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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향내음으로 삭혀낸 가마터 늙은 匠人의 망향가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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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민지배의 서곡이 된 을사조약 100주년, 광복 60주년,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 2005년은 여러모로 한일관계사를 더듬어보게 하는 해다. 여전히 가깝고도 먼 일본에선 오늘도 ‘욘사마’ 붐과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라는 대조적인 화제로 떠들썩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일본 열도의 한국 핏줄과 인연을 찾아보는 기행을 시작한다. 두 나라간 은수(恩讎)의 역사야말로 오늘의 연원이요 내일을 내다보는 창인 까닭이다.[편집자]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이삼평의 신사. 경내에는 도조비(碑)가 세워져 있고, 해마다 5월이면 커다란 규모의 도자기 축제가 이 신사를 중심으로 열린다.

아리타(有田)에 가까워지자 풍경이 낯설지 않다. 언젠가 달렸던 철길만 같다. 김제평야의 한복판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 규슈 북단 후쿠오카에서 한 시간 남짓 펼쳐지던 차창 밖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사가(佐賀)현의 아리타가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낮은 산, 밋밋한 평야가 펼쳐진다. 듬성듬성 민가가 보이긴 하지만 늦가을 들판은 텅 비어 있어 황량하기만 하다.

아리타역은 한적한 간이역 같다. 역무원이라고는 딱 한 사람뿐.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아리타 야키(도자기)의 본바닥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둘러보니 역사(驛舍) 한구석에 도자기 공방 팸플릿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아리타 도기의 역사’라는 팸플릿에 눈길이 머문다. ‘아리타 도자기 도매단지 협동조합’이 만든 홍보물이다.

‘1600년대 초 조선의 도자기공 이삼평(李參平)은 아리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자기의 원료인 도광(陶鑛)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는 일본 최초의 자기를 굽게 됩니다. 아리타 자기는 17세기 중반부터 무역항 나가사키의 데시마(出島)를 통해 유럽으로 대량 수출됐습니다. 유럽의 왕후와 귀족들이 이 도자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독일의 드레스덴 지역 오거스타 왕은 아리타 자기를 참고해 자국 내에서 도자기 생산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리타에서 꽃핀 자기의 400년 전통과 기법을 지키고 갈고 닦아오면서, 젊은 작가들과 크고 작은 공방이 의욕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도공들을 끌고 온 내력은 적혀 있지 않다.

역사에는 도자기 집 몇 군데의 홍보물이 더 있다. 그러나 정작 필자가 찾아가야 할 집, 이삼평의 제13대 후손의 집을 알리는 홍보물은 보이지 않았다. ‘도자기의 할아버지’라는 뜻에서 ‘도조(陶祖)’로 불린다는 이삼평의 집을 안내하는 홍보물이 없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후쿠오카 총영사관에서 얻은 주소를 댔다. 역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한 10분쯤 달렸을까.

하지만 차를 세우고 보니 영 잘못 찾아온 것만 같다. 커다란 도자기 공방이나 전시장을 상상했지만, 주변에 공방으로 여겨지는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분명 주소지는 맞는데….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돌려보내고 개천가에서 놀던 아이를 붙잡고 물어봤다.

아이를 따라 골목길 후미진 안쪽으로 들어섰다. 달동네 낡은 집에나 달려 있을 법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 젊은이가 나와 필자를 맞았다. 한눈에 조선 핏줄임을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다. 400년을 이곳에서 살았어도 어느 한구석 일본에 동화되지 않은, 조선 머슴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재생해놓은 듯하다. 부스스한 더벅머리 하며 길쭉한 얼굴, 작달막하고 다부진 체격.

그가 내미는 명함엔 ‘이삼평요(窯) 가나가에 쇼헤이(金が江 省平)’라고 쓰여 있다. 14대 손자다. 어두컴컴한 안방에는 아버지(13대)도 있었다. 아버지 가나가에 산베에(金が江 三兵衛·가나가에 요시토(義人)라는 이름도 함께 쓴다고 했다)씨 역시 한국 핏줄임을 금세 느낄 수 있다. 아들보다 퍽 부드러운 인상이다. 품성 좋은 노인 같다.

쇠락해가는 도자기촌

사는 형편부터 물어보았다. 쇼헤이씨의 아버지가 대답했다.

아리타 야키 ‘도조(陶祖)’ 이삼평

이삼평 신사의 도리이(鳥居)는 도조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자기로 구워 세웠다.

“10년 불경기 여파로 아리타는 예전의 아리타가 아닙니다. 자기란 생필품이라기보다 사치 장식품이니까요. 1980년대까지 흥청대던 공방, 가게도 다들 힘들어합니다. 우리라고 예외가 아니지요. 수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저 먹고 사는 정도입니다. 변해도 정말 많이 변했지요.”

한국 사람들도 더러 찾아오냐고 물어보았다.

“더러 관광오신 분들이 찾아옵니다. 한 해 서너 차례 정도일까. 참, 관광은 아니지만 공주(公州) 시장님도 다녀갔어요. 명함도 있습니다.”

아마도 충청도 인연이라고 해서 각별히 다녀간 것일 게다. 이삼평은 충청 금강(錦江) 유역의 어느 고장 출신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두 사람, 13·14대 부자도 그렇게 말한다.

“이삼평은…” 쇼헤이의 말투는 일본식이다. 한국에서라면 할아버지를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이삼평공’이라든가 ‘저희 몇 대 조부’라고 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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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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