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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에만 내몰리면 인간성 상실, 공동체 속 ‘우리의 아이’로 키워야”

이찬희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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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입력2024-05-0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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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떠날 때 박수 받기 위해, 박수 칠 때 떠나기 위해

    • 한국스카우트 최악 위기 놓여

    • 독이자 약, ‘세계 잼버리 파행’

    • 청소년 입시 지옥 방치 = 사회 몰락

    • 삼성 준감위 3기, 2기 원칙 이어갈 것

    4월 5일 이찬희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는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저출생 국가 아이들에겐 ‘입시 지옥’보다 ‘공동체 정신’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4월 5일 이찬희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는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저출생 국가 아이들에겐 ‘입시 지옥’보다 ‘공동체 정신’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지금껏 한번도 ‘태평성대’ 상태인 조직을 맡아본 적이 없다. 사법고시 출신과 로스쿨 출신 법조인 간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서울지방변호사회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고, 최고 경영진이 재판을 받는 위기에 놓인 삼성에서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조직이 어려울 때 맡아 안정화시키면 떠날 무렵 박수 받을 수 있지 않겠나. 박수 칠 때 떠나는 게 내 목표이기도 하다.”

    4월 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스카우트연맹 사무실에서 만난 이찬희(59)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의 말이다. 이날 그는 스카우트 제복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법조인으로서 정장 차림을 고수하던 기존의 모습에 비하니 퍽 생소했다. 이 총재는 연세대 법과대학을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쭉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의 말처럼 서울지방변호사회장·대한변호사협회장 등을 지냈고, 법무법인 율촌 고문변호사도 맡고 있다. 법조인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2022년 2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 위원장에 올랐고, 올해 2월 연임에 성공해 2년 더 준감위를 이끌게 됐다.

    한국스카우트연맹은 세계 최대 청소년 단체인 세계스카우트연맹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연맹 소속이다. 1922년 조선소년군과 소년척후단을 전신으로 하며 1924년 설립된 국내 최고(最古)‧최대(最大) 청소년단체다. 한때는 ‘보이스카우트’로 불리었으나 현재 남녀 모두 대원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설립 이래 최대 위기다. 저출생으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 코로나19, 입시경쟁이 원인이다. 이른바 ‘세계 잼버리 파행 사태’도 어려움을 더했다. 지난해 8월 전북 새만금에서 개최된 ‘제25회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는 위생, 폭염 대처 등에 준비 부족을 드러내다 참가자들이 태풍으로 인해 야영장에서 조기 철수하는 결말을 맞이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조직의 수장을 맡기란 ‘폭탄 돌리기’일 수도 있는 일. 이 총재는 “내가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라면서 “일론 머스크가 자식에게 한 가지를 물려줄 수 있다면 ‘거절하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던데, 공감되는 말”이라며 웃음 지었다.

    이 총재는 현재 한국스카우트연맹이 처한 위기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바라본다. 그 믿음은 초등학교·중학교 시절 스카우트로 활동하며 얻은 효용감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는 저출생 고령화 현상 속 한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도 연결된다. 그는 “내 삶 가운데 가장 잘한 선택이 스카우트로 활동한 일”이라며 “그것에서 얻은 경험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저출생 국가에서 가뜩이나 수가 줄어든 아이들이 입시에만 내몰려 이기적으로 변하고 인간성을 상실한다면 사회가 몰락한다”며 “현재와 같은 사회구조 속에서는 ‘우리 집 아이’가 아니라 ‘우리의 아이’로 길러 공동체 의식을 키워야만 한다. 스카우트 활동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카우트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왜…”

    지난해 8월 8일 전북 새만금의 잼버리 영지가 텅 비어 있다. 잼버리 참가자 3만7000여 명은 태풍 카눈의 북상에 따라 이날 오전 9시부터 서울과 경기 등 각지로 비상 대피했다. [뉴스1]

    지난해 8월 8일 전북 새만금의 잼버리 영지가 텅 비어 있다. 잼버리 참가자 3만7000여 명은 태풍 카눈의 북상에 따라 이날 오전 9시부터 서울과 경기 등 각지로 비상 대피했다. [뉴스1]

    지금까지의 경력을 감안하면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는 이질적 행보로 보인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5년간 보이스카우트로 활동했다. 그때 경험이 내겐 아주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쭉 관심은 갖고 있었다. 법조인이 되고 나선 북한법을 공부했는데, 그러다 보니 북한이탈주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 가운데 청소년들이 세계 잼버리에 참석하면 뜻깊겠다 싶어서 이 문제를 강태선 전 총재와 논의했다. 그러면서 당시 공석이던 부총재 자리를 맡게 된 것이 인연이 됐다. 세계 잼버리 준비 과정과 결과를 보며 생긴 안타까운 마음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세계 잼버리가 파행을 맞이했다. 이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준비 및 운영 과정을 지켜보며 크게 실망했다. 전문성을 갖추고 경험이 많은 한국 스카우트연맹이 아니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도적 역할을 맡은 게 패착이다. 스카우트 활동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여성가족부 장관과 스카우트 지방연맹장 출신이긴 하지만 야당인 지역구 국회의원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막상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는 대회가 임박할 때까지 공동조직위원장으로 인선조차 되지 못했다. 조직위원도 지나치게 많았다. 어떤 시설을 준비할 것이냐, 어떤 프로그램을 준비할 것이냐 등 중요한 안건보다 위원 교체와 같은 문제가 더 많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결국 샤워장, 화장실 같은 가장 기본적 요건마저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파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정치권에선 사태에 대한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했다.

    “진영 논리, 정치 논리가 개입돼 파행 책임을 두고 싸우는 것을 보면서 순수한 열정으로 뭉친 자원봉사자들과 스카우트연맹 지도부에 또 큰 상처를 주는구나 싶었다. 이들은 어떤 보상과 급여를 받지 않고 오직 스카우트 발전을 위해 세계 잼버리에 헌신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국스카우트연맹은 또 한 번의 큰 행사를 준비해야 한다. 내년 7월 열리는 ‘2025 아시아·태평양 잼버리 대회(아태 잼버리)’다. 이 행사엔 아시아·태평양 34개 나라 1만여 명(국내 5000명, 국외 3000명, 방문객 1000명, 운영 인력 1000명)이 참여한다. △개·폐영식 △전시행사 △활동 프로그램(수상 활동, 자연 체험 등) 등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이를 유치하기 위해 강원, 경기, 충남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내년 아태 잼버리가 개최된다. 경기, 강원, 충남 가운데 어디에서 열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인데.

    “아태 잼버리를 원안대로 내년에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하고 있다. 남은 시간이 빠듯한 데다 이를 유치할 때 상황과 지금의 그것이 많이 달라졌다. 아태 잼버리는 세계 잼버리를 유치한 후 개최가 결정된 것이다. 당시로선 아태 잼버리가 세계 잼버리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으니 세계 잼버리를 잘 마친다면 당연히 아태 잼버리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 잼버리에서 여러 문제점을 나타내 버린 것이다. 이에 세계스카우트연맹이 한국 측에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고 한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로선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직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지 논의를 거듭하고 있는 ‘미지수’ 상황이다.”

    지난해 8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김윤덕 새만금세계잼버리 공동조직위원장(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기자회견을 하고 새만금 잼버리 파행과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8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김윤덕 새만금세계잼버리 공동조직위원장(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기자회견을 하고 새만금 잼버리 파행과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뉴스1]

    부모들은 답 알고 있다

    이 총재는 “100년이 넘은 한국 스카우트가 역사상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스카우트를 넘어 우리나라 모든 청소년 단체가 결부된 사안”이라고도 했다.

    최대 위기라고 판단하는 이유가 있나.

    “먼저 절대적 인구 감소다. 인구가 감소하니 회원 수 자체가 줄어든다. 어떤 단체든 회원이 있어야 유지되지 않겠나. 내가 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만 해도 1년에 100만 명씩 태어났는데, 이젠 23만 명 정도다. 스카우트에 가입할 수 있는 청소년 수도 약 30만 명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입시 지옥’이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가는 게 일상이다. ‘입시 시계’가 점점 더 빨라져서 유치원 다닐 때부터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입시 관련 예체능 학원도 다닌다. 고학년이 되면 할 게 더 많아져서 학원에서 학교 수업을 한참 선행하느라 정신이 없다. 스카우트 활동을 할 여력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다음은 코로나19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내려진 집합 금지 명령 등으로 한국 내부는 물론 세계와의 교류도 끊기고 말았다. 이런 시간이 약 3년 정도 이어졌다. 청소년기에서 3년이란 매우 긴 시간인데, 이 시간을 ‘올 스톱’상태로 보내서 공백이 발생하고 말았다. 여기에 지난해 세계 잼버리 사태까지 더해졌으니 최대 위기라고 할 만하다. 다만 세계 잼버리 사태는 독이면서도 약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어째서 그런가.

    “결과적으로 국민에게 아직 한국에서 스카우트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홍보한 셈이다. 현재 부모 세대에게 그들이 학창 시절 느꼈던 스카우트에 대한 향수를 일깨웠다. 내 주변만 해도 자녀가 스카우트를 가입하고 싶어 한다는 문의가 많이 온다. 부모들도 사실 현재 입시 지옥이 자녀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입시라는 것이 결국 정량평가로 성적을 매기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시간을 겪은 부모들도 성적이 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든 요인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보낸 시간이 훨씬 더 소중한 자산이 됐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부모들이 이러한 깨달음을 떠올리며 자녀는 다르게 살게끔 하려는 분위기를 형성하게 이끌었다는 점에선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카우트 활동에서 얻는 효용감이 입시 공부에 따른 그것보다 더 커야 스카우트가 활성화될 수 있을 듯한데.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스카우트 활동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친구들과 함께 산과 들을 누비고, 외국인 친구들과 교류하며 세상이 넓다는 것을 배웠다. 그 덕분에 시각이 세계로 넓어졌고, 넓은 세상에서 살아야겠다는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었다. 리더십도 길러졌다. 스카우트에서 지도자는 성적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공동 활동에서 동료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 투표를 통해 선출된다. 나는 이 구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의 마음을 읽고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듣는 법’을 배웠다. 이 과정을 통해 어떻게 하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연구했고, 이것이 변협회장, 준감위원장 등 여러 자리를 맡을 수 있게 한 밑받침이 됐다. 마지막은 ‘봉사 정신’이다.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항상 다른 사람을 돕고,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인식을 체화하게 된다. 청소년들이 스카우트 활동에 임하면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 해결의 근간이 된다.”

    청소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공동체 정신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큰 것 두 개를 꼽으라면 저출생과 고령화다. 아이를 워낙 적게 낳다 보니 아이를 낳으면 ‘우리 집 아이’가 된다. 하지만 그런 사회일수록 아이는 ‘우리의 아이’가 돼야 한다. 가뜩이나 적은 아이를 입시 지옥에만 내몰면 인간성을 상실하고, 이기적으로 큰 아이가 자라난 사회는 몰락한다. 이러한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대안, 즉 아이를 ‘우리의 아이’로 길러내는 방법으론 스카우트 활동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 정신이다. 아이들이 공동체 정신을 갖고 자라난다면 저출산 문제도 개선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스카우트연맹은 대외적으로 악화된 시각, 학령인구 감소 등 산적한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이 총재 개인으로선 펼쳐야 할 날개 한쪽이 더 있다. 삼성 준감위다.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 컨트롤타워 부활 등 이목이 집중된 사안을 해결해야 한다.

    삼성 준감위원장을 2년 더 맡게 됐다. 이번 임기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사안은 무엇인가.

    “2022년 준감위를 처음 맡을 때 인권 중심 경영, 투명하고 공정한 경영, ESG(환경·사회·지배구조)경영 3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지난 2년간 이를 어느 정도 이뤄냈다고 생각한다. 이재용 회장은 물론 이하 최고 경영진도 어떤 보고 사항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준감위에서 검토를 끝낸 사안 맞느냐’일 만큼 준법 경영 체질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외부에서 이번 준감위를 흔히 ‘3기’라고 부르지만 나는 ‘2.5기’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새롭게 하기보다는 2기 준감위가 못다 이룬 과제를 더 강력하게 정착시키는 것, 즉 삼성에 준법 경영 문화를 완전히 내재화하는 것이 이번 준감위의 목표다.”



    이현준 기자

    이현준 기자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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