기를 추천한다.
최 정 표
<br>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