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휠라와의 인연으로 평생 사업파트너가 된 호머 알티스(뒷줄 가운데)와 필자(맨 왼쪽)
나는 의사가 되고자 서울대 의과대학을 지원했으나 2지망을 했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치의예과에 합격해 반(半) 학기를 다닌 경험이 있다. 삼수 끝에 한국외대 정외과에 다시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친구에게 ‘커닝’을 시켜주다 발각돼 1년 정학을 당했다.
되는 게 아무것도 없던 20대 시절, 궁여지책으로 지원한 카투사에 복무하면서 영어를 배웠는데, 이게 나중에 큰 도움이 됐다. 제대하고 복학하자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닌 이들보다 무려 6년이나 늦게 대학을 졸업하게 됐다.
나이 서른에 대학 졸업장을 받고 나와 몇 군데 취직원서를 넣었지만, 나이가 많다 보니 번번이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해운공사 문을 두드렸는데, 카투사 시절 배운 영어실력 덕분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런데 직장생활 2년여를 넘기자 그 무렵 젊은이들이 대개 그랬듯 해운업보다는 국제무역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JC페니(Penney)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매 체인망을 갖고 있던 회사에 입사했다.
극과 극의 희비
이 회사에 들어가보니 당시 인기 수출품목으로 각광받던 섬유제품들은 이미 입사한 분들이 다 맡고 있어 새로운 분야를 찾아내는 게 내 몫이 됐다. 다시 말해 하드라인(hardline) 개발을 떠맡은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수출할 만한 하드라인 제품이 많지 않았다. 어렵사리 찾아내 처음 수출한 제품이 카 스테레오였는데, 이게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렇게 정신없이 장사를 배워나가던 어느날, 미국 본사로 출장을 가게 됐다. 그때 바이어 한 사람이 “일본 회사보다 싼 가격에 전자레인지를 납품받으면 좋을 텐데…” 하고 한마디 툭 던졌다. 그거 괜찮겠다 싶어 귀국하자마자 국내 전자업체 타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결같이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렵만 해도 일반인들은 전자레인지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생산라인이 갖춰져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삼성전자가 관심을 보여왔다. 삼성 관계자는 즉각 미국 바이어에게 일본보다 대당 100달러 낮은 납품가격을 제시했다. 이 제의에 솔깃해하면서도 한국 회사의 생산능력이 못 미더웠던 바이어는 한국으로 날아와 두 눈으로 직접 공장을 보고서야 오케이 사인을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전자업계의 그 유명한 전자레인지 신화가 만들어졌다. 당시 삼성전자의 선풍기 공장에서 전자레인지를 만들어 대량 수출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나는 수출업계에 ‘진윤(Gene Yo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81년 (주)화승 수출이사로 스카우트됐다. 화승과는 그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화승의 전신인 동양고무에서 JC페니의 신발을 생산한 적이 있는데, 한때 품질 때문에 큰 문제가 생겼다. 그때 내가 나름대로 공정하게 문제를 처리했는데, 이를 계기로 당시 동양고무 현승훈 사장과 얼굴을 익히게 됐다. 현사장은 훗날 화승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화승 부사장이 나를 화승의 수출담당 이사로 추천하자 현회장이 쾌히 승낙함으로써 내가 학창시절에 잃어버린 10년 세월을 되찾게 해줬다.
30대 이상의 독자라면 1980년대 초 전국을 휩쓴 ET인형 리어카상 물결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그 ET인형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화승 수출이사 시절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운 끝에 ET인형을 만들어 수출했는데, 그때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던 저작권 침해 판정을 받아 큰 낭패를 봤다. 이미 미국에 도착해 있던 18만달러어치의 인형은 고스란히 불태워야 했다.
그런 중에도 한국의 4개 공장에서는 ET인형이 계속 생산되고 있었는데, 수출길이 막힌 상태에서 대량 생산된 ET 인형은 리어카상들을 통해 헐값에라도 처분, 손실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회사에 피해를 안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다.
한발 늦은 아이디어
그후로도 사업을 한답시고 뛰어다니며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럴 때마다 주변으로부터 뜻밖의 도움을 받아 큰 힘이 됐다. 화승에서 나와 고전할 때는 그 전부터 비즈니스 관계를 맺어온 존 피치라는 미국인이 “사업하는 데 보태 쓰라”며 1만달러를 선뜻 내놓았다. 훗날 나는 피치가 사업에 실패하고 방황할 때 그에게 4만달러로 보답해 용기를 줬다. 일면식도 없던 부산의 신발업체인 태광실업 박연차 사장은 내가 사업을 일으키려는 데 돈이 모자란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5000만원짜리 당좌수표를 건네주기도 했다.
휠라(FILA)와 손이 닿은 것은 화승의 수출담당 이사로 있을 때였다. 당시 휠라는 의류분야에서는 꽤 알려진 브랜드였다. 반듯반듯한 사람들이 입고 있는 휠라 티셔츠가 제법 멋있게 보였다. 아주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미지였다. 그걸 느끼는 순간 비즈니스 감각이 발동했다.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들어 미국에 팔면 장사가 되지 않을까?’
이탈리아 라이선스로 미국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일단 아이디어를 떠올리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화승의 방계회사인 풍영에서 부리나케 신발 샘플을 만들어 휠라측과 접촉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