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호

[윤채근 SF] 차원 이동자(The Mover) 8-2

이탈자와 추격자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0-05-11 14: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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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낯선 파동이 접근해 으름스 곁에 이르렀을 때 밤의 행성은 두 태양 사이 나선 궤도 안으로 막 진입하고 있었다. 지옥이 시작되는 초입이었다. 파동은 무미건조하게 메시지를 낭독했다. 

    “이탈자에게 경고한다. 즉시 돌아가라. 이동은 금지됐다.” 

    으름스는 이를 경고가 아닌 권유로 해석했다. 무엇보다 상대가 강력한 공격성으로 무장한 새로운 신분, 이른바 추격자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으름스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나 으름스 르므 으함은 이탈자가 아니다. 이 행성을 보라. 난 이렇게 고요히 땅에 박혀 다섯 겹으로 지는 두 개의 아름다운 노을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별의 융단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이동하지 않은 채 머물다 때가 되면 돌아가겠다.” 

    파동은 즉시 가속하며 말했다. 



    “명령을 이해 못 한 것 같다. 난 너 같은 이탈자를 회수하는 추격자다. 거부한다면 소멸시키겠다. 예외는 없다.” 

    으름스는 상대가 한 말 뜻을 골똘히 생각해 봤다. 추격자라는 용어는 너무 생소했고 느닷없는 저돌성은 한참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방어 차원에서 자신도 가속하며 으름스가 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여기서 조금도 이동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돌아가야 하나?” 

    오래도록 침묵하던 파동은 조금씩 가속을 늦추더니 이윽고 으름스 정면에 조용히 정지했다. 비욱의 촉수를 움켜쥔 채 최악의 순간을 대비하고 있던 으름스는 때마침 시차를 두고 차례로 떠오르고 있던 두 개의 태양을 올려다봤다. 언젠간 이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에 슬픔이 밀려들었고 그 마음이 전달됐는지 비욱이 이전엔 맡아보지 못했던 서늘한 향기를 촉수를 통해 보내왔다. 

    행성 표면이 삽시간에 가열되자 원반형 눈 안쪽이 지표면 아래로부터 빨아들인 수액으로 채워졌다. 이렇게 촉수 뿌리로부터 흡입된 차가운 수액이 주기적으로 순환하며 행성 생명체의 체온을 낮춰줬다. 아쉽게도 냄새로나마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소통수단이었던 촉수들은 남김없이 땅 밑으로 회수돼야 했다. 향기가 사라지고 빛의 지옥이 지속되는 동안 밤의 행성 생명체는 감각 없는 비활성 상태로 삶을 정지시켰다.


    2

    원반형 유리질 각막 안에 고여 있던 수액이 차츰 빠져나가자 시각이 돌아왔다. 밤이었다. 촉수를 살며시 밖으로 뻗은 으름스가 냄새를 풍겨봤다. 잠시 후 희미한 비욱의 향기가 으름스의 촉수 관을 통해 스며들어왔다. 행성 표면 여기저기서 냄새의 기지개가 켜졌고 150년 만에 다시 삶이 시작됐다. 

    창공을 수놓은 별자리들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유성들을 바라보던 으름스는 자기 앞에 여전히 정지해 있던 파동을 발견하고 놀랐다. 파동이 속삭였다. 

    “널 관찰했다.” 

    뭐라 말하려던 으름스는 문득 비욱이 걱정됐고 급히 촉수를 뻗었다. 익숙한 비욱의 촉수가 살며시 감겨오자 안심한 으름스가 기쁨의 향기를 발산했다. 땅 밑의 실뿌리로 서로 얽혀 있던 으름스와 비욱의 자손들 역시 특유의 냄새를 뿜어 조상 짝의 안녕을 축하했다. 하지만 으름스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욱의 촉수엔 힘이 없었다. 파동이 말했다. 

    “150년 전 난 너의 짝 속으로 육화했다. 널 쉽게 소멸시키기 위해.” 

    으름스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파동은 냉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네 짝은 병들었다. 이번 공전주기를 넘기지 못한다.” 

    으름스가 물었다. 

    “그래서 기다려준 건가?” 

    “너의 행동 방식은 다른 이탈자와 달랐다. 기다려줄 가치가 있었다.” 

    “비욱에게 어떤 병이 생겼나?” 

    “그 생명체 이름이 비욱인가? 시들고 있다. 수명이 끝나가고 있어 살릴 방법이 없었다.” 

    불멸인 으름스는 짝의 죽음을 논리적으론 이해했지만 현실로 감당하긴 어려웠다. 파동이 물었다. 

    “죽음은 처음 체험하나?” 

    “처음이다. 밤의 행성은 나의 첫 방문지였다.” 

    “그렇다면 비욱과 인사하고 나와 함께 떠나자. 죽음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다.” 

    잠시 망설이던 으름스가 느리게 대답했다. 

    “이 행성엔 인사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 상대 마음을 촉수를 통해 느낄 뿐이다.” 

    은은히 웃음소리를 만든 파동이 속삭였다. 

    “나처럼 비욱 속으로 육화하면 되지 않나? 그보다 좋은 인사가 어디 있나?” 

    으름스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욱에게 그런 무례한 짓을 하고 싶지 않다. 난 반만 으름스였다. 나머진 이 행성의 생명체 자격으로 살아왔다고 믿는다.” 

    파동과 으름스는 오래 침묵했다. 진하고 음울한 냄새를 풍기던 으름스가 비욱의 촉수처럼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하나 부탁할 게 있다.”

    3

    비욱 안으로 육화한 파동은 숙주의 의식을 켜둔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비욱의 의식을 언어화해 달라는 으름스의 부탁 때문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으름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비욱. 말할 수 있는 의식이 있다는 걸 잘 알아. 난 으름스야.” 

    비욱은 대답이 없었다. 육화된 파동이 아무리 집중해도 언어로 변환시킬 만한 의식의 진동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절망한 으름스가 다시 속삭였다. 

    “난 으름스지만 너처럼 이 행성 생명체이기도 해. 난 이 육체를 빌리기만 한 게 아니야. 난…, 난…, 나이면서 내가 아니야.” 

    순간 언어로 해석 가능한 의식 흐름이 비욱 내부에서 생성됐고 파동은 이를 잽싸게 언어로 번역해 으름스에게 전달했다. 

    “처음엔 너무 놀랐어. 지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이 존재. 저번에 이 자가 침입했던 순간 다 알아버렸거든.” 

    “뭘?” 

    “너의 정체, 아니 너희들의 정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냐. 그럴 거 없어. 넌 이상한 친구였어. 냄새를 풍기는 방식도 특이했지만 하염없이 별을 바라보는 것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어.” 

    “아름다웠어?” 

    “그래. 우리 종족은 밤을 즐길 줄 몰라. 부단히 후손을 퍼뜨릴 궁리만 하거든. 두 개의 태양에 맞서려면 그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넌…, 하늘을 봤어.” 

    “난 별자리가 좋아.” 

    “그래. 그래서 힘들게 네 옆으로 이동했던 거야. 나도 별이 좋아. 언젠가 저 높은 곳으로 가보고 싶단 생각을 하고 또 했거든.” 

    우울해진 으름스가 문득 대화를 멈췄다. 잠시 기다리던 비욱이 물었다. 

    “내 이름이 비욱이야? 날 그렇게 부르고 있었어?” 

    “그래.” 

    “넌 호쿄묘사야. 난 널 그렇게 부르고 있었어. 네가 만드는 맑고 날카로운 냄새 이름이지.” 

    으름스이자 호쿄묘사가 촉수를 뻗어 비욱의 촉수를 만졌다. 둘은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눴다. 숙주 호쿄묘사보다 세 배 이상 오래 산 비욱은 최후의 씨앗을 잉태해 땅에 심고 탈진해 버렸다.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비욱이 가늘게 속삭였다. 

    “잘 가, 으름스. 그리고 안녕, 호쿄묘사.”


    윤채근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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