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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오일머니 종착역은 중동 아닌 美·유럽

세계경제 뒤흔든 오일쇼크 ‘흑역사’

펑펑 오일머니 종착역은 중동 아닌 美·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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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오일머니 종착역은 중동 아닌 美·유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의 무력충돌은 7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거대한 화염이 솟아오르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위)와 폭격 이후.

2015년 현재 벌어지는 유가 하락의 배후 조종자도 다름 아닌 OPEC이다. 미국발 ‘셰일가스 혁명’의 위협을 느낀 이들은 선제적인 ‘시장 교란’에 나섰다. 분야가 좀 다른 사례지만, 삼성전자가 막대한 공급량을 바탕으로 메모리 반도체 가격 인하 경쟁을 통해 지난 10여 년간 일본과 대만 경쟁업체들을 고사시키려 한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OPEC은 단순히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돕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발족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실제로 원유 값을 인위적으로 상승시켜 1973년 전 세계에 1차 오일쇼크를 일으킨 배경도 사실은 그해 일어난 제4차 중동전쟁 때문이다. 1948~1973년 4차에 걸쳐 진행된 중동전쟁은 한마디로 이스라엘과 여타 아랍 국가들이 현 이스라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방의 거주권을 둘러싸고 벌인 싸움이다.

막강 親유대 네트워크

이집트와 요르단 사이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팔레스타인에는 2000여 년 전 유대인들이 살았다. 그러다 로마제국 시대에 이들은 유럽 각국으로 추방됐고, 이들만의 거주지도 사라졌다. 예수의 죽음에 관여했고, 이들의 선민(選民)의식이 다른 민족들과 분란을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유럽에서도 별도 격리지역인 ‘게토(Getto)’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도 덧씌워졌다.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받는 것을 천한 일로 여긴 주류 기독교인들은 금융업에 한해 유대인들에게 살길을 열어줬다.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의 자본 축적에 큰 도움이 됐다. 청교도 혁명을 시작으로 나폴레옹 전쟁까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각종 분쟁과 전쟁에서 ‘이길 만한 쪽’에 붙어 자금을 조달해주며 조용히 재산을 불린 유대인들은 19세기부터 다시 그 옛날 자신들의 조국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을 전개했다.



1차대전 때 전쟁 승리에 협조하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독립 동의를 받은 이스라엘은 미국 독립전쟁 후부터는 ‘떠오르는 신주류’ 미국에 많은 줄을 대기 시작한다. 로스차일드의 진출과 JP모건의 설립으로 대변되는 ‘금융제국’의 설립, 아울러 통화발권을 담당하는 연방준비제도(FRB)에 자기 사람을 심어 규정을 조종하고, 거기서 축적된 자본을 정계와 산업계 전반에 쏟아부으면서 ‘친(親)유대’ 기반을 다졌다.

이스라엘은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아랍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을 분할하는 안이 세간의 예상을 깨고 통과되자 아랍 원주민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표결 전만 해도 아랍인 중심의 팔레스타인 연방안이 우세했으나 미국의 입김이 제3세계 국가들을 움직였다. 아랍인들이 ‘2국 분할안’을 계속 거부하자 이스라엘은 오히려 1년 뒤인 1948년 5월 팔레스타인 전체를 이스라엘 독립국으로 선포했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위해 주변 아랍 국가들이 연합전선을 펼쳤다. 그 결과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에 1948년, 1956년, 1967년, 1973년 네 번에 걸친 중동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세븐 시스터스 역시 간판만 미국과 영국 회사일 뿐 실상 유대계 소유라는 사실이 OPEC 결성을 자극했다. 엑손 · 모빌 · 소칼 · 걸프는 록펠러 가문, 로열더치셸은 로스차일드 가문, 텍사코는 노리스 가문의 소유이며, 브리티시 페트롤리엄 역시 국책회사지만 뿌리는 유대계 자본이다.

세븐 시스터스는 2차대전 이후 단단한 카르텔을 통해 석유 수요 예측 및 이에 따른 생산 할당을 했으며, 유전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원유 가격을 조금씩 인하했다. 결국 공급자인 아랍 산유국의 이익보다는 선진 경제권의 구매자인 원유 소비국들의 입맛을 충족시킨 셈이다. 세븐 시스터스는 1959년 산유국의 동의 없이 원유 가격 인하를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1960년 OPEC 설립의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한국 · 일본에 충격파

OPEC은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세븐 시스터스와 함께 가격결정권을 행사했고, 이듬해부터는 세븐 시스터스로부터 석유 채굴사업권도 이양받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OPEC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과 영국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원유 생산량을 25% 감산한 뒤 본격적으로 가격결정권의 칼날을 휘둘렀다. 전쟁 직후 1배럴당 3.0달러에서 5.12달러로, 1974년 1월에는 다시 11.65달러, 3개월 사이에 4배 가까이 올랐다.

오일쇼크는 에너지원을 석유에 의존하던 공업국에 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은 1972년부터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 막 중화학공업시대로 전환을 꾀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1973년 12.0%이던 경제성장률은 1974~75년 평균 6.6%로 반토막 났다. 무역수지 적자폭도 10억2000만 달러에서 22억9000만 달러로 2배 이상 늘었다.

석유와 거의 100% 연동되는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 3대 산업이 성장 엔진이던 일본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 1974년 일본은 고도성장 시대의 1막을 고하는 마이너스 성장(-0.5%)을 기록했다. 일본은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석유 금수(禁輸)조치 때문에 진주만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할 만큼 석유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했다. 오일쇼크는 일반 소비제품에 대한 사재기 현상이 끊이지 않는 등 큰 폭의 물가상승(11.6%)으로 이어졌다. 당시 세계 물가상승률은 오일쇼크 이전인 1973년 9.6%에서 1974~75년 연평균 13.8%로 급상승했다. 세계 경제성장률도 1973년 6.8%였다가 1974~75년에는 2.4%로 3분의 1토막이 났다. 불황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도 뒤따랐다.

1979년에는 2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친미 정권이던 팔레비를 몰아내고 권좌에 오른 이란 혁명이 발단이었다. 호메이니 정권은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미국의 입맛에 맞는 가격대로 원유 수출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하루 550만 배럴의 원유 생산량을 4만 배럴로까지 줄였다. 이로 인해 배럴당 원유 가격은 1차 쇼크보다 2.5배 높은 28달러대까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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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직 | 대우증권 동경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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