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티모르 초대 대통령이 국가 수장으로는 처음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첫째 동티모르의 자결권 주장에 동조하는 시각이다. 동티모르처럼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 앙골라, 키프로스 같은 나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인도네시아와 정치·경제적으로 친밀한 아세안(ASEAN) 회원국들이나 일본, 호주, 그리고 이슬람권 국가들은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동티모르의 독립에 반대했다. 미국도 인도네시아의 대(對) 동티모르 군사작전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한 바 있다.
마지막 부류는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은 유엔에서 동티모르의 자결권을 놓고 표결할 때마다 기권했다. 이는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지배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과 다름없었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합병은 한번도 국제사회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1975년 동티모르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결의안이 유엔총회에 상정돼 77개 회원국이 찬성, 통과됐다. 1978년과 1980년에도 각각 같은 내용의 결의안이 67표와 58표로 가결된 바 있다. 이처럼 유엔은 동티모르 합병은 인도네시아의 침략행위라고 규정하고 수 차례에 걸쳐서 동티모르 자치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인도네시아가 유엔의 결의를 무시하고 강압통치를 계속해왔고, 대다수 나라들도 비동맹운동의 지도국인 인도네시아의 비위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티모르 문제는 유엔 총회에서 자치권 부여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지지하는국가가 계속 줄어들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묻혀 국제사회에서 철저하게 외면됐다. 1982년 이후에는 유엔총회의 의제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독립선언 당시 동티모르 원주민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이 급진적인 사회주의 성향을 나타냈기 때문에 서방세계로부터 외면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의 중심세력이 마오쩌둥(毛澤東) 노선을 표방하는 급진 세력이어서 호의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구스마오 지도자로 부각
1980년대 동티모르의 독립 움직임은 명분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인도네시아는 국제 인권단체나 서방 언론인들의 동티모르 접근을 철저히 봉쇄했고 동티모르는 점차 고립되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1989년 동티모르 독립투쟁에 활력을 불어넣는 조치를 취하고 만다. 기존의 봉쇄정책을 바꿔 새로운 정착민과 투자가, 그리고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동티모르를 개방한 것. 동티모르 통치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티모르 방문을 허용했고 이듬해에는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대사가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를 방문했다. 이들의 방문은 독립을 갈망하는 동티모르인들의 의지가 전세계에 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특히 1991년 11월12일 대인도네시아 항쟁으로 숨진 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한 후 시위중인 군중에게 인도네시아 보안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약 200명이 사망한 ‘산타 크루즈(Santa Cruz) 묘지 대학살 사건’ 이후 동티모르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총격 장면이 당시 현장에 있던 영국의 방송기자 비디오 카메라에 담겨 전세계에 보도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그동안 인도네시아를 지원해온 많은 국가들이 입장을 바꿨다. 특히 미국의 정책이 크게 변화했다. 1992년 미국 의회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국제군사교육프로그램 원조 230만달러의 공여를 철회하도록 결의했다.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UNCHR)에서도 미국은 인도네시아를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고, 10년 만에 인도네시아를 비난하는 결의안이 다시 통과했다. 이는 동티모르의 문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이 결의안은 산타 크루즈 사건을 포함한 전반적인 인권유린 상황을 조사할 특별조사단을 동티모르에 파견, 그 결과를 1994년 유엔인권위원회에 보고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