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우주 개발은 이토카와 히데오라는 천재의 고집으로 시작되었다.
- 이토카와는 전범(戰犯)국가 일본이 받을 수밖에 없는 제한을 애국심과 지혜로 뚫고 나간 사람이었다. 이토카와가 우주로 가는 길을 열자 과학기술청이 나서서 강력한 액체로켓 개발에 도전함으로써 일본은 미국 유럽과 더불어 액체 수소로켓을 발사하는 최고의 우주 선진국이 되었다.
- 지금 일본은 안보를 위해 우주 기술을 활용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1941년 도쿄제국대학의 조교수로 임용된 이토카와는 1948년부터 정교수로 활동했다. 전후 일본이 항공 개발에 제한을 받자 그는 바이올린을 연구하며 유유자적했다. 1953년 약 6개월간 미국을 둘러보고 돌아와서는 도쿄대에 5명의 회원으로 로켓연구클럽을 만들고 일본 정부에 로켓 개발 허용을 요구했다. 1958~59년이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으로 지정된 점에 착안해, 연구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명분으로 로켓 개발을 추진한 것.
클럽 활동이 본격화되자 이토카와는 1954년 2월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이하 생기연)에 AVSA(Avionics and Supersonic Aerodynamics·항공전자 및 초음속 공기역학) 연구반을 만들었다. 이 연구반은 1975년까지 태평양을 20분에 주파하는 ‘하이퍼소닉 수송기’개발을 목표로 했다. 이토카와는 로켓 개발에 관심조차 없던 정부와 기업을 설득해 연구에 투자하도록 만들었다.
이토카와의 펜슬로켓
1954년 부족한 예산으로 다양한 소형 로켓을 개발해 연소시험을 했다. 그때 탄생한 것이 직경 1.8cm, 길이 23cm, 무게 200g의 펜슬로켓이다. 펜슬로켓에는 더블베이스 추진제, 즉 무연화약이 사용되었다. 무연화약은 니트로글리세린과 니트로셀룰로오스를 주성분으로 하고 안정제와 경화제를 혼합 압축시켜 만든 것이었다. 펜슬로켓의 첫 수평발사는 1955년 3월 11일, 고쿠분지역 근처의 총기공장 권총사격장에서 있었다.
4월 12일에는 정부 관계자와 언론이 참가한 가운데 공개 시험발사를 실시했다. 1.5m의 발사대에서 수평으로 발사된 펜슬로켓은, 연구진이 세워놓은 종이스크린을 뚫고 나가 그 뒤에 있던 모래더미에 박혔다. 이후 연구진은 1개월 이상 시험을 계속하며 실제 비행을 위한 사전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리고 지바에 있는 생기연에서 50m 길이의 선박실험용 수조 안에서 300mm의 2단형 펜슬로켓 수평발사시험을 실시했다.
그 후의 시험은 아키타현의 미치카와(道川) 해안에서 했다. 미치카와는 1955년 8월부터 1962년 사이 일본 로켓 기술 발전의 근거지로 자리매김했다. 1955년 8월 6일 미치카와에서 처음으로 펜슬-300 로켓의 경사 발사가 있었다. 이 로켓은 고도 600m, 거리 700m를 16.8초간 비행했다. 펜슬로켓 다음은 베이비로켓이었다. 이 로켓도 직경 8cm, 길이 120cm, 무게 약 10kg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베이비로켓은 2단식의 무연화약 고체로켓으로 S형, T형, R형의 세 모델이 만들어졌다.
이 로켓들은 1955년 8월부터 12월 사이 발사되었는데, 고도는 6km 정도에 달했다. 베이비로켓-S형에는 스모크 파우더를 섞은 추진제를 넣어 연기가 나게 함으로써, 궤적을 추적해 비행 성능을 확인했다. T형에는 일본 최초로 원격측정장비를 탑재했다. R형을 통해서는 탑재기기의 회수에 성공했다. 베이비로켓의 시험발사가 모두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2단 추진장치가 점화되지 못했고, 진공관에 문제가 발생했다. 로켓 앞쪽에 장착한 관측카메라가 제일 중요한 영상을 찍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실패를 극복해나가면서 로켓 기술의 걸음마를 착실히 배워나갔다.
펜슬 아닌 진짜 로켓으로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 다가오면서 로켓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 프로젝트에는 지구상 9개소에 관측지점을 세운다는 것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일본이 맡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토카와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빨리 관측용 로켓을 완성시켜야 했다. 베이비로켓의 성공을 확인한 이토카와 팀은 실물 로켓인 ‘카파(Kappa)’개발에 돌입했다.
이토카와 팀은 순차적으로 로켓을 대형화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펜슬, 베이비로켓 이후에는 알파, 베타, 카파로켓을 개발하며 노하우를 쌓은 후, 오메가로켓으로 고도 100km를 정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제지구물리관측년까지 시간이 촉박해, 바로 카파로켓으로 고도 100km에 도달하기로 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고도 100km에 도달한 로켓을 만들었는데 이 로켓은 모두 액체추진제 로켓이었다. 일본은 액체추진제 기술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기에 이토카와 팀은 고체엔진을 만들어 고도 100km에 도달해보기로 했다. 고체엔진으로는 추력이 부족하니 몇 개 엔진을 모아 부스터처럼 카파로켓에 붙여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연소 화력이 너무 강력해 분사노즐이 녹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문제는 노즐의 재질을 강화하면 해결되지만, 그러면 중량이 늘어나 상승고도가 낮아진다. 이 때문에 이토카와 팀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강화플라스틱제 노즐을 채택하기로 했다.
로켓 본체도 재설계해 공기저항을 줄였다. 본체는 강도 높은 허니콤 구조의 알루미늄 재질을 선택했다. 컴퓨터 설계기술이 없어 수동식 계산기에 의존해 설계해야 했다. 연구자들은 수치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는 고된 정신노동을 반복한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카파로켓은 고도 100km에 다다를 수 없었다. 이토카와 팀은 로켓을 기구에 매달아 하늘 높이 띄운 후 창공에서 점화하는 ‘라쿤’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창공에는 돌풍 등 통제할 수 없는 숱한 변수가 있어 포기했다.
결국 추진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더 이상 고도를 높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카파-4형까지에는 더블베이스 추진제를 사용했는데 이것 대신 새로운 복합추진제를 개발해 사용해보기로 했다. 복합추진제는 고분자화합물에 과염소산 암모니아를 혼합해 로켓연료실에 수납하는 것으로 무연화약보다 더 큰 추력을 얻을 수 있다.
복합추진제는 우주 개발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막 개발한 것이었기에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연구진은 폭발을 불러오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끈질기게 연구해 복합추진제를 사용하는 카파-6형을 만들었다. 카파-6형은 고도 60km 정도까지만 올라갔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상승으로도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 요구한 상층 대기 관측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었기에 일본은 한숨을 돌렸다.
그때 고도 60km까지 로켓을 올린 나라는 미국과 소련 영국 그리고 일본뿐이었다. 카파-6형은 21기가 발사되었다. 1960년 7월, 카파-8형이 처음으로 고도 200km를 넘어 전리층의 F층에 도달했다. 본격적인 우주 관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자, 세계가 일본의 우주 개발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일본은 카파로켓 19기를 유고슬라비아와 인도네시아에 수출하게 되었다.
카파로켓, 대기권 넘어서다
일본 우주 개발의 아버지 이토카와 교수.
빈약한 발사장에서 도달고도를 높인 로켓을 시험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사고가 입증해주었다. 1962년 5월 24일 카파로켓-8형 10호가 발사 직후 추락해 2단이 폭발하면서 파편이 흩어지고 화재가 발생했다. 부상자는 없었지만, 이 사고로 미치카와에서의 실험은 중지되고 말았다.
이토카와 팀은 펜슬로켓 발사 성공 후부터 태평양을 향해 로켓을 안전하게 발사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새로운 로켓의 메카로 가고시마(鹿兒島)현 오스미(大隅)반도의 우치노우라(內之浦)가 선정돼, 카파로켓-8형 10호가 사고를 내기 전인 2월 2일 기공식을 했다. 미치카와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발사장으로 선정된 우치노우라는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폭적인 지원을 해 발사장 이전 작업이 빨라졌다.
우주 개발의 가능성이 엿보이자 다양한 기관이 탄생했다. 1963년 과학기술청이 항공우주기술연구소(NAL·National Aerospace Laboratory)를 설치해 기초연구에 착수했다. 과학기술청은 1964년 우주와 관련된 항공기술만 연구하는 우주 개발추진본부도 만들었다. 로켓 개발을 주도하던 도쿄대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1964년 생기연의 이토카와 팀과 항공연구소가 합병해 우주항공연구소(ISAS·Institute of Space and Aeronautical Science)를 출범시킨 것이다.
정부의 우주 개발 참여 이끌어내
로켓의 시대도 바뀌고 있었다. 29개종이 개발된 카파로켓 시대는 종료하고 람다(Lambda)로켓 시대가 열렸다. 람다로켓은 2000km 고도 도달을 목표로 했기에 위성을 올리는 초보적인 플랫폼으로 충분했다. 문제는 4단으로 구성된다는 점이었다. 단이 너무 많다 보니 단 분리에 문제가 있어, 람다는 4차례나 발사에 실패했다. 단 분리를 한 다음에는 궤도를 수정해야 하는데, 궤도를 수정하는 유도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도장치는 로켓 개발 시 필수 요소다. 그러나 일본은 정치적인 이유로 유도장치 개발에 제한을 받았다. 탄도미사일 유도로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유도장치를 개발하지 못해 실패를 거듭할 때 미국과 소련은 인공위성은 물론이고, 유인 우주비행까지 성공했다. 프랑스도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이로써 유도장치 없이 다단계 발사체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일본은 줄기차게 도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을 거뒀다. 1970년 2월 11일 비유도방식의 고체로켓인 람다(L)-4S 5호가 올라가 인공위성 ‘오스미(おおすみ)’를 지구 궤도에 띄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24kg에 불과한 초소형 인공위성 발사였지만, 일본은 소련과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자력으로 위성을 띄운 국가가 되었다.
람다-4형은 9번 발사돼 5번 실패했다. L-4S는 1966년 9월 26일 최초로 발사되고 1974년 9월 1일 마지막으로 발사됐다. 그리고 일본은 뮤(Mu) 로켓 개발에 들어갔다. L-4S의 기술을 바탕으로 뮤 로켓의 초기형인 M-4S를 개발했으나 1호기는 발사에 실패했다. 뮤 로켓에도 유도제어장치를 탑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도제어장치 없이 계산만 정확해도 발사에 성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기상과 풍향 변화가 극심하므로 정확한 계산은 소용없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은 엔진 성능 개량에 집중했다. 그리고 유도제어장치 사용이 허가돼 ‘추력편향제어장치(TVC·Thrust Vector Control)’를 장착하게 됨으로써 뮤 로켓의 정밀도는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이 연구도 이토카와 박사가 이끄는 도쿄대학의 우주항공연구소(ISAS)가 주도했다.
고체연료를 향한 우주항공연구소의 고집 덕에 1985년 새로운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전장 27m의 M-3S-2 로켓으로 핼리혜성 탐사기인 ‘스이세이’를 중력권 밖으로 발사시킨 것이다. 일본은 세계 최초로 고체추진 로켓으로 지구 중력권을 넘어서는 데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M-3S-2의 성공으로 안전성이 증명된 뮤 로켓으로 일본은 20기 이상의 위성을 발사했다. ‘하큐초’‘히노토리’‘아케보노’‘히덴’ 등 주요 과학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돼, 중요한 데이터를 갖고 지구로 귀환했다. 1990년대에 뮤 로켓은 M-5라는 세계 최대의 고체로켓으로 발전했다.
도쿄대 ISAS가 고체로켓을 발전시키는 사이 과학기술청의 우주 개발추진본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연구를 했다. 20여 명의 연구진으로 시작한 우주 개발추진본부는 도쿄대에서 제공받은 고체로켓을 바탕으로 LS-A 로켓(고체로켓과 액체로켓을 연결한 2단식 로켓)을 개발해 시험발사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나 노하우를 축적해 LS-A의 발사를 성공시키고 이어 LS-C로켓을 개발했다. 또 NAL-6, NAL-16과 SA, SB 등 ‘S 시리즈’ 로켓을 발사하기도 했다.
우주 개발추진본부는 1969년 10월 1일 우주 개발사업단(NASDA)이라는 과학기술청 산하의 특수법인으로 바뀌었다. 개발사업에 힘이 실린 것이다. 추진본부 시절에는 방위청의 니이지마 시험장을 사용했지만, 1968년부터는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우주센터를 건설해 조직적으로 우주 개발을 하게 되었다. NASDA의 목표는 단순하고 명백했다. 문부성 소관의 도쿄대 ISAS와는 달리 상용(商用) 로켓 실용화를 목표로 잡았다.
양 조직의 관할도 정해졌다. 직경 1.4m 이하의 과학로켓은 ISAS가 맡고, 1.4m 이상의 대형 로켓은 NASDA가 담당하는 것. 1981년 도쿄대학의 ISAS는 문부성 산하 우주과학연구소(역시 준말은 ISAS)로 바뀌었다. 그렇게 된 이후에도 ISAS와 NASDA 간의 경쟁은 계속되었다. 우주 개발을 놓고 문부성과 과학기술청은 계속 경쟁하게 된 것이다.
상용 로켓 개발에 나선 NASDA
새로 발족한 NASDA는 5년 이내에 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실용 로켓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72년까지 150kg의 위성을 고도 1000km에 올리겠다’는 Q계획과 ‘1974년까지 100kg의 정지위성을 발사한다’는 N계획을 입안한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액체로켓을 개발한다는 엄청난 목표도 세웠다. 경험이 일천한 NASDA로서는 이루기 힘든 목표였지만 개발계획은 의외의 도움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미일우주협정에 따라 미국의 액체로켓 기술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로켓 기술을 보유하면 탄도미사일을 손쉽게 개발할 수 있다. 일본은 ISAS를 통해 고체로켓을 자력으로 개발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일본을 관리감독하에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이전해주고 일본의 로켓 개발 전체를 관리감독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미국은 일본과 우주협정을 맺고 미국 우주 개발의 견인차 역할을 한 액체연료 로켓인 ‘델타’기술을 전수해주기로 했다.
이에 따라 NASDA는 Q-N 계획을 정지위성을 올리는‘신N계획’으로 수정했다. 신N계획에 따른 제1세대 로켓이 N-I인데, 이 로켓 제작은 미쓰비시가 맡게 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기술을 도입하되 일본 기술을 결합해 1970년부터 3단의 N-1 로켓을 개발하기로 했다. N-1 로켓에서 1단과 3단은 미국 델타로켓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2단만큼은 우주 개발사업단 시절의 NASDA가 Q계획으로 개발한 LE-3 엔진을 개발해 만들기로 했다.
N-1 로켓으로 정지위성 띄워
2단으로 쓸 액체로켓을 자체 개발하기로 함으로써 일본은 뒤떨어져 있던 액체로켓 기술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것이 직경 2.4m, 전장 34m의 N-1 로켓인데, 이 로켓이 1975년 9월 9일 1호 발사됐다. N-1 1호는 100kg급의 기술시험위성인 ‘기쿠(きく)-1호’를 정지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N-1은 거듭해서 시험용 정지위성을 쏘아 올리다, 1977년 본격적인 정지위성인 ‘기쿠-2호’를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정지위성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N-1 로켓은 1982년까지 7번 더 발사돼 6개의 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렸다.
일본 기술이 포함됐다고 하지만 N-I은 엄밀히 말하면 미국제 델타로켓을 면허생산한 것이었다. 당시 선진국에서는 300kg 이상의 대형 정지위성을 띄우고 있었으니 최대 발사중량 130kg인 N-1 로켓으로는 선진국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에 따라 N-2 로켓 개발이 시작됐는데, 짧은 시간 내에 국산화가 어렵다고 판단한 일본은 역시 미국 기술에 의존해 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별도로 자국산 액체로켓인 H-1 개발에 착수했다. N-1 발사로 NASDA는 발사 기술, 개발 플로와 기술 실증방법, 프로젝트 관리기법 등 로켓 개발의 전반을 학습할 수 있었으므로 H-1 개발에 도전해볼 만했다.
1976년부터 개발에 들어간 N-2로켓의 직경은 2.4m로 N-1과 같지만 길이는 36m로 길어졌다. N-2는 350kg짜리 위성을 정지궤도에 쏘아 올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81년 2월 11일 N-2로켓1호가 ‘기쿠3호’ 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N-2로켓은 1987년까지 모두 8기가 발사되었다.
델타로켓은 중거리탄도미사일 기술을 채용하고 있어, 미국은 완성부품을 제공했다. 완성부품을 받아 N-1과 N-2를 조립했으니 일본이 액체로켓 기술을 이전받는 효과는 미미했다. 따라서 자력으로 만들기로 한 액체로켓 H-1 개발에 집중해야 했다. N로켓 제작으로 확보한 기술자와 예산을 H-1 개발에 집중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1981년부터 시작된 H-1 사업은 1차로 2단과 3단 로켓, 그리고 관성유도장치의 국산화를 목표로 했다. 2단 로켓은 재점화 능력을 갖춘 자국산 LE-5 엔진을 채용하고, 3단은 닛산의 UM-129A 모터를 채택했다. 그러나 1단은 여전히 미국산이었다. 따라서 H-1은 여전히 델타로켓의 기술을 도입한 기종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국산화율은 높아져, N-2에서 54~61%이던 것이, H-1에서는 78~98%에 달했다.
500kg급 위성을 정지궤도에 투입할 수 있는 H-1 발사체는 1986년부터 1992년까지 9기가 발사되었다. ‘사쿠라-3호’ 통신위성, ‘히마와리-4호’ 기상위성, ‘푸요-1호’ 자원위성 등이 정지궤도에 올라갔다. NTT로 약칭되는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는 1980년대 초반부터 2t 이상의 통신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으로 보다 큰 발사체 개발 필요성이 제기돼 1986년부터 H-2 개발이 시작되었다.
국산화의 최대 목표로 1단용인 LE-7 엔진의 개발이 추진됐는데, 시험 도중 이 엔진이 폭발해 1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자중(自重)의 60배에 달하는 추력을 낼 수 있는 LE-7을 개발해냈다. 1단에 붙이는 고체 보조로켓인 부스터까지 국산화했다. 일본은 H-2라는 명실상부 자국산 발사체를 갖게 된 것이다.
직경 4.0m, 길이 49.9m에 달하는 H-2 발사체는 3.8t의 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H-2 는 1994년 2월 4일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시킨 후 1997년까지 총 5기를 성공적으로 발사시켰다. H-2 발사체는 ‘히마와리-5호’ 기상위성, SFU 우주실험관찰위성, ‘미도리’ ADEOS 지구관측위성, COMETS 방송통신 실험위성, TRMM 열대강우 측정위성 등을 정지궤도에 진입시켜 일본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고비용 극복하고 주문식 발사
그러나 5호와 8호가 발사에 실패하고 7호가 취소되는 등 난관에 봉착했다. 더 큰 문제는 발사비용이 매우 비싸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이 개발한 ‘아리안’이 100억 엔 미만의 비용으로 발사되는데, H-2는 190억 엔을 사용했다. H-2는 상용 위성을 표방했지만 국제경쟁력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급격한 엔고(高)가 보태져 H-2는 경쟁력을 상실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H-2A 개발이 추진되었다. H-2A 발사체는 비용통제를 위해 H-2를 재설계해 구조를 단순화했다. 국산화에 집착하지 않고 해외의 저가부품을 채용하기로 했다. 1996년 시작된 H-2A의 개발비는 약 1532억 엔을 기록해, 델타-4 발사체 개발에 들어간 2750억 엔이나 아틀라스-5의 2420억 엔보다 훨씬 저렴했다. 구성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발사비용도 85억~120억 엔이 됐다. 최대 190억 엔이던 H-2에 비하면 대단한 경제성을 갖춘 것이다.
H-2A의 최대 장점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발사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발사 능력은 고체로켓 부스터(SRB)와 고체 보조로켓(SSB)·액체로켓 부스터(LRB)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 H-2A는 최대 5.8t을 정지궤도로 올릴 수 있었다. 최대 발사중량이 H-2의 약 1.5배가 된 것이다. 2001년 여름, 시험1호기가 발사에 성공하면서 H-2A는 일본의 중심 발사체로 자리 잡았다.
H-2A의 개발로 엄청난 발전을 이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2000년대 초까지 일본의 우주 개발은 많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야심 차게 계획한 화성탐사선 ‘노조미’는 궤도 투입에 실패했다. 2003년 11월 29일에는 H-2A 6호가 정보수집위성(정찰위성)을 올리기 위해 발사됐으나 문제가 발생해 통제실의 지령으로 공중 폭파되었다.
이러한 실패에 즈음해 행정개혁의 물결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우주 관련기관의 통폐합을 검토했다. 우주 개발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문부성과 과학기술청이 통합돼 문부과학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ISAS와 NASDA, NAL 등이 통합돼 2003년 10월 1일 독립행정법인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Japan Aerospace eXplo-ration Agency)가 발족했다.
JAXA의 발족에 앞서 또 다른 움직임이 일어났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하자, 일본 정부는 정찰위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1969년 중의원이 ‘우주의 개발 및 이용의 기본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우주 개발은 군사 목적 이외로 한정한다’고 해놓았기에 군사용 위성은 만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JAXA 관련법의 목적을 ‘모든 분야에서 평화 목적에 한정한다’로 바꾸고 업무 범위도 우주 개발과 연구, 인공위성의 개발과 발사로 수정했다.
군사위성 보유 합법화한 일본
법률적 제한을 바꿈에 따라 일본은 정찰위성을 ‘정보수집위성’으로 바꿔 부르며 2003년부터 발사 준비에 들어갔다. H-2A로 발사될 정보수집위성은 광학(光學)위성과 레이더영상(SAR)위성을 한 조로 편성했다. 광학위성은 초망원 디지털카메라를 장착해 주간 촬영을 담당한다. 광학-1호와 2호까지는 해상도가 1m 수준이었고, 광학-3호에서는 60cm급으로 높아졌다. 조만간 발사할 예정인 광학-5호는 40cm급 해상도를 갖는다. 이는 상업위성 가운데 세계 최고의 해상도를 자랑하는 지오아이(GeoEye)-1의 해상도를 능가한다. 레이더영상위성은 1호에서 3호의 해상도는 1~3m 정도였지만, 2011년 발사된 4호부터는 1m 급으로 향상되었다.
첫 번째 조인 광학-1호(IGS-1A)와 레이더-1호(IGA-1B)는 H-2A 5호에 실려 2003년 3월 28일 발사됐다. 광학-2호와 레이더-2호를 실은 H-2A 6호는 같은 해 11월 9일 발사됐으나 단 분리 실패로 지령을 내려 공중 폭파시켰다. 2011년 말까지 일본은 광학-4호(IGS-6A), 레이더-3호(IGS-7A)를 발사해 총 7대의 정보수집(정찰)위성을 갖게 되었다. 2016년에는 광학-6호, 2017년에는 레이더-6호를 발사할 예정이다.
일본은 2008년 5월 ‘방위목적의 군사이용을 허용하고 자위대가 최첨단 전용 위성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우주기본법’을 제정했다. 일본 중의원은 올해 6월 15일 JAXA법 개정안을 가결하면서, JAXA의 활동을 평화 목적으로 한정한다는 규정을 삭제하고 ‘국가의 안전 보장에 도움이 되도록 진행되어야 한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국제우주정거장과 도킹 성공
H-2A 발사체는 2001년 이후 21회 발사해 20번 성공(95.2%)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아틀라스-5(미국)의 96.4%, 아리안-5(유럽)의 94.9%에 필적하는 성공률이다. H-2A 21호는 올해 5월 18일 한국의 아리랑 3호를 저궤도에 올림으로써 처음으로 해외 상업위성을 발사해주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8t을 올려 보낼 수 있는 H-2B 발사체도 만들었다. 2009년 9월 10일 H-2B로 국제우주정거장으로 보급품을 보내줄 무인 우주화물선 HTV(H-2 Transfer Vehicle)-1 ‘고우노토리(こうのとり)-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2011년 1월 22일 H-2B로 발사한 HTV-2도 우주정거장과 도킹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HTV보다 한발 나아간 재사용이 가능한 우주왕복수송기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위성 분야에서도 노하우를 축적했다. 2010년에는 2003년 발사한 소행성 탐사선 ‘하야부사’가 소행성의 샘플을 채취해 귀환함으로써 달 이외의 천체 샘플을 가져온 최초의 탐사선이 되었다. 2008년에는 국제우주정거장에 일본의 시험모듈인 ‘기보(希望)’를 완성하고 교대로 우주인을 보내 각종 실험을 하고 있다. 고집스럽게 우주 개발을 추진해온 덕에 일본은 미국과 러시아, EU, 중국과 함께 우주 개발 선진국이 된 것이다.
일본은 전범국가이기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든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비군사적인 발사체 개발에 노력했다. 그 결과 상당한 기술을 축적해, 우주를 군사적인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는 우주를 통해 안보를 지키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주를 향한 일본의 도전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