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우주학과 정치학의 교묘한 만남

우주발사체와 발사장

  • 이정훈 /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2-08-28 10: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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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주발사체는 미사일 발사 기술에서 나왔다.
    • 이 때문에 발사체 개발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 이러한 제악을 뚫고 한국형 발사체를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지리적으로 발사장 조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선으로 발사하는 모험까지 택했다. 우주발사체를 만들기 위한 남북한의 경쟁, 발사장을 둘러싼 자연적·지정학적 조건 등 접하기 힘든 비밀을 공개한다.
    우주학과 정치학의 교묘한 만남

    나로우주센터 조감도. 왼쪽 평지가 발사장이다.

    우주 개발에 도전하려면 위성과 함께 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리는 우주발사체(SLV· Space Launch Vehicle)를 만들어야 한다. 우주발사체는 ‘발사체’로 약칭한다. 한국은 위성 분야에서는 꽤 앞서가고 있으나 발사체 쪽은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우주 개발 선진국들은 발사체 개발에 중점을 뒀다. 이유는 국방 때문이었다. 발사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폰 브라운 박사가 이끈 독일의 페네뮌데 연구소에서 개발한 V-2 로켓에서 비롯됐다. 폰 브라운 박사 이전 미국에서는 고다드 박사가 로켓을 만들었지만, 로켓으로 사거리가 긴 무기를 만들어 실전에 사용한 것은 폰 브라운이 최초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은 V-2 로켓으로 영국을 공격했다.

    ICBM 전력에서 앞섰던 소련

    미국이 ‘리틀보이(우라늄탄)’와 ‘팻맨(플루토늄탄)’이라는 원자폭탄을 개발해 사용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무기는 V-2 로켓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해 독일을 분할 점령한 소련과 미국은 V-2를 토대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했다. 원폭 개발 경쟁에서는 미국이 앞섰지만 ICBM 경쟁에서는 소련이 앞에 있었다.

    소련이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인 R-7을 실전배치했을 때 미국은 중거리탄도미사일인 ‘주피터’를 운용했다. 소련은 ‘스푸트니크-1호’로 명명한 인공위성도 미국보다 먼저 지구 궤도에 올렸다. 최초의 우주비행사(유리 가가린·1961년)와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발렌티나 테레슈코바·1963년)도 소련에서 나왔다. 그제야 원폭 2발로 제2차 세계대전을 끝냈다고 자신하던 미국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미국은 패전국가 독일에서 기술을 배울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에 독자적으로 로켓을 개발하려다 소련에 뒤지게 된 것이다. 원폭과 수소폭탄 개발에서 근소한 차이로 미국에 뒤졌던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과 발사체 개발에서 앞서가자 미국은 전율했다. 미국인들은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소련 위성이 미국을 향해 핵무기를 떨어뜨릴 것을 우려했을 정도니 당시 소련에 대한 미국인의 적대감과 경쟁심은 극에 달했다고 하겠다.

    1961년 취임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1970년이 오기 전에 달에 사람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의 우주 개발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항공우주국(NASA)을 가동했다. 총력전 덕분에 미국은 소련보다 먼저 달에 사람을 착륙시켜, 우주개발 분야에서도 소련을 앞서나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 중국 인도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등 내로라 하는 나라들도 ‘뒤지면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우주 개발을 추진해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뒤지면 죽는 것’이니 그 시절의 우주 개발은 미사일로 전용할 수 있는 발사체 개발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도 국방을 위해 로켓 개발에 눈을 돌렸다. 1968년 한국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1·21사태와 울진과 삼척 지역을 일시 점령하는 울진·삼척사태를 겪었다. 그해 북한은 원산 앞바다로 접근한 미 해군 정보함인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이듬해에는 함남 해안으로 접근한 미 공군의 EC-121 정찰기를 미사일로 격추시켰다.

    안보 위해 시작한 로켓 개발

    그로 인해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극에 달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모토로 국산무기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국방과학연구소(이하국과연)를 만들었다(1970년 8월 6일). 이듬해 박 전 대통령이 국과연에 유도탄(미사일) 개발 가능성을 검토하라는 극비 지시를 내려 추진된 것이 그 유명한 ‘백곰 사업’이다. 이 사업의 목적은 미군이 한국군에 이양한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이하 나이키)을 모방 생산하는 것이었다.

    1978년 9월 26일 국과연은 박 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곰 미사일 시사회를 열었다. 결과는 멋진 성공이었다. 백곰 사업을 통해 한국은 최초로 고체로켓엔진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박 전 대통령은 핵 개발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고 새로 들어선 전두환 정부는 미국을 의식해 핵 개발은 물론이고 미사일 개발까지 중단시켰다. 적잖은 국과연 직원이 일자리를 잃고 민간 기업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다행히 국과연은 백곰을 통해 개발한 로켓 기술을 폐기하지는 않았다.

    북한군에서는 ‘방사포’라고 하는 것을, 한국군에서는 ‘다연장로켓’이라고 한다. 국과연은 백곰 사업으로 습득한 고체로켓 기술로 한국형 다연장로켓인 ‘구룡’을 만들었다. 구룡 사업이 한창 추진될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버마(지금의 미얀마) 아웅산국립묘지를 방문했다가 북한이 설치한 시한폭탄이 터져 정부 각료 등 수십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전두환 정부는 미국의 협조를 얻어 미사일 개발을 재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평양까지 도달하는 사거리 180km이내의 미사일만 개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동의하고, 한국에 관련 기술을 이전해주었다. 그 결과 국과연은 백곰보다 훨씬 성능이 좋고 사거리도 길어진(150→180km) ‘현무’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었다. 현무와 백곰 나이키는 모두 고체로켓을 탑재했다. 군용 미사일은 신속하게 발사해야 하기 때문에 고체로켓을 탑재하는 경우가 많다.

    V-2로켓은 액체연료를 사용했다. 액체연료는 물성(物性)이 예민해 미사일이나 발사체를 똑바로 세워놓고 주입하고 주입한 다음에는 빨리 발사해야 한다. 발사를 미루면 액체연료의 물성이 변하기 때문이다. 미사일 측면에서 보면, 액체연료 주입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큰 약점이다. 상대의 선제공격을 받으면 탄두와 함께 액체연료도 폭발해 엄청난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탄도미사일은 고체로켓 사용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고체연료였다. 고체연료는, 간단히 설명하면 고화(固化)제를 사용해 액체연료와 산화제를 섞어 물성 변화가 적은 고체 상태로 바꿔놓은 것이다. 고체연료는 미사일 안에 항상 장전해놓을 수 있어, 점화만 하면 미사일이 바로 날아간다. 그러나 우주발사체는 워낙 크기에 대개 액체연료를 사용한다.

    우주 개발 선진국들은 가장 큰 힘을 내야 하는 발사체 1단에는 액체로켓을 채택하고 2단부터는 고체로켓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백곰과 현무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나 우주발사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전술미사일이다. 현무-1의 무게는 5t에 불과하지만, 나로호는 140t이 넘는다. 현무-1은 대기권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하는 미사일이므로 현무-1에 사용한 로켓으로는 나로호를 띄울 수 없다.

    전술미사일에 사용된 것과는 다른, 우주발사체에 쓸 로켓엔진을 만들어보자는 노력은 1989년 한국항공우주연구소(항우연)가 한국기계연구소 부설기관으로 떨어져 나오면서 본격화했다. 항우연은 한국기계연구소 부설 기관으로 시작된 항공우주연구소를 뿌리로 삼지만, 일부 인사들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부설 천문우주과학연구소도 뿌리로 본다. 기계연의 항공우주연구소와 전자통신연의 천문우주과학연구소가 합병해 항우연이 만들어졌다 고 보는 것이다.

    1990년 항우연은 현무에 사용된 것과 다른 고체로켓 개발에 들어갔다. 이 로켓은 영어로는 KSR(Korea Sounding Rocket)-1, 우리말로는 ‘과학로켓-1호’로 명명됐다. 우주발사체를 만들려면 고체로켓도 필요하기 때문에 기술이 축적돼 있는 고체로켓 분야부터 도전해보기로 한 것. 1993년 6월 4일 항우연은 KSR-1 1호기를 시험발사해 고도 39km, 지상 기준 비행거리 77km를 기록했다. 그해 9월 1일에는 2호를 발사해 고도 49km, 지상 기준 비행거리 101km를 달성했다.

    전문가들은 KSR-1을 미사일로 개조하면 200kg 탄두를 달고 최고 150km까지 비행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현무(현무-1)보다 떨어지는 성능이다. 그러나 현무는 2단으로 구성돼 있고, KSR-1은 1단이어서 둘을 바로 비교할 수는 없다. KSR-1의 무게는 1.25t으로 5t에 육박하는 현무보다 훨씬 가볍다. KSR-1은 현무 개발 과정에 습득한 기술로 만든 초보적인 우주발사체용 로켓으로 보아야 한다.

    KSR-1 발사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항공우주연구소는 2단형 KSR-2 개발에 도전했다. 1997년 7월 9일 서해 안흥시험장에서 KSR-2의 최초 발사 시험이 있었다. KSR-2는 단 분리에 성공해 2단이 성공적으로 점화됐으나, 그 직후 본부와의 통신이 끊어졌다. 통신이 두절된 KSR-2는 비행정보를 알리지 못한 채 날아가 127.7km 떨어져 있는 예상 착수(着水)처에 떨어졌다.

    북한에 밀렸던 로켓 실력

    1998년 6월 11일 항우연은 KSR-2 제2차 발사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통신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137.2km 고도까지 올라갔다가 지상 기준 123.9km거리를 비행한 뒤 서해에 떨어졌다.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성공은 50여 일 후 북한이 거둔 거대한 성공에 파묻히고 만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3단형 발사체인 대포동-1호(북한 이름은 ‘백두산’)를 동해로 발사해 남한 국민을 긴장시켰다.

    대포동-1호는 마지막인 3단이 점화되지 않아 북한이 기대한 것보다는 짧은 1600여 km를 날아 바다에 떨어졌다. 이 때문에 대포동-1호에 탑재했다는 광명성-1호 위성은 자기 고도에 올라가지 못하고 추락했다. 제대로 점화됐으면 대포동-1호는 광명성-1호를 지구 궤도에 올려놓고 3단은 지상 기준으로 최대 2200km를 비행하는 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대포동-1호 발사로, 과거 미국이 소련에 뒤졌던 것처럼 한국도 우주 개발과 탄도미사일 분야에서 북한에 크게 뒤져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다.

    북한이 2000km 이상 날아가는 액체로켓을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한국은 액체로켓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KSR-3 개발에 나선 것이다. 항우연은 KSR-3를 1단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것을 토대로 대포동-1호와 비슷한 한국형 우주발사체 KSLV-1을 개발하기로 했다. 그러자 현무를 개발하면서 미국과 맺은 한미미사일각서가 문제가 됐다.

    이 각서는 한국은 사거리 180km 이내의 탄도미사일만 개발한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우주발사체를 개발하려면 우주 개발 선진국인 미국으로부터 부품과 기술을 도입해야 하는데, 미국은 이 각서를 근거로 발사체 개발에 필요한 부품과 기술의 수출을 거부할 수가 있다. 미국이 반대하면 서방 진영에 속한 다른 선진국들도 회피할 것이니, KSR-3와 KSLV-1의 개발은 어려워진다.

    미국을 한미미사일각서를 개정해도 좋다는 쪽으로 돌려놓기 위해 한국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 가입을 추진했다. MTCR은 탄두중량 500kg, 사거리 300km가 넘는 탄도미사일의 기술과 부품을 MTCR 회원국이 아닌 나라에 수출하는 것을 금지한다. MTCR 회원국에 한해서만 탄두중량 500kg과 사거리 300km까지의 미사일 기술 수출을 허가한다. 그러나 우주발사체 기술은 거리 제한 없이 회원국으로부터 도입할 수 있게 해놓았다.

    미국과 미묘한 신경전

    한국은 MTCR 가입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국의 MTCR 가입 여부는 미국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2001년 미국은 한국의 MTCR 가입에 동의했다. 동시에 별도로 한국과 ‘한국은 탄두중량 500kg, 사거리 300km의 탄도미사일은 개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 때문에 한국은 MTCR 회원국이면서도 자력으로 사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이 넘는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MTCR은 탄두중량이 500kg 이하의 순항미사일이라면 사거리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한국은 이 점을 활용해 사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의 ‘현무-2’ 탄도미사일과 함께 탄두중량은 500kg 이하이지만 사거리는 500km(현무-3A), 1000km(현무-3B), 1500km(현무-3C)인 ‘현무-3’ 순항미사일 시리즈를 개발했다.

    그때도 북한은 한국을 앞서갔다. 한국이 현무-2를 완성하기 전 북한은 현무-2보다 사거리가 긴 ‘노동’을 시작으로 ‘대포동-1호’, ‘대포동-2호’를 개발했다. 현무-2를 개발했어도 한국은 계속 북한의 탄도미사일 위협 아래 놓여 있게 된 것이다. 이 위협을 없애려면 유사시 후방 깊숙한 곳에 있는 북한의 미사일 기지 등 전략거점을 잡아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사거리 300km가 넘는 탄도미사일이 있어야 하는데, 한미미사일협정은 한국이 자력으로 사거리 300km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하게 금지한다.

    한국에서는 한미미사일협정을 개정해, 한국이 사거리를 1000km나 1500km로 늘인 탄도미사일을 자력으로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여론을 토대로 정부는 미국과 미사일협정 개정 논의에 들어갔다.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늘여야 한다는 주장은, 중국이 황해와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을 내수(內水)로 하는 ‘도련(島鍊)’ 정책을 추진한 후 미국에서도 지지를 얻게 되었다.

    친미국가이면서도 중국에 가까이 있는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는, 미국 턱 밑에 붙어 있는 공산국가 ‘쿠바’에 비교할 수 있다. 소련은 R-7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갖고 있는데, 미국은 중거리탄도미사일만 보유했던 1961년, 미국은 미사일 전력 차이를 메우려 다각도로 시도했다. 사거리가 짧아 미국에서 발사해서는 소련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주피터 IRBM을 소련의 발아래인 이탈리아와 터키에 배치한 것.

    소련은 그에 맞서 미국의 턱밑인 쿠바에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ICBM을 배치하려고 했다. 소련의 대응에 깜짝 놀란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소련의 ICBM을 실은 배가 쿠바로 오면 전 함대를 동원해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1962년). 그로 인해 세계는 ‘핵전쟁을 일으키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미사일의 정치학

    이 절체절명의 위기는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배치를 포기함으로써 해소됐다. 미국도 양보했다. 이탈리아와 터키에 배치한 IRBM을 철수한 것. 쿠바사태로 명명된 이 사건은 미국에 대한 쿠바의 지정학적 가치가 어떤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한국이 ‘중국의 쿠바’인 셈이다. 한국은 반도 국가이니 ‘플로리다 반도에 자리 잡은 쿠바’라고 하겠다.

    소련 붕괴 후 G-2 국가가 된 중국은 A2/AD(Anti Access/Area Denial)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해상방어선인 도련(島鍊·섬 사슬) 안쪽으로 미국 함정이 들어오면 공격한다는 것이 골자다. 중국은 유사시 도련 안쪽으로 들어온 미국 함정을 공격하겠다며 대함탄도미사일인 ASBM(Anti-Ship Ballistic Missile)을 만들었다. 배는 작은 표적이기에 사격 명중률이 높은 순항미사일로는 맞힐 수 있어도, 속도가 빠른 탄도미사일로는 맞히기 어렵다. 그러나 적지(敵地) 상공에서 터지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미사일을 만든다면 궤멸시킬 수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중국이 만든 것이 대함탄도미사일이다.

    중국이 이렇게 나오자 미국에서는 ‘그렇다면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을 원하는 한국의 요구를 들어주자. 한국이 개발한 사거리 1500km의 탄도미사일은 유사시 중국을 견제할 수도 있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했지만, 한국은 스스로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려 하니 미국이 손해 볼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시 초점을 한국의 액체로켓 개발로 옮겨보자. MTCR 가입 이듬해인 2002년 11월 28일 항우연은 1단 액체로켓인 KSR-3를 발사해 고도 42.7km, 지상 기준 비행거리 79.5km를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 KSR-3의 추력은 13t이었다. MTCR 가입으로 한국은, 우주발사체용 로켓 기술을 MTCR 회원국으로부터 이전받을 수 있게 되었다.

    100kg의 위성(과학기술위성-2호)을 실어 발사하려고 하는 나로호의 무게가 140t이다. 따라서 나로호 발사 추력은150t 이상이어야 한다. 100kg짜리 위성을 올리는 데 150t 추력이 필요하다면 KSR-3는 의미 있는 발사체라 할 수 없다. KSR-3는 대기권 안인 42.7km까지 올라갔으니 만족할 만한 액체로켓이 될 수 없었다. 그러한 한국은 KSLV-1을 개발하기로 했다. 13t에서 150t 이상으로 추력을 높이는 퀀텀 점프를 해보기로 한 것.

    러시아 빼고는 협력국가 없어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마음씨 좋은’ 엉클 샘이 아니었다. MTCR 회원국 가운데 액체로켓 기술을 가진 나라는 7개 국가 정도였다. 기술을 이전받을 때는 가격도 중요한 검토요인이 되는데, 이 조건까지 만족시키는 나라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러시아만 조건을 충족시켰다. 당시 러시아는 석유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우주 분야만큼은 여전히 침체 상태라 갖고 있는 기술을 팔려는 의지가 있었다.

    우주 개발 의지가 강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러시아를 노크했다. 그리하여 2004년 9월 21일 러시아의 크렘린궁에서 한국의 오명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은 페르미노프 러시아연방우주청장과 노무현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러우주기술협력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국회의 비준 동의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항우연은 러시아 최대의 우주 개발 업체인 흐루니체프 사와 계약을 맺어 우주기술을 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제동이 걸렸다. 러시아 의회가 기술 보호를 이유로 브레이크를 걸고 나온 것. 이 시기 미국은 러시아에 ‘왜 한국에 로켓기술을 전해주려고 하느냐’며 시비를 걸었는데 이것도 브레이크를 거는 데 일조했다. 그로 인해 처음부터 다시 관계자를 설득하는 노력을 펼쳐 ‘한국은 러시아가 제공한 우주기술을 제3국에 유출하지 않고 철저히 보호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한러우주기술보호협정’을 국회 비준을 받는 조건으로 만들게 되었다. 2006년 10월 한국의 과기부총리와 러시아 연방우주청장은 서울에서 이 협정에 서명했다. 한국 국회는 바로 비준 동의를 했고 러시아 의회는 조금 늦게 비준 동의해 2007년 7월 이 협정이 발효되었다.

    2004년 협정보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많이 추가됐지만 한국은 우주 개발에 도전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항우연은 즉각 흐루니체프와 계약을 맺고 나로호 개발에 들어갔다. 흐루니체프 사는 액체로켓인 나로호 1단을 개발하고, 항우연은 고체로켓인 2단을 개발하기로 했다.

    우주학과 정치학의 교묘한 만남

    2004년 9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한러우주기술협력협정 체결식.이 협정은 러시아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고 2007년 양국은 국회 비준동의를 받아 새로 ‘우주기술보호협정’을 발효시켰다.

    그런데 2001년 확정하고 2002년 시잔된 나로우주센터의 공사가 늦어져 나로호 1차 발사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8월 25일 이뤄지게 되었다. 후일담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실세들은 나로호 발사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정권 홍보 차원에서 러시아 우주선을 타고 국제우주정거장에 다녀오는 우주인(이소연 박사)을 만들고, 많은 돈을 들여 발사체를 쏘는 ‘우주쇼’를 한다고 보았던 것.

    이런 까닭에 나로호 후속 사업 등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KSLV-2에 들어가는 추력 75t의 액체로켓 개발 사업이 ‘타당성 검토’ 등을 이유로 계속 연기된 것이다. 이들의 인식은, 나로호 1차 발사에 쏠린 국민 관심이 대단한 것을 확인한 후 비로소 전환됐다. 이 시기 항우연은 미국으로부터도 의심을 받았다. 미국은 한국이 개발하는 나로호에 미국이 제공한 기술이 사용되는 것을 염려했다.

    앞에서 설명했듯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현무-2 탄도미사일을 만들었다. 현무-2에는 미국산 부품이 들어가는데, 미국은 ‘미국이 원하면 이 부품을 사용한 미사일을 만드는 곳을 항상 사찰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미국이 허가하지 않은 사업에 이 부품을 사용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고 수출했다. 미국은 현무-2에 사용된 고체로켓 부품이 나로호 2단에 사용됐는지 살핀다는 명목으로 수시로 국과연을 사찰했다. 국과연에서는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국과연이 비명을 지르면 항우연은 국과연을 위해 미국 부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우주 개발이나 첨단 무기 개발 등 국가 중요사업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미국은 결코 엉클 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미국은 타국과 맺은 협정이나 조약을 철저히 검증한다. 대상이 러시아나 소련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쿠바사태로 냉전이 치열하던 1963년 소련과 대기권과 우주, 바닷속에서는 더 이상 핵실험을 하지 않고 오직 지하에서만 한다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일명 모스크바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 조약 이행 여부를 살피기 위해 주기적으로 WC-135 기상관측기를 소련 근처로 띄워 소련의 핵실험을 감시했다.

    미국은 과연 ‘엉클 샘’인가

    핵무기를 겨누고 있는 적국에 대해 이 정도로 감시하니 동맹국이나 우방국에 대한 감시가 어떨지는 불문가지다. “미국이 세계 1위인 것은 이러한 감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단순한 대국이 아니라 초거대국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힘을 아는 사람들은 “국가 중요사업을 하다 보면 미국의 사찰이 너무 심해 정서적으로 반미주의자가 된다”는 뼈 있는 농담을 한다. 미국은 MTCR로 살펴보고, 한미미사일협정으로 살펴보고, 국과연을 사찰하면서 한국을 감시하는 것이다.

    MTCR과 관련해 가장 운이 좋은 나라는 일본이다. MTCR이 없던 시절에는 자유롭게 우주발사체 기술이 수출됐다. 그 시절 일본은 미국의 기술을 도입해 ‘뮤’와 ‘람다’란 이름의 고체로켓과 ‘N’이란 이름의 액체로켓을 만들었다. 원자력 분야에서도 일본은 미일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재처리공장을 짓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국은 ‘문이 닫힌 뒤 뛰어든’ 후발국인지라 평화적인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도, 우주발사체를 위한 로켓 개발도 제한을 받았다.

    러시아와 협력해 나로호를 발사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 항우연은 해상도 1m의 사진을 찍는 아리랑-2호를 중국의 장정(長征) 발사체에 실어 쏘아 올리기로 했다가 미국으로부터 크게 ‘한방’맞았다. 미국이 갑자기 ‘중국은 MTCR 회원국이 아니다. 미국산 부품을 쓴 제품은 미국이 허가해준 나라의 발사체로만 발사해야 한다. 중국은 미국이 허가한 나라가 아니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 깜짝 놀란 항우연은 MTCR 회원국인 러시아 발사체에 실어 아리랑-2호를 쏘아 올리기로 하고 러시아와 계약을 맺었다.

    과거 한국은 선진기술을 가진 외국 기업을 ‘선생’으로 정해놓고, 우리 연구진을 ‘도제’로 보내, 신제품을 공동 개발하는 방법으로 기술을 익혔다. 외국 기업이 만들어놓은 제품을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됐다는 이유로 배우고자 하면, 선생은 완성된 도면을 갖다 쓰라고 할 것이기 때문에, 도제는 ‘설계를 왜 이렇게 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신제품을 개발하면 선생은 ‘이 제품은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과 함께 설계하는 방법까지 보여준다. 도제는 설계의 모든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선생-도제 시스템을 통해 한국형 원자로인 OPR-1000과 한국산 고등훈련기인 T-50을 개발했다. 2004년 한국이 러시아와 비준이 필요 없는 ‘우주개발협력협정’을 맺은 것은 러시아의 흐루니체프 사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앙가라’라는 이름의 초대형 발사체를 개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흐루니체프를 상대로 170t 추력의 또 다른 로켓(나로호 1단)을 ‘선생-도제’ 방식으로 공동 개발하자고 해야, 한국은 흐루니체프가 앙가라에 적용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을 배울 수 있다. 흐루니체프로서는 2개 로켓을 개발해야 수지를 맞출 수 있는 만큼 이 제의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흐루니체프는 앙가라 로켓을 RD-191, 나로호용 1단 로켓을 RD-151로 명명했다.

    흐루니체프 사장 전격 교체

    로켓 설계는 단계를 나누어 진행한다. 첫 단계를 설계 제작해서 실험해본 후 문제가 없으면 다음 단계를 설계한다. 이 설계도로 제작해서 실험해본 후 문제가 없으면 다시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식이다. RD-191 로켓(앙가라)과 RD-151(나로호 1단)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로켓이다. 따라서 RD-191용으로 만든 부품을 RD-151에 적용할 때는 설계와 실험을 다시 해봐야 한다.

    그런데 러시아가 2005년 12월 갑자기 흐루니체프사 사장을 경질했다. 흐루니체프는 국영기업이기에 러시아 정부가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사장을 교체할 수 있다. 러시아 측은 사장 경질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흐루니체프 사장이 한국과 지나치게 밀착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러한 사단을 겪은 후 러시아가 국회 비준이 필요한 ‘우주기술보호협정’을 맺자고 주장하면서 나로호 사업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나로호에 실을 과학기술위성-2호는 한국이 제작하는 것이라 그대로 진행됐다. 이 위성은 예정대로 제작돼, 나로호 완성을 기다리게 되었다.

    우주기술보호협정이 발효된 후 흐루니체프사와의 협력이 재개되었다. 나로우주센터 공사가 끝난 2009년 나로호 1단을 갖고 한국에 온 흐루니체프 측은 사장 경질 사건 때문인지 그들이 머무는 시설과 나로호 1단이 있는 시설에는 한국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등 상당한 보안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로호가 2009년과 2010년 발사됐으나 아쉽게도 모두 실패했다.

    항우연과 흐루니체프는 심각한 대립 상태에 빠졌다. 먼저 손을 들고 나온 것은 흐루니체프였다. 나로호 1단이 성공하지 못하면 앙가라의 안전성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흐루니체프는 앙가라 개발에 사운(社運)을 건 처지였기에 나로호 3차 발사에 동의했다. 세계 최고라는 자사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항우연의 3차 발사 요구를 들어준 것이다. 마지막이 될 나로호 3차 발사는 2012년 10월로 일정이 잡혀 있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2번 발사에 실패함으로써 항우연은 우주발사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흐루니체프와 사고 원인을 찾기 위해 연구하면서, 만들어서 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수많은 노하우를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2020년쯤 1.5t의 진짜 위성을 띄우는 KSLV-2를 자력으로 만들어보자는 투지에 불을 붙였다. 나로호를 만들 때 항우연은 추력 30t짜리 액체로켓을 개발해 지상실험을 했다. 흐루니체프가 1단을 만들지 못할 것에 대비해 예비로 만들어본 것이다.

    이것이 KSLV-2를 위한 75t 추력의 액체로켓 개발을 추진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러시아는 더 이상의 기술은 전해주지 않는다 했으니 KSLV-2는 한국이 단독으로 만들어야 한다. 추력 30t 엔진은 75t 엔진을 만드는데 토대가 된다. 항우연은 75t 추력을 가진 액체로켓 4개를 묶어 300t(75t×4=300t)의 추력을 가진 1단을 구성하고, 1개로 2단을 만들고, 3단에는 7t의 추력을 가진 액체로켓을 올려 KSLV-2를 만들기로 했다. 75t 추력의 액체로켓 개발은 나로호 3차 발사가 완료된 후 본격화하기로 했다.

    실패가 가져다준 기회

    흐루니체프와 손잡고 나로호 사업을 하기 전인 2001년 한국은 나로호 발사장을 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발사장 선정에는 발사체 제작만큼 정교한 준비와 검토가 필요했다. 발사체의 성능과 특징은 어디를 발사장으로 정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발사체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외국의 발사장을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해본다.

    ‘지구에 있는 모든 물체는 지구 인력의 받는다’는 만유인력(萬有引力)을 발견한 이는 뉴튼이다. 지구가 생긴 이래 지구에서 생겨난 물체는 지구 인력을 이겨낸 적이 없었다. 거대한 엔진을 가진 비행기도, 폰 브라운이 만든 V-2 로켓도 지구 인력을 이겨내며 우주로 날아가지 못했다. 달(月)도 지구 인력권 안에 있으므로, 달에 착륙하는 것도 지구 인력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인류는 화성과 금성을 탐험하는 우주선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지구 인력을 극복하게 된다.

    강력한 지구 인력을 극복하려면 발사체는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발사되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대기(공기)저항이 거의 없는 대기권 밖인 지상 100km 이상으로 올라갔다면, 다른 기동을 할 수 있다. 대기권 밖은 공기 마찰이 없는 곳이니 지구 인력을 이겨내는 원심력만 있으면 떠 있을 수 있다. 원심력은 초속 7.8km(마하 23 정도)로 비행할 때 발휘되니 발사체는 위성을 매우 빠른 속도로 밀어주어야 한다.

    수직으로 올라가던 발사체는 지구 주위를 회전할 수 있도록 궤적을 꺾어 수평에 가깝게 비행해야 한다. 마하 20이 넘는 속도로 수직으로 올라가던 발사체가 수평비행을 하기 위해 자세를 수정하면 엄청난 압력을 받는다. 이를 높은 G(Gravity)를 받는다고 한다. 수직에 가깝게 올라가던 발사체가 자세를 트는 것을 ‘개다리 기동(Dog Leg Movement)’이라고 한다. 개 뒷다리가 무릎 부근에서 약간 꺾어져 있는데, 발사체가 그런 궤적을 그리며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개다리 기동을 할 때 발생하는 높은 G를 견뎌내지 못하면 발사체는 부러지면서 폭발한다.

    발사장과 地政學

    개다리 기동을 하기 전 발사체는 단(段) 분리를 한다. 1단의 연료를 소진하면 1단을 떼어내 무게를 크게 줄이고, 2단을 점화해 날아가는 것이다. 분리된 단들은 지구로 떨어진다. 공기 저항 때문에 파편화해 떨어질 수도 있고 그대로 떨어질 수도 있다. 덩치가 커서 파편화하지 못한 1단이 인구집중지역에 떨어진다면 큰 피해가 발생한다. 따라서 1단은 일반적으로 바다에 떨어지게 한다. 바다에는 각 나라가 주권을 주장하는 영해가 있으므로, 발사체를 쏜 나라는 어떻게 해서든 분리된 단을 공해(公海)에 떨어뜨려야 한다.

    이때 지나가는 배가 있으면 피해를 볼 수 있으므로, 발사가 임박하면 발사국은 국제해사기구(IMO) 등에 ‘단이 떨어질 공해를 항행금지구역으로 선포해줄 것’을 요청한다. 지나가던 비행기도 떨어지는 단과 충돌할 수 있으므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그 공역을 비행금지구역으로 선포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는 우주발사체를 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다. 반면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이러한 절차 없이 바로 발사된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 저궤도위성은 태양전지판을 가동하기 좋도록 지구의 남북극을 돌게 발사해야 한다. 대부분의 나라는 북반구에 있기 때문에 발사국은 정남(正南)으로 넓은 공해가 있는 곳을 발사장으로 정한다. 이러한 조건을 가장 잘 갖춘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열도 남쪽으로는 넓고넓은 공해가 있어 전 열도를 발사장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정지위성은 적도에 올려놓아야 하므로 적도에서 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러한 조건까지 고려하면 남미에 있는 프랑스의 해외 영토인 기아나의 쿠르 발사장이 최고다. 쿠르 발사장은 적도 바로 북쪽에 있고 ‘북대서양’이라는 아주 넓은 공해를 마주하고 있다.

    쿠르 발사장과 관련해 프랑스는 행운을 잡은 나라다. 쿠르 발사장이 있는 기아나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지배하자, 이 지역으로 건너가 살고 있던 프랑스인들이 기아나도 프랑스가 지배해야 한다며 일어났다. 이에 네덜란드인들은 ‘본국은 프랑스에 항복했어도 이곳에서는 그럴 수 없다’며 맞서 내전이 벌어졌다. 힘이 달린 네덜란드인들은 나폴레옹에 맞서고 있던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우주학과 정치학의 교묘한 만남
    영국은 즉각 군대를 보내 프랑스인들과 싸웠다. 이러한 와중에 나폴레옹이 붙잡혀 사망하자 기아나에서의 전쟁도 끝났다.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차지한 땅을 네덜란드인에게 내주지 않으려 했다. 영국도 그대로 눌러앉아 기아나 지역은 3등분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네덜란드 식민지 지역이 ‘수리남공화국’, 영국이 차지했던 지역은 ‘가이아나공화국’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자국 식민지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기아나 얻은 프랑스의 행운

    기아나가 최적의 우주발사장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아리안 발사체를 개발해오던 프랑스는 즉각 쿠르 지역에 발사장을 지었다. 지정학적, 자연적 조건이 너무 좋은 탓에 쿠르 발사장에서 올라간 아리안 발사체는 아주 높은 발사 성공률을 보였다. 그러자 기아나에 대한 투자를 늘려 그곳을 프랑스만큼 잘사는 곳으로 만들었다. 수리남과 가이아나공화국은 최빈국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프랑스령 기아나는 프랑스만큼 살게 된 것이다. 이로써 기아나 사람들은 독립을 포기해 기아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해외영토가 됐다.

    북반구에 있는 나라는 이러한 조건을 갖출 수 없으니 정남으로 공해가 펼쳐진 곳을 발사장으로 삼는다. 그런데 정남(正南)으로 공해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남으로 공해가 없는데 우주기술이 발전한 대표적인 나라가 이스라엘과 러시아다. 이스라엘은 남쪽에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이 있어 그곳에 단을 떨어뜨리지 않고서는 정남으로 발사체를 쏠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바다는 서쪽으로 터져 있다(지중해).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지브롤터 해협을 향해 쏜다.

    지브롤터 해협은 좁은 바다지만 국제해협이기에 공해(公海)다. 배가 많이 다니는 공해지만 이곳이 아니고는 위성을 쏘아 올릴 공간이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 위성은 남북극을 돌지 않고 적도와 남북극 사이를 비스듬히 돌아간다. 이스라엘 공군기지이기도 한 팔마힘 발사장은 사선으로 우주발사체를 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스라엘 위성은 일정하게 태양전지판을 가동할 수 없으니, 극궤도위성에 탑재한 것보다 더 큰 태양전지판을 탑재한다.

    이스라엘의 기막힌 발사 통로

    이러한 위성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 이 위성은 사선으로 발사됐기에 발사국인 이스라엘을 상공을 많이 돌아간다. 극궤도위성은 하루 2, 3번만 발사국 상공을 지나가는데, 이 위성은 각도를 조금 틀어주면 14.5바퀴를 모두 이스라엘을 지켜보며 돌 수 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주변국들을 더 정밀하게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비슷한 길을 걸으려다 포기한 나라가 북한이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함경남도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동해로 대포동-1호(백두산)를 발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북한에 대한 탐지능력을 감추기 위해 대포동-1호 궤적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때 왜 북한은 동해로 대포동-1호를 쏘았을까. 그 이유는 북한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

    무수단리에서 정남으로 발사체를 쏘면, 일본 영공을 넘어가면서 단을 떨어뜨려야 하니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동쪽이라면 해볼 만했다. 일본의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 섬 사이에는 ‘소야(宗谷)해협’이 있다. 이 해협은 폭이 좁지만 국제해협이어서 공해로 분류된다. 무수단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해는 소야해협이 유일하기에 북한은 이 해협을 향해 대포동-1호를 쏘았다.

    대포동-1호 3단이 제대로 점화해 광명성-1호를 지구 궤도에 올려놓았다면 광명성-1호는 이스라엘 위성과는 반대 방향으로 지구를 사선으로 돌아가는 위성이 되었을 것이다. 북한은 무수단리 발사장에서 같은 방향으로 대포동-2호를 두 번 더 발사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때마다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하는 등 강력히 반발했다. 일본은 북한이 대포동 발사를 위장해 탄도미사일을 쏘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 때문에 “북한이 미사일 공격을 할 조짐을 보이면 선제사격을 하겠다”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북한은 정책을 바꾸었다. 평북 철산군 동창리는 북한이 정남으로 발사체를 쏠 경우 공해에 단을 떨어뜨릴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북한은 동창리에 새로운 발사장을 지어 2012년 4월 은하-3호를 쐈으나 실패했다. 동창리 발사장에서 북한이 은하-3호를 쏠 경우 1단은 한국의 서해안, 2단은 필리핀 부근에 떨어지는데, 자칫 잘못하면 한국과 필리핀의 영해에 추락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한국과 필리핀은 강력히 반발했다. 한국의 국방부 장관은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군 유도탄사령부를 방문해 “북한이 위험한 행동을 하면 한국의 미사일을 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북한이 동창리 발사장 만든 이유

    이러한 사실은 북한이 마땅한 발사장이 없어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미사일 개발 의지가 매우 강한데 지정학적 조건이 나빠 문제인 것이다. 이 때문에 발사장 사정이 좋은 이란, 파키스탄 등과 미사일 협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남북통일이 되면 무수단리와 동창리 발사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문가들은 두 발사장을 나로우주센터보다 지정학적 조건이 열악하므로 폐쇄하고 다른 용도로 써야 한다고 대답한다.

    우주 개발 선진국인 러시아와 중국도 발사장 문제로 고민이 많다. 러시아는 남쪽으로 중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해 있어 마음대로 발사체를 쏘지 못한다. 굳이 쏜다면 1단이 러시아 영토에 떨어지게 해야 한다. 1단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에 떨어뜨려야 하므로 그러한 조건을 갖춘 발사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북쪽으로 북극해를 마주하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북쪽으로 발사체를 쏠 수 있도록 몇 개의 발사장을 만들었다. 북쪽으로 발사체를 쏘는 발사장은 과거 미국을 향한 ICBM이 배치됐던 곳이다. 북한의 지정학적 조건이 발사장 건설에 불리했듯이 러시아도 지정학적 조건이 발사장 짓기에 미국보다 불리했던 것이다.

    중국도 러시아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중국은 남중국해라는 넓은 바다에 접해 있지만 자국 발사체에서 분리된 1단이 바다에 떨어지면 미국이 회수해 갈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자국 영토에 1단이 떨어지도록 발사장을 북쪽에 만들었다. 1단은 황무지에 떨어져야 한다는 조건도만족시켜야 하므로 중국의 발사장도 제한된다.

    이러한 중국이 경제가 발전하자 변모했다. 중국의 최남단인 하이난(海南)도에 새로운 발사장을 지은 것이다. 하이난도에서 발사된 발사체는 남중국해 남쪽에 1단을 떨어뜨리는데 이곳에는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필리핀 그리고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국명 난사군도(南沙群島, 영어 이름은 스프래틀리 제도)가 있다. 중국이 도련 전략에 따라 난사군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남중국해 전부를 내수화하는 것은, 하이난도 발사장을 의식한 측면도 있다.

    정지위성 발사까지 고려할 경우 발사장은 적도 부근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은 미국도 갖추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시추선을 이용해 적도에서 정지위성을 올리는 시론치(Sea Launch) 사업을 펼쳤다. 이렇듯 발사장을 짓는 데는 나라마다 다른 지정학적 조건이 크게 작용한다. 다른 나라로 둘러싸인 영토가 작은 내륙국은 우주 개발 기술이 발달해도 주변국을 설득하지 못하면 발사체를 만들어도 자국에서 발사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처지에서 최고의 발사장은 어디일까. 정남으로 가장 넓은 공해가 터져 있는 곳은 제주도 남쪽에 있는 마라도다. 마라도는 발사장으로 쓰기에 적당한 0.3㎢의 면적을 갖고 있다. 주변이 다 바다이므로 배의 출입을 금지해놓으면, 발사체가 추락해도 사람은 피해를 보지 않는다. 마라도에서 쏜 발사체는 오키나와 부근의 공해를 통해 남극으로 날아가므로 1단 분리에도 어려움이 적다.

    발사체를 통제하는 발사통제동은 안전을 위해 발사장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설치한다.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장과 발사통제동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2km다. 마라도에서 제주도까지의 직선거리는 9km 정도인데, 이는 발사장과 발사통제동 사이의 거리로도 적당하다. 제주시 대정읍에는 송악산이라는 ‘오름’이 있고 인근엔 대일항쟁기 때 일본 육군이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항공기의 중간 기착지로 사용한 ‘알뜨르비행장’이 있다(알뜨르는 ‘아래 뜰’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광복 후 알뜨르비행장은 국가 소유(국방부)가 됐으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금은 주민들이 이곳에서 자유롭게 경작하고 있다.

    날아간 꿈, 제주우주센터

    우주학과 정치학의 교묘한 만남
    1990년대 들어 군은 제주 남방 방어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제주에 해군 기동전단을 위한 기지를 짓기로 했다. 그리고 공군력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알뜨르를 비행장으로 다시 바꾸는 것을 검토했다. 제주공항은 한국에서 가장 붐비는 비행장 중 하나다. 부산의 김해공항을 제치고 인천, 김포에 이어 외국인이 세 번째로 많이 찾은 국제공항이기도 하다. 제주공항이 붐비자 제주도는 또 하나의 공항 건설을 추진했다. 이 공항은 서귀포 쪽에 있는 것이 나을 듯했다. 제주도의 이러한 필요성과 공군의 필요성 등이 합쳐져 알뜨르를 새 비행장으로 만드는 안을 검토했다.

    우주센터를 운영하려면 인근에 비행장이 있는 것이 좋다. 미국의 반덴버그와 케이프커내버럴 우주센터도 공군기지를 끼고 있다. 이 때문에 알뜨르에 민항기와 군용기가 함께 뜨고 내리는 공항을 만들고, 그곳에 가까운 송악산에 발사통제동을 지어 우주센터로 삼는다는 계획이 만들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송악산은 민간 회사에 의해 관광단지로 만든다는 계획이 수립돼 있었다. 주민들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의 섬인 제주도에 공군기지와 우주센터가 들어서는 것에 반대한다고 외쳤다.

    10번째 우주클럽 가입국

    그로 인해 제주 우주센터 건설과 새 공항을 겸한 공군기지 건설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안을 찾아나선 항우연은 적극적으로 우주센터 유치를 희망한 전남 고흥군의 외나로도를 선택했다(2001년). 제주도를 포기한 상태에서 외나로도는 최적의 장소였기에 공사에 들어가 2009년 센터를 완공했다. 지금은 추가 예산을 투입해 나로호보다 훨씬 큰 KSLV-2도 쏠 수 있도록 개조하는 사업을 펼치려 한다. 나로센터에 투자된 돈은 2조 원이 넘기 때문에 제주도가 제주우주센터를 지어달라고 해도 항우연은 제주센터를 짓지 않는다.

    나로우주센터 완공 후 한국은 세계에서 9번째로 자력으로 인공위성을 올리는 나라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아홉수’는 험난했다.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의 나로호 발사가 실패한 것. 나로호 2차 발사(6월 10일) 실패 닷새 뒤인 2010년 6월 15일 이란의 사피르 발사체가 라사드-1호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아홉수는 한국과 아홉 번째 위성 발사국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이란이 먼저 차지한 것이다. 사피르는 북한의 은하-3호를 토대로 설계됐다. 이란과 북한은 미사일-발사체-잠수함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란군이 보유한 샤하브-3 미사일은 북한의 노동미사일을 변형한 것이다. 2010년 3월 CHT-02D 어뢰를 쏴 한국의 천안함을 격침시킨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은 이란에 수출돼, ‘가디르급 잠수정’이 되었다. 이란이 사피르 발사에 성공한 후 올해 4월 북한은 은하-3호를 쏘았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란이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북한은 조만간 은하-3호의 추가발사를 준비할 것이다.

    남북한의 위성 띄우기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2012년 가을 한국은 나로호 3차 발사를 시도한다. 한국은 열 번째로 우주클럽에 들어가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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