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삶이다. 부모가 원하는 길을 좇지 않고 내 길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다. 다른 하나는 정말 ‘아무거나’다. 현실과 상황에 맞춰 살아가는 삶 말이다.
전자의 ‘아무거나’, 즉 원하는 삶을 살기에는 한국의 현실이 녹록지 않다. 각자도생해야 할 마당에 ‘나는 어떤 삶을 원하나’라는 근원적 물음을 던질 여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후자의 ‘아무거나’에 기울기 쉽다. 책에는 현실 순응적 삶, 즉 후자의 ‘아무거나’에 해당하는 삶을 영위하는 지방대생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적당히’ 살아간다. 차별에 대한 불만을 앞세우지 않는다.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 탓으로 돌린다. 부모들 역시 가족의 틀 안에서 ‘현실 가능한’ 해법을 찾는다.
저자는 이를 가족주의, 적당주의, 성찰적 겸연쩍음, 알지 않으려는 의지로 표현했다. 저자도 평탄치 않은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지방대 청년이 ‘내가 원하는 아무거나’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가 더욱 어렵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지방대생들을 은근히 꼬집는다. 순응하는 삶을 넘어 본인이 원하는 ‘아무거나’의 삶을 살아보라는 권유다. 이 책이 학벌주의의 폐해나 지역 간 차별을 위주로 서술된 그간의 지방대 관련 저작들과 차별화되는 대목이 여기에 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질문을 던지고 행동으로 옮긴이들, 즉 연민의 굴레를 벗고 보수주의적 가족주의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는가. 용기를 내서 습속을 탈피한 당사자에게 후회를 안겨주지 않을 나라인가.
청년들이 ‘아무거나’ 될 수 있으려면 사회가 우선 그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자기 주체성을 찾아 원하는 삶을 고민해볼 수 있는 환경 말이다. 먼저 학력이나 사회 및 문화자본에 따른 임금격차는 해소돼야 한다. 지역 균형 발전도 필요하다. 이와 같은 사회구조적 해법 말고도 청년 스스로가 질문을 통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원하는 삶’에 대한 질문이 넘쳐나는 한국 사회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