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추 마을에는 또 다른 역사가 있다. 즉 이곳은 구한말 연해주 한인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북한과 중국의 훈춘, 북간도 등을 오갈 때면 반드시 거쳐가던 곳이었다. 특히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1908년 봄 최재형(崔在亨), 이범윤(李範允), 이위종(李瑋鍾) 등 한인 지도자들과 동의회(同議會)를 조직하고, 그 해 여름 국내로 진격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연해주 의병의 본부가 있었던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도시가 된 이웃마을 ‘크라스키노’
연추 마을은 러시아 연해주 남부 우수리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 러시아, 북한, 중국 등 3개국의 접경지대 방향으로 기찻길로 280km 가량 떨어져 있는 곳이다. 지금의 크라스키노(Kraskino)와 가깝다. 크라스키노는 1867년 탐험대만 북쪽 해안에 군 요새로 건설됐을 당시 노보키예프스키(Novokievskii)로 불리다가 1936년 이후부터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1938년 3월25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4명의 병사들과 함께 영웅적으로 전사한 크라스킨(M.V. Kraskin) 중위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지명이다.
과거 노보키예프스키로 불리던 시절, 이 마을은 군대 외에도 경찰서, 전신국, 세무서 등 행정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다. 탐험대만 주변, 훈춘과의 접경지대, 두만강 하구 지역 등을 포괄한 연해주 남부지역의 군사적, 행정적 중심지였던 것이다.
주목할 대목은 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 남쪽과 북쪽 양편에 각각 러시아군영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당시 한인들은 이 군영을 ‘연추영(延秋營)’이라 불렀다는 점이다. 또 여러 기록들에서 ‘연추’와 ‘노보키예프스키’가 혼용된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연추 마을이 노보키예프스키, 그러니까 지금의 크라스키노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필자는 2002년 7월9일 5명의 조사단을 이끌고 연추 마을을 찾기 위해 크라스키노로 향했다. 독립기념관의 후원을 받아 시작한 러시아 극동지역과 중앙아시아지역 한인독립운동유적지에 대한 조사의 일환이었다.
조사단 일행이 두만강 하구 러시아·북한 국경지대인 핫산 일대를 조사하고 지금은 중소 군사도시로 발전한 크라스키노로 들어선 것은 오후 3시경. 러시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도시여서 그런지 군용차들이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일행은 시내 중심가에서 제2차 세계대전기념비를 둘러본 후 시 뒤편에 위치한 산 위로 올라갔다. 나무한 그루 없어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방으로 탁 트인 정상은 시 주변지역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은 위치였다. 정상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과 벌인 핫산전투(1938년 7월29일~8월11일) 참전용사들에게 바치는 ‘핫산영웅탑’이 세워져 있었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구릉 아래 좌우로는 크라스키노 시내의 도로와 집들이 늘어서 있고, 멀리 탐험대(Ekspiditsii)만(灣)이 시원스레 펼쳐졌다. 탐험대만의 왼쪽, 즉 동쪽 내륙의 산맥에 연결된 산줄기가 뻗어나와 탐험대만의 남쪽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 뒤로 노브고로드(Novgorod)만의 짙푸른 바닷물이 출렁였다. 이 노브고로드만의 아늑한 품에는 포세트(Pos’et)군항, 즉 목허우(木許隅)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1914년 한인들이 ‘한인아령이주5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려 했던 곳이기도 하다. 탐험대만은 노브고로드만을 왼쪽에 두고 포세트만에 닿게 되고, 포세트만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두만강 연안에 이르는 광활한 피터대제만으로 연결된다. 시 중심을 가로지르는 추카노브카강(Rechka Tsukanovka)은 탐험대만으로 이어졌다.
추카노브카강 오른쪽 해안지대는 옛 발해성터 유적인 크라스키노 성터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탐험대만의 오른쪽 끝에는 바다로 삐쳐나온 ‘곶’이 있는데 과거 한시(漢峙) 또는 뢰기(牢岐)라 불렸던 지역으로 19세기 후반까지 중국인들이 이곳에서 자염(煮鹽)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마야취노예(Maiachnoe)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람도 살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