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항공우주산업의 역사가 곧 세계 항공우주산업의 역사다!”
- 미국을 제외하고 세계 항공우주산업의 역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유인비행에 성공한 후 미국은 세계 최고의 항공 국가 자리를 다른 나라에 양보한 적이 없다.
세계 항공기 산업계를 이끌고 있는 미국의 스텔스 전투기 F-35.
라이트 형제는 유럽의 항공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08년 프랑스 보르도 근처의 파우에 문을 연 세계 최초의 비행학교는 윌버 라이트가 만든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군용기는 1909년 라이트 형제가 미 육군에 납품한 ‘플라이어(Flyer)-A(Army)’였다. 라이트 형제의 성공은 페르디낭 퍼버, 로베르에노 펠트리, 가브리엘 부아쟁 같은 유럽 항공 선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항공기 제작국
미국에는 라이트 형제만 있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 못지않게 초창기 미국 항공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글렌 하몬드 커티스(1878~1930)를 꼽을 수 있다. 미국 최초의 항공기 제작사는 1906년 6월 글렌 하몬드 커티스와 오거스터스 헤링이 설립한 ‘헤링-커티스’였다. 이 회사는 라이트 형제가 프랑스, 독일, 영국의 회사들과 연합해 1909년 세운 ‘라이트 비행기회사’보다 3년 먼저 등장했다. 이 회사가 제작한 ‘모델 F’ 수상비행기는 1912년 미 해군에 150대나 납품돼 JN 혹은 ‘제니’라 불리며 1920년대 말까지 6000대 이상 생산됐다.
유럽 항공계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다. 유럽에서는 정부나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많은 항공대회가 개최되었다. 맹렬한 추격 덕분에 유럽과 미국의 항공산업 기술 격차는 근소한 차이로 좁혀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비행기가 전쟁무기로 대량 사용되면서 유럽 항공계는 비로소 미국을 앞서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 사이 프랑스는 6만7987대, 영국은 5만8144대, 독일은 4만8537대의 군용기를 생산했다. 같은 기간 미국과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생산한 군용기의 총합은 4만5000대 남짓이었다. 유럽의 항공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미국을 크게 앞서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비행기는 더 튼튼해진 동체와 엔진을 갖게 되었다. 반대로 조종법은 간단해 무거운 화물과 더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대전이 끝나자 군에서 수천 명의 조종사와 수천 대의 군용기가 방출되면서 ‘상업항공’이 탄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주도권을 빼앗긴 미국의 항공산업은 1920년대 말까지 뚜렷한 성장동력을 찾지 못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5년, NASA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NACA(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국립항공자문위원회)를 창설해 미국의 항공기술을 세계 최고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1930년대가 오기 전까지 미국의 항공산업은 유럽을 따라잡지 못했다.
1919년 독일을 필두로 프랑스와 영국에서 항공사가 등장했다. 당시의 항공여행은 매우 불편했는데 많은 사람이 비행기를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투기와 폭격기를 생산하던 유럽의 항공기 제작사들은 새로운 여객기를 개발해 선보였다.
1차 대전 때 유럽에 주도권 뺏겨
세계 최강의 스텔스 전투기인 F-22.
이 법안이 발효되자 수많은 항공사가 등장해 여객 운송과 항공우편 항로를 놓고 경쟁을 펼쳤다. 그 결과 미국의 항공운송은 빠르게 성장해 유럽과의 격차를 좁혀나갔다. 1930년 미국 항공 우편제도의 혁신을 이룬 워터스 법이 미 의회를 통과하자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등 몇몇 회사가 독점하던 항로가 개방돼 항공운송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항공사 간 통폐합이 일어나 아메리칸 에어라인, TWA(Trans World Airlines), 이스턴 에어라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팬 아메리칸이 미국 5대 항공사로 등장했다.
윌슨 대통령이 펼친 항공산업 육성정책이 1930년대에 접어들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NACA와 미국의 주요 대학들의 항공기 설계/생산 기술이 항공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와 유럽에서 건너온 기술자·과학자 출신 이민자들도 큰 기여를 했다.
1933년 2월 첫 비행에 성공한 보잉의 247과 같은 해 7월 첫 비행에 성공한 더글러스의 DC-1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현대식 여객기였다. 이들의 등장은 미국 항공산업이 다시 유럽을 앞서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었다. 1935년 12월 첫 비행에 성공한 DC-3는 최대 21명의 승객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DC-3는 항공 역사상 최초로 승객 운임만으로 운항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여객기가 되었다.
DC-3는 민간 여객기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1939년에는 미국 여객기의 75%를 차지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DC-3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1939년) 직후 C-47(미 해군은 R4D로 명명)이라는 이름의 수송기로 채택돼 큰 활약을 했다. 민간항공 분야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용항공기 분야는 발전 속도가 느렸다. 1930년대 유럽 각국은 군비 경쟁으로 다양한 군용기를 만들었으나 미국의 군용항공기 분야는 한발 늦었다.
2차 대전 계기 항공산업 부흥
제2차 세계대전은 오늘날 미국이 세계 항공우주산업을 제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러시아 이민자인 시코르스키 박사가 세운 시코르스키 항공기 제작사는 수상비행기 제작에 경쟁력이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수상비행기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회전익기 개발에 도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시코르스키 사는 세계 최초의 양산형 헬리콥터인 R-4 호버플라이(Hoverfly/Sikorsky S-47)라는 이름의 헬기를 제작해 1942년 1월 첫 비행에 성공하고, 이어 R-6(Sikorsky S-49) 헬기도 제작했다.
제자리 비행이 가능하고 활주로가 없어도 이착륙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미 육군은 시코르스키 사로부터 400여 대의 R-4와 R-6 헬기를 도입해 수색과 인명구조 , 부상병 수송 등의 용도로 활용했다. 헬기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진가가 확인돼 지금은 적 기동부대를 섬멸하는 지상군의 핵심 항공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 항공산업계가 생산한 전투기와 폭격기, 수송기, 훈련기, 초계기, 헬리콥터의 총 대수는 28만 대였다. 덕분에 연합군은 제공권을 장악해 승리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미국에는 공군이 없었다. 항공부대는 육군과 해군에 속해 있었다. 작전환경과 전투기 운용 개념이 달랐기에 미 육군과 해군은 항공산업계에 자기만을 위한 전투기 제작을 요구했다. 항공기 제작사들은 이에 부응해 P-38, P-39, P-40, P-47, P-51과 F4F, F4U, F6F, F8F 같은 전투기들을 개발해 수천, 수만 대를 육군과 해군에 납품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전략 폭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 항공업체가 B-17, B-29 같은 폭격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만2000대 이상이 생산된 B-17 폭격기는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대한 주간 전략 폭격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3970대가 생산된 B-29 폭격기는 일본에 고고도 폭격을 했다. B-29는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냈다.
종전과 함께 미국의 항공산업계는 평시체제로 전환됐다. 이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맞춰 과도하게 확장된 항공산업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 구조조정을 한다는 뜻이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Me-262로 명명된 제트전투기를 처음 실전에 투입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물량공세에 밀려 제트전투기는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트전투기의 발전 가능성을 주목한 미국이 전후 본격적으로 제트전투기를 개발해 미국 항공산업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다.
종전 후 열린 제트기 시대
독일이 발전시킨 각종 전투기와 로켓무기(V-2) 기술은 독일 패망 후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함으로써 미국 항공우주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겪지 않았기에 항공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전역한 조종사와 정비사 등 전문인력은 민간항공 분야를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미국 최초의 제트전투기는 1942년 10월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기술정보를 교환하던 미국은 1941년 9월 벨 사에 제트전투기 제작을 의뢰해, XP-59A 에어라코멧(Airacomet)을 내놓았다. 1944년까지 3대의 시제기가 완성됐다. 양산기인 P-59A는 20대가 제작됐고, P-59A의 엔진을 교체하고 성능을 개량한 P-59B는 30대가 제작됐다. P-59 시리즈는 제트조종사 훈련, 제트전투기 성능 분석, 교육훈련, 시험비행 등의 용도로 쓰였다.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P-59는 미국의 제트전투기 발전에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미국의 두 번째 제트전투기는 1944년 1월 8일 처녀비행에 성공한 XP-80인데, 이 제트기는 훗날 F-80 슈팅스타와 T-33A 실버스타로 발전했다. F-80은 1715대가 생산돼 미 공군과 해군,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우루과이 등에서도 주력기로 사용되었다. 가장 성공적인 제트훈련기로 평가받는 T-33A는 1948년부터 1959년까지 6557대가 생산돼 41개국에서 조종사 양성에 활용됐다.
미 해군은 1944년 6월 처녀비행에 성공한 FR 파이어볼(Fireball)을 시작으로 1945년 처녀비행에 성공한 FH-1 팬텀, 1947년 1월 첫 비행에 성공한 XF2H-1 밴쉬(Banshee) 등의 제트전투기를 개발했다. 종전 후 동서 냉전이 본격화하며 신무기에 대한 소요가 급증했다. 나치 독일에서 입수한 각종 기술 자료와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인 기술자들이 항공산업계로 흡수되면서 미국의 제트전투기 개발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47년 미 육군에서 공군이 독립하면서 미국은 P(Pursuit)로 표기하던 전투기 식별부호를 F(Fighter)로 변경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제공권을 쉽게 장악할 것을 기대하며 공군의 F-80과 F-84 선더제트(Thunderjet), 해군의 F9F 팬서(Panther)를 급파했다. 그러나 소련이 비밀리에 제공한 미그-15가 1950년 11월 1일 모습을 드러내면서 상황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됐다. 같은 달 8일, 미 공군의 F-80과 중공군의 미그-15가 역사상 최초로 제트전투기들 간의 공중전을 펼쳤다. 미국은 미그-15의 성능이 F-80은 물론이고 F-84보다 우수해 베테랑 조종사들조차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제트전투기 최초 맞붙은 6·25전쟁
깜짝 놀란 미국은 당시로서는 최신예 전투기인 F-86 세이버(Sabre)를 급파했다. 1950년 12월 13일 한국에 도착한 첫 번째 F-86 비행대대가 미그-15와의 공중전에서 확실한 우위를 보여줬다. 12월 한 달 동안 F-84는 1대 8의 비율로 미그-15를 격추했다. 문제는 미 공군이 충분한 숫자의 F-86을 배치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부족한 전투기는 F-80과 F-84로 채워야 했다. F-80과 F-84 조종사들은 미그-15 대응 전술을 보완해, 소련 제트전투기들과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게 되었다.
땅과 가까운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큰 활약을 펼쳤다. 벨, 시코르스키 등에서 제작한 벨-47, S-51, H-19, H-21, HRP-1S 등의 헬기가 부상병 수송에서 공중강습작전까지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1951년 10월 미 해병대 1개 대대가 12대의 H-19에 나눠 타고 공중강습작전을 펼쳤는데 이것은 헬리콥터를 동원한 최초의 대규모 작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6·25전쟁을 통해 소련의 항공기술력이 미국 못지않은 수준까지 발전했고 서방세계보다 우수한 전투기를 개발할 수 있는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미국 정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국 전투기를 제압할 수 있는 전투기 개발을 항공우주산업체에 요구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과 미 공군은 X로 시작되는 실험기 운용 자료와 다양한 항공정보를 정리해 항공기 제작사에 제공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4년 사이 6종 이상의 신형 전투기가 개발돼 미 공군에 도입됐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센추리(Century) 시리즈다.
수평 비행에서 마하 1 이상으로 비행할 수 있는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F-100 슈퍼 세이버(Super Saber)를 시작으로 삼각날개의 F-102 델타 대거(Delta Dagger), 마하 2 이상으로 비행할 수 있는 최초의 제트전투기 F-104 스타파이터(Starfighter), 전천후 요격 능력을 갖춘 F-101 부두(Voodoo), 1인승 전폭기 F-105 선더치프(Thunderchief), 1980년대 후반까지 요격기로 활약한 F-106 델타 다트(Delta Dart)가 차례로 실전 배치됐다. 같은 시기, 미 해군용으로 F11F 타이거(Tiger), F-8 크루세이더(Crusader) 등이 개발돼 실전 배치됐다.
냉전이 격화되자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신형 폭격기를 실전 배치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략폭격기는 핵폭탄을 운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정받았다. 1947년 12월 보잉 사는 B-47 스트라토제트(Stra-tojet), 1952년 4월 B-52 스트라토포트리스(Stratofortress) 전략폭격기의 첫 비행을 성공시켰다. 보잉은 707 여객기를 모체로 한 KC-135 스트라토탱커(Stratotanker) 공중급유기를 내놓았는데, 이 급유기로 인해 전략폭격기의 장거리 비행이 가능해졌다.
여객기 시장 평정한 보잉-747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초토화됐던 유럽의 항공운송 사업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전쟁 중에 건설한 수많은 비행장과 장거리 항법장치, 군에서 방출된 군용기들은 민간항공사의 운항 재개에 큰 도움이 됐다. 종전과 함께 동서냉전이 바로 시작됐기에 상당수의 미군이 유럽에 주둔하면서 자연스럽게 미국과 유럽 간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대륙 간 비행이 가능한 고성능 여객기를 개발, 양산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보잉, 록히드, 더글러스 같은 항공기 제작사들이 전쟁 전부터 개발해온 신형 여객기들을 앞 다퉈 선보였다.
1947년 보잉은 보잉-377 스트라토크루저(Stratocruiser), 록히드는 L-649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과 L-1049 슈퍼 콘스텔레이션(Super Constellation), 더글러스는 DC-6, DC-7을 동시에 선보였는데 이들은 여압구조의 객실을 갖춘 장거리 여객기였다. 프로펠러 여객기들은 제트여객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 내는 물론이고 대서양, 태평양을 잇는 장거리 노선에서 활약했다. 미국 내 항공수요는 폭발적이었다. 1957년 미국 내 도시 간 수송에서 프로펠러 여객기에 의한 항공수송이 철도와 버스 등 지상 운송수단을 앞서기 시작했다.
1949년 7월 영국 해빌랜드 사가 첫 번째 제트여객기를 생산했다.‘디 하빌랜드 DH 106코멧(De Havilland DF 106 Comet)’으로 명명된 이 제트여객기는 세계 각국의 항공사들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아 영국 항공산업의 자존심으로 불렸다. 하지만 1954년 1월과 4월, 잇달아 추락해 안전성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하루아침에 외면받았다. 이를 보완한 코멧2가 등장했지만 승객들은 물론 항공사들도 냉담하게 반응했다. 코멧은 전 시리즈를 통틀어 114대가 생산된 것을 끝으로 단종되고, 코멧이 열어 놓은 제트여객기 시장은 미국 항공사의 차지가 되었다.
당시 보잉은 피스톤 엔진 여객기 시장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보잉은 제트여객기 개발에 사활을 걸어, 1954년 7월 미국 최초의 제트여객기인 707을 선보였다. 1955년 3월 미 공군이 KC-135A라는 이름으로 이 항공기를 정식 채택하고, 1955년 10월에는 미국 팬암 사가 양산형 707-120 6대를 주문했다. 더글러스 사는 DC-8 제트여객기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1958년 5월 첫 비행에 성공했다.
상업운항에 나선 보잉707과 더글러스 DC-8은, 대서양 횡단 노선에서 미국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 일조했다. 보잉은 707을 1000대 이상, 더글러스는 DC-8을 550대 이상 제작해 제트여객기 시장을 장악했다. 1963년 보잉이 3대의 제트엔진을 동체 후방에 설치한 727을 선보이자 2년 후 더글러스 역시 2대의 엔진이 동체 후방에 설치된 DC-9을 내놓았다.
1967년 보잉은 단거리용 737을 선보였다. 737은 시장 진입 초기 단계에는 이전 모델과 같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탁월한 기본설계와 성능을 바탕으로 주문 대수를 늘려나갔고 지속적인 성능개량으로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다.
세계 주요 도시들은 제트여객기로 연결됐다. 여객기 수요가 폭증하자 보잉은 1969년 2월, 항공기 역사의 이정표로 불리는 세계 최대 여객기 747을 내놓았다. ‘점보제트’와 ‘하늘의 여왕(Queen of the Skies)’으로 불린 747은 한 번에 400명 이상을 수송할 수 있어 1300대 이상이 판매되었다. 747은 에어버스의 A-380이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제트여객기 로 군림했다.
정찰기 분야서도 괄목할 발전
그 시기 맥도널 더글러스는 DC-10을, 록히드는 L-1011 트라이스타를 내놓았다. 그러나 747의 아성을 뛰어넘지는 못해 두 회사는 여객기 시장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1950~70년대 민간항공 발전에 기여한 마틴, 콘베어, 록히드, 더글러스가 합병이나 구조조정을 통해 사라지거나 여객기 사업을 포기하게 되었다. 더글러스는 전투기 제조업체인 맥도널 사에 합병됐으나, 1997년 8월 맥도널 더글러스가 보잉에 흡수됐기에 여객기 사업 부문은 보잉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냉전 기간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을 염탐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전을 전개했다. 첩보위성이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은 전략정찰 분야에서 소련을 확실히 압도했다. 비결은 U-2 고고도 정찰기와 SR-71 초음속 정찰기에 있었다. 록히드의 비밀 연구개발팀 ‘스컹크 웍스(Skunk Works)’가 켈리 존슨의 지휘 아래 중앙정보국(CIA)을 위해 개발한 U-2는 적 방공망과 지대공 미사일을 피할 수 있는 20㎞ 고고도를 비행한다. 1956년부터 소련 영공 깊숙이 침투해 전략정찰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거대한 글라이더처럼 생긴 U-2는 1960년 5월 소련의 SA-2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기 전까지 전략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소련 영공을 침범해 전략정찰하는 것을 제한했다. 그러나 여타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U-2를 투입해 정찰했다.
베트남전으로 누린 반짝 특수
1962년 4월 미국은 최고의 기술을 집약시켜 그때까지 개발된 것 가운데 가장 비밀스러운 SR-71 초음속 정찰기의 첫 비행을 성공시켰다. 블랙버드란 별명을 가진 SR-71은 26km 고고도에서 마하 3(시속 3218km)으로 순항하기에 지대공미사일로 격추할 수 없다. 이 정찰기는 초음속 순항비행 시 발생하는 대기와의 마찰열을 견디기 위해 티타늄 합금으로 동체를 만들고 검은색 특수 코팅제로 기체를 감쌌는데, 이는 지금도 모방하기 힘든 최첨단 항공기술이다. SR-71은 완전 퇴역했지만 이보다 빠른 제트비행기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체와 방위산업체들이 특수를 맞았다. 1950년대에는 견줄 수 없지만 다양한 전투기 개발과 획득 사업이 추진되었다. 당시 미 공군과 해군은 자기 임무에 특화된 전투기와 공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의 스타는 5195대가 생산돼 미 해군과 공군, 해병대는 물론이고 영국, 독일 등 동맹국에 판매된 F-4 팬텀II 전폭기였다.
이 시기 미국은 동맹국이 사용하도록 F-5 프리덤 파이터 경(輕)전투기도 개발해 20개국 이상에 수출했다. 미 공군은 F-100, F-101, F-102, F-104, F-105, F-106, F-111, F-4 등의 전투기/공격기를 운용했고, 미 해군은 A-4, A-5, A-6, A-7, F-8, F-4 등의 전투기/공격기를 운용했다. 전자전기, 정찰기, 특수작전기 등 파생형을 포함하면 가짓수는 배 이상으로 증가한다. 일부에서는 다양한 기종을 운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했지만 베트남전쟁을 이유로 이 주장은 묵살됐다.
레이저 유도폭탄, 공대지 유도미사일 등이 실용화되면서 항공전자장비 비중이 높아지자 미국의 주요 항공우주산업체는 항공전자 분야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일부 회사들은 항공기 생산을 포기하고 항공전자 분야에 역량을 집중하는 전문화/계열화 현상을 보였다. 헬리콥터의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벨과 시코르스키의 가치가 높아졌다. 베트남전쟁 기간에 미국은 소련과의 기술 격차를 벌렸다. 유럽 주요 국가들도 전투기 개발을 추진했지만, 역시 미국을 따라오지 못했다.
베트남전쟁 후 미국은 차세대 전투기 획득 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미 해군은 1974년 F-14 톰캣(Tomcat)을, 미 공군은 1976년 F-15 이글을 실전 배치했다.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할 수 있는 F-14는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주력이자 상징으로 활약했다. 712대가 생산돼 미 해군과 이란 공군에서 운용되었다.
스텔스 전투기 F-22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강력한 제공전투기로 평가받은 F-15는 미 공군은 물론 일본 항공자위대, 사우디 공군, 이스라엘 공군에 1198대가 공급됐다. 1988년에는 전천후 전투폭격 능력을 갖춘 F-15E 스트라이크 이글이 등장해 미 공군과 사우디, 이스라엘, 한국, 싱가포르 공군이 운용하게 되었다.
1976년 미 공군의 ‘하이-로 믹스(Hi-Low Mix) 개념’에 따라 F-16 파이팅 팰콘(Fighting Falcon)이 등장했다. F-15가 하이급이니 F-16은 로급 전투기다. F-16은 1978년 8월 미 공군에 실전 배치된 이후 지속적인 성능개량을 해 현재는 전천후 폭격 능력을 갖게 되었다. 총 생산대수는 4500대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이외에 한국을 포함한 24개국에 수출되었다.
1983년에는 F/A-18 호넷(Hornet)이 미 해군에 실전 배치되기 시작했다. 미 공군의 로급 전투기 사업에서 F-16에 패했던 YF-17이 미 해군에 의해 F/A-18 호넷으로 기사회생한 것이다. 1480대가 생산되어 미 해군과 해병대, 호주, 핀란드,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스페인, 스위스 공군 등에서 운용하고 있다. 1999년에는 성능이 강화된 F/A-18E/F 슈퍼호넷이, 2006년에는 전자전 기체인 EA-18G 그라울러(Growler)가 등장했다.
복잡한 방산업체 인수합병
라이트 형제의 역사적인 동력 비행 후 수많은 항공기 제작사가 등장했다 사라졌다. 항공우주산업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은 그 정도가 심한데, 미국 항공우주산업 역사에 이름을 남긴 회사 가운데 현재 명맥을 유지하는 회사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냉전이 끝나기 전인 1987년 미국의 군용기 획득 예산은 330억 달러였는데, 냉전이 끝난 1998년은 140억 달러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미국 항공우주산업계는 재편 과정에 들어갔다. 1994년 5월 노스롭(Northrop)과 그루만(Grumman)의 합병을 시작으로 전례없는 인수합병을 반복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그루만, 보트(Vought), 더글러스 사는 미 해군용 전투기를 생산했다. 1967년 더글러스가 맥도널에 흡수돼 맥도널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가 되었다. 맥더널 더글러스는 F-15, F/A-18, KC-10, MD-11 등을 생산하며 미국 항공우주산업 분야를 대표하는 최고의 군산복합체가 되었다. 그러나 차세대 여객기로 주목받은 MD-11과 MD-80/90 시리즈가 실패하고, JSF(Joint Strike Fighter) 차기 전투기 사업에서도 패배하면서 흑자 도산해 1997년 보잉에 흡수합병되었다.
그루만은 1994년 노스롭에 합병돼 노스롭 그루만으로 재탄생했다. 노스롭 그루만은 보트를 흡수했다가 2001년 매각했다. P-47부터 F-105까지 미 공군의 주력 전투기를 생산했던 리퍼블릭 사는 인수합병을 거치면서 페어차일드(Fairchild Aircraft) 사가 되었으나 A-10 선더볼트 II(Thunderbolt II) 생산을 끝으로 도산했다. 그 후 매각과 인수합병을 거듭하다 현재는 이스라엘 엘빗 시스템스(Elbit Systems) 산하에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4500대 이상이 생산됐고 지금도 계속 생산되는 F-16을 개발한 제너럴 다이내믹스는 록히드에 F-16의 생산 부문을, 텍스트론(Textron)에 세스나 부문을 매각해 군용기 사업 부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록히드는 1995년 3월, 미사일 제조로 유명한 마틴 마리에타와 합병해 현재의 록히드 마틴이 되었다. 그리고 전자기기와 미사일을 생산하던 로랄(Loral)을 흡수해 명실상부한 미국 최고의 방위산업체가 되었다.
록히드의 라이벌인 보잉은 1996년 12월, 로크웰 인터내셔널의 국방 및 우주사업 부문을 흡수했다. 2000년 10월에는 휴즈의 우주 및 통신 사업 부문을 인수했다. 2012년 보잉은 록히드 마틴을 능가하는 미국 제1의 항공우주 복합산업체가 되었다. 현재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은 보잉, 록히드 마틴, 레이시온, 노스롭 그루만의 4대 기업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최대의 화두 스텔스
1991년 걸프전 이후 미국 항공우주산업체들은 후발 주자들의 도전과 냉전 종식이라는 환경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냉전 종식으로 세계대전 위협은 크게 감소한 대신 비정규전, 대테러전 같은 작은 전쟁이 잦아졌다. 그에 따라 큰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만든 전투기와 폭격기에 대한 소요가 줄어든 것이 첫째 원인이다. 후발 국가들의 추적도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와 유럽은 물론 중국, 인도 등도 강력한 경쟁상대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산업 분야의 최대 화두는 누가 뭐라 해도 스텔스 기술이다. 스텔스는 록히드가 SR-71 제작으로 처음 선보였다. 1977년 12월에는 F-117 나이트 호크(Nighthawk)로 명명된 최초의 스텔스 공격기 비행이 있었다. 1982년 실전 배치된 F-117은 1988년 처음 그 존재가 확인되고, 1991년 걸프전 활약상이 공개됨으로써 베일을 약간 벗었다.
1993년부터 실전 배치된 B-2 스피리트(Spirit) 폭격기에도 스텔스 기술이 접목됐다. B-2는 재래식 폭탄은 물론이고 핵폭탄을 싣고 주요 전략 목표를 타격할 수 있다. 1997년에는 세계 최강의 스텔스 전투기로 평가받는 F-22 랩터를 실전배치했다. 현재는 JSF로 불리는 F-35 라이트닝 II가 개발되고 있다. 스텔스 비행기들은 모두 록히드 마틴에서 제작됐다. 현재 미국의 군용기 사업은 스텔스 전투기와 폭격기는 록히드 마틴이, 수송기와 공중급유기는 보잉이 전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텔스 기술과 함께 주목받는 차세대 항공 기술 분야가 바로 무인항공기(UAV)다. 미국은 무인항공기 분야에서도 선두를 지키고 있다. RQ-4 글로벌 호크, RQ-7 섀도, MQ-1 프레데터와 MQ-9 리퍼, RQ-170 센티넬(Sentinel) 등을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 UAV 사업에는 록히드와 노스롭 그루만 같은 전통적인 항공기 제작사는 물론이고 신생 업체들도 참여하고 있다.
민간항공 분야에서는 미국 유일의 여객기 제작사로 남은 보잉이 급성장한 에어버스와 세계 1위 자리를 놓고 접전을 벌이고 있다. 보잉은 1981년 767, 1983년 757을 선보이고, 1988년에는 747을 개량한 747-400을, 1994년에는 777을 등장시켰다. 1997년에는 맥도널 더글러스에서 제작하던 MD-90 시리즈를 717로 명명해 제품군에 추가했다. 2011년 보잉은 차세대 여객기로 평가받는 787과 747-8 시리즈를 인도하며 에어버스와의 정면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은 독보적 최고
많은 전문가가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이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예측한다. 보잉과 에어버스의 접전은 서로 다른 미래 예측과 대응 전략에 따라승패가 갈릴 것으로 보고 있다. 군용기 분야는 냉전 종식과 군축의 영향을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F-35의 개발 지연으로 록히드 마틴의 입지는 매우 좁아져 있다. F-35가 혁신적인 미래 전투기인 것은 확실하지만, 지금은 비용대비 효과가 강조되는 시점이라, F-22처럼 전체 사업 규모가 축소될 수 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있지만 지난 100여 년 동안 항공우주산업 분야에 축적돼온 미국의 기술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체들은 스텔스, 무인항공기, 바이오연료, 신형 엔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기술 개발에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항공우주산업에 대한 저변 역시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매년 수천 명의 젊은 피를 공급받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는 한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은 여전히 세계 최고로 평가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