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호

백화점의 기원

  • 주간동아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9-09-03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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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점의 기원

    갤러리아백화점 지하에 새로 문 연 초고가 보석과 시계 매장. 어두운 복도에서 앙투아네트왕비와 김희선씨가 고객인 브레게 매장 입구가 더 밝게 빛난다. 뜻밖에 ‘1000만원대’ 아이템들이 전시돼 있어 물어보니, 수억원대 고가 시계는 별도의 방에 보관되어, ‘요청’한 고객만 볼 수 있다고 했다.

    “어머, 아직도 거기 안 가봤단 말이야? 완전 핫이슈인데?”

    “무슨 일 있어? 기자가 사무실에만 있어도 돼?”

    “아, 조, 좀 바빴지…사실 정신없었네, 하하.”(!@#$)

    그녀들은 미심쩍은 듯 나를 훑어봤다. ‘독수리마녀’같은 눈빛을 가진 그녀들은 상대의 옷차림과 몇 마디 말로 3초 안에 상대가 심리적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평가할 수 있다. 만국의 ‘쇼퍼홀릭’ 연대에서 탈락하기 직전의 위기였다. 모든 것을 ‘해외출장’ 탓으로 돌리며 커피를 들이켜자 그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제위기에 내 인생을 반성적으로 생각해보면서, 불굴의 의지를 갖고 발길을 끊었던 갤러리아백화점 얘기였다. 하필 내가 돌보지 않은 요 몇 달 사이에, 대대적인 내부 수선 공사를 한 것이다. 이스트(명품관) 중에서 그나마 내가 넘볼 수 있을 정도의 문턱을 갖고 있던 지하 와인숍과 세일 행사장이 위층 어딘가로 올라가고, 그 자리에 초고가의 보석과 ‘어마어마한’ 시계 부티크들이 새로 문을 열었다고 했다.



    ‘그까짓것, 당장 가보리라! ’

    바로 그주 토요일 갤러리아백화점 이스트의 지하로 갔다. 때로 알량한 ‘자가용’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 나은 곳이 있다. 술 취한 행인들에게 발길질당하기 십상인 ‘먹자골목’과 입장할 때부터 ‘일반석’ 손님임을 실토해야 하는 백화점 주차장 같은 곳 말이다.

    초고가 보석과 시계 매장에 곧바로 연결되는 지하 1층 주차장에는 롤스로이스와 벤틀리가 초콜릿으로 코팅한 대형 케이크처럼 먹음직스럽게 서있었다. 내 손에 끌려 백화점에 함께 간 친구는 “마치 파리의 방돔 광장(보석 부티크가 모여 있는 곳으로 유명)을 옮겨놓은 것 같다”고 했지만 ‘광장’이 주는 밝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이힐이 걸릴까봐 걱정될 만큼 폭신한 카펫과 앞에서 오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조명 때문에 마치 지하 요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곳에 보석과 다이아몬드가 홀로그램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업계에서 초고가 명품 마케팅을 오래 해온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상품 가격이 높을수록 조명은 어두워야 해요. 경험상 매출에도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최근 리노베이션한 백화점 명품 매장 존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완전히 어두워선 안 되고, 고객들끼리 마주치거나 구매하는 모습을 살짝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야 해요.”

    인류 역사상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던 인간이 17세기 들어서 최초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소비’와 쇼핑을 위한 ‘바이오스피어(buyosphere)’라고 주장한 토머스 하인(‘쇼핑의 유혹’ 저자)식으로 설명하자면, 이곳에 들어서는 것은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이라는 지리적 공간과 대한민국 최고의 상류층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하는 공간을 선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의 ‘바이오스피어’란 물론 가상지구환경(biosphere)의 패러디다.

    시계 역사에 투르비용(중력으로 인한 오차를 줄이는 기계장치)이라는 커다란 기술적 업적을 남겼고, 쇼핑의 역사엔 마리 앙투아네트가 좋아한 시계라는 최초의 빅 셀리브리티 마케팅을 기록-한국에선 김희선씨의 결혼예물로 유명-한 시계브랜드 ‘브레게(Breguet)’의 정주연 이사는 “최고의 브랜드들이 이렇게 모인 곳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새로운 긴장감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최고가 시계 컬렉터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어떤 고객이 ‘떴는지’도 곧 소문이 난다는 것이다.

    “특정한 기능 때문에 고가의 시계를 원하는 고객들은 직원 이상의 정보를 갖고 있지요. 스위스의 공방을 다녀온 분도 있고요. 그래서 어느 브랜드든 초고가 아이템을 판매하는 직원은 이들에게 절대 ‘잘 어울린다’거나 ‘멋지세요’ ‘사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교육받아요. 이런 고객에겐 자신의 안목으로 선택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사실 정 이사가 말한 ‘서비스 및 행동규범’은 20세기 초 미국 백화점에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직원들은 고객이 어느 정도 금액을 예상하는지 물어서는 안 됐다(그런데도 정말 많은 세일즈맨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또 손님이 어떤 물건을 눈여겨보면 장점을 설명하면 됐다. ‘아름답다’고 자신의 평가를 남발해선 안 됐다(도대체 그렇게 많은 숍 직원이 ‘딱 언니거야’라고 반말을 걸치며 친한 척하는 이유는 뭘까). 여기 내가 추가하자면 직원은 “단 하나 남아계세요”라거나 “이거 *** 카피세요”라고 상품에 꼬박꼬박 높임말을 쓰면서 손님을 협박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초고가 명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모든 조용한 ‘소란’은 백화점이 처음 선보였을 당시의 ‘바이오스피어’와 동일하다.

    그날 밤 지하의 보석과 시계 매장에 기가 죽어 배를 방바닥에 붙인 채 SBS 드라마 ‘스타일’을 보다가 나는 벌떡 일어났다. 마치 비밀 궁전처럼 보인 갤러리아백화점 이스트, 사진 촬영 한번 하기도 쉽지 않았던 그곳이 드라마 배경으로 싱겁게 공개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1%를 위한 상품들이 ‘아무나’ 보는 주말드라마 소품으로 등장했다. 이래서 위화감 조성한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나 다이애나가 아닌 나도 살 수 있는 것이다. 뭐, 돈만 있으면 말이다.

    쇼핑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 시기에 유럽의 왕실에서는 최상급의 물건이 부르주아 등 일반인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계급의 존재가 무의미해진다고 생각해서 쇼핑행위를 엄격히 통제하려고 했다. 결과는 물론 실패였다. 상품 선택의 확장이 개인의 자유와 밀접히 관계를 맺어온 것이다. 백화점이 아무리 초고가, VVIP마케팅을 주장해도 태생적으로 대중과 기성복을 위한 공간이었다. 최초의 백화점 이름은 ‘갤러리아’나 ‘애비뉴엘’처럼 뭔지 모르게 어려운 이름이 아니었다. 백화점의 속성을 솔직하게 강조한 ‘르 봉 마르셰’(Le Bon Mar-che·만족스러운 가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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