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호

뽀얀 국물에 우설과 볼살이 듬뿍, 강릉에서 만난 인생 소머리국밥

[김민경 ‘맛 이야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1-11-2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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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일기장엔 일기보다 ‘가보고 싶은 곳’ 목록이 더 많다. 본래는 업무 수첩이나 문서 파일에 맛집, 여행지, 전시회 같은 걸 정리해뒀다. 그런데 필요할 때 ‘찾기’가 통 안 돼 일기장에 쓰기 시작했다. 어느새 2021년이 꽁지에 다다르는 터라 한 번 훑어봤다. 그새 감쪽같이 사라진 식당이 있고, 끝나버린 전시가 숱하며, 더 이상 내 흥미를 돋우지 않는 관광지도 보인다. 낯선 목록을 읽어 가는데 왠지 모르게 지나간 것들이 떠오른다. ‘은하철도 999’ 같은 기차에 마음을 실어 그 시절,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다.

    가볍고 순해 먹을수록 더 당기는 국물

    뽀얀 국물에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소머리국밥. 맛이 무겁지 않고 순해 먹을수록 더 당긴다. [GettyImage]

    뽀얀 국물에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소머리국밥. 맛이 무겁지 않고 순해 먹을수록 더 당긴다. [GettyImage]

    어느 날 밤에 강원 강릉에서 일하는 친구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날 우리는 시장에서 소머리국밥을 먹었다. 설렁탕과 갈비탕 중간쯤에 놓으면 마침맞을 뽀얀 국물에 머릿고기가 듬뿍 들어있었다. 소머리국밥은 이름 그대로 소머리를 삶아 만든다. 뼈를 너무 오래 끓이거나 조미를 많이 하면 국물에서 잡다한 맛이 난다. 처음 한 술은 맛있을지 몰라도, 다 먹고 나면 입이 마르고 개운치 않은 냄새가 남는다. 친구가 데려간 곳 국물은 달랐다. 색은 뽀얀데 맛이 무겁지 않고 순해 먹을수록 더 당겼다.

    내가 좋아하는 우설과 볼살을 비롯해 꼬들꼬들한 것, 쫄깃한 것, 부드러운 것 등 온갖 살코기가 숟가락에 올라오는 것도 좋았다. 고기를 먼저 건져 먹고, 밥을 말아 반쯤 먹고, 깍두기를 국물에 넣고 흔들어가며 밥이랑 건져 마저 먹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나눈 이야기는 고작 “다음엔 소머리국밥 먹으러 영천에 한 번 가보자” “그보다 창녕 가서 수구레국밥부터 먹자”였던 것 같다.

    추운 날 전주가면 남부시장 콩나물국밥

    시원하게 끓인 콩나물국에 밥을 토렴하고 잘게 썬 삶은 오징어를 섞어 먹는 콩나물국밥. [GettyImage]

    시원하게 끓인 콩나물국에 밥을 토렴하고 잘게 썬 삶은 오징어를 섞어 먹는 콩나물국밥. [GettyImage]

    전북 전주에는 참 여러 번 갔는데 어쩌다 보니 매번 겨울이었다. 처음 전주에 간 날 혹독하게도 추웠다. 그때 막걸리 유통을 하는 친한 선배가 콩나물국밥에 모주를 먹여 얼어붙은 나를 되살려냈다. 그러니 ‘추운 날 전주’하면 내 다리는 절로 남부시장으로 향한다.

    시원하게 끓인 콩나물국에 밥을 토렴해 작은 뚝배기가 넘치도록 담고 송송 썬 매운 고추와 대파를 띄워주는 뜨끈한 국밥. 여기에 잘게 썬 삶은 오징어를 섞어 먹는다. 노른자가 여전히 말랑한 설익은 달걀찜에 오징어와 콩나물을 조금 덜어 뒤섞은 다음 김까지 올려 고소한 죽처럼 만들어 퍼먹는다. 꽝꽝 얼었던 얼굴이 좀 녹는가 싶으면 모주 한 잔! 그제야 앞에 앉은 사람이 보이고, 달아오른 내 얼굴 열기도 느껴진다.



    부산의 명물 돼지국밥에서는 푸근하고 둥근 맛이 난다. [GettyImage]

    부산의 명물 돼지국밥에서는 푸근하고 둥근 맛이 난다. [GettyImage]

    돼지국밥은 정말 다양한 사람과 같이 먹었다. 가족과 친구를 비롯해, 지금의 남편, 취재차 만난 우체부 아저씨, 홍보대행사 직원 등과 부산 곳곳 식당에 다녔다. 아직 맛없다고 할 만한 곳을 만난 적은 없다. 물론 돼지고기 냄새가 진한 곳, 국물 맛이 복잡한 곳, 고기 인심이 좀 아쉬운 곳이 있긴 했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한 그릇 뚝딱 비운 건 변함이 없다.

    서울에서 순대국밥을 먹다가 부산에 가면 고기만 들어간 보송보송한 요리가 그저 좋았다.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 부추 무침을 살짝 올리고 밥을 만다. 잘 섞어 한입 먹으면 푸근하고 둥근 맛이 따뜻하다. 부산은 ‘바다의 도시’지만 첫 끼니로는 바다 음식보다 돼지국밥을 먹고 싶은 이유다.

    고추가 내는 달고 매운 감칠맛과 향

    여러 내장과 선지를 듬뿍 넣고 고추로 맛을 낸 선지해장국. [GettyImage]

    여러 내장과 선지를 듬뿍 넣고 고추로 맛을 낸 선지해장국. [GettyImage]

    이번엔 대학 졸업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선지해장국을 먹던 때로 가본다. 의외로 선지를 못 먹는 친구가 꽤 많았다. 친절하게도 대부분의 해장국집은 이런 사람을 위해 선지를 뺀 해장국도 준비해준다. 먹기 좋게 썬 쫄깃한 양, 종이처럼 납작하게 저민 살코기, 큼직한 덩어리의 선지, 잘 익은 당면까지 푸짐하게 들어가는 선지해장국 혹은 양평해장국은 고추 맛이 중요하다. 고춧가루, 고추기름, 잘게 썬 고추, 다진 고추지 등이 연이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식당에 따라 고추기름이나 다진 고추지가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고추가 내는 달고 매운 감칠맛과 향이 해장국 맛의 굵은 줄기가 된다. 빨간 고추기름이 동동 떠 있는 국물은 보기만큼 맵지 않고, 깔끔하고 시원한 맛이 좋다. 뜨거울 때 다진 마늘을 조금 넣으면 국물 맛이 더 달고 진해진다.

    서울에는 설렁탕, 갈비탕, 곰탕 같은 게 흔하다. 아빠와 나의 단골 외식 메뉴다. 형태를 보면 대체로 따로국밥이고, 국물에 당면이나 소면을 넣어 먹기도 한다. 이 가운데 곰탕에는 밥을 말아 내는 경우가 꽤 있다. 맑은 국물에 무를 썰어 넣어 끓이기도 하고, 우거지나 시래기를 넣어 맛을 내기도 한다. 나물 종류가 들어갈 때는 고춧가루 조금 넣어 얼큰한 맛을 더한다. 노란 달걀지단을 채 썰어 올려주는 곳도 있는데, 당연히 국밥 값도 1000~2000원 더 올라간다. 대체로 도드라지는 양념 없이 대파만 송송 썰어 얹고, 넉넉한 국물에 밥을 풀어먹는다. 구수한 곰탕은 처음엔 심심한가 싶다가도 먹다 보면 간이 맞고, 담담한가 싶지만 입술에 기름기가 반질반질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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