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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숱한 문명의 행렬 거쳐간 서부 개척의 관문

‘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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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대니얼 분의 일화를 소재로 한 조각품 ‘구조’(Horatio Greenough,1836~53)는 한때 미국 국회의사당 회랑에 있었으나 인종주의적 이미지로 인해 최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대니얼 분은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애팔래치아 산맥의 기슭, 야드킨 강 연안에 정주해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사냥을 즐기는 평범한 농부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평범하되 이미 시대의 전형적인 궤도를 따르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펜실베이니아의 레딩 부근. 그의 부모는 영국 태생의 퀘이커 교도였다. 뉴잉글랜드와 달리 윌리엄 펜이 세운 펜실베이니아는 당시 모든 종파의 사람들을 품에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18세기 초부터 이민자들, 특히 독일계와 스코틀랜드에 살던 아일랜드계 사람들이 펜실베이니아로 대거 몰려들었다.

인구가 넘치자 땅을 얻지 못한 이민자들은 험한 앨러게니 산맥은 넘어가지 못하고 산기슭을 따라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로 남하한다. 여기서도 땅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컴벌랜드의 관문을 발견하고 대거 서부로 진출한 것이었다. 분 일가 또한 1750년 버지나아의 셰난도 계곡으로 이주해 1년가량 살다가 미개척지인 노스캐롤라이나의 야드킨 강 상류, 오늘날의 분(이 역시 그의 이름을 딴 도시다) 근처로 옮겨온 것이다.

대니얼 분은 처음에 사냥꾼으로 컴벌랜드 갭을 찾아왔다. 1755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친구가 권유했다. 소문대로 사슴과 해리 등 사냥감이 풍부한 것을 보고 분은 인디언이 남긴 트레일을 따라 켄터키를 전전하는 이른바 ‘장기 사냥꾼(long hunter)’ 생활을 2년여간 하다가 이곳에 정주할 결심을 한다. ‘켄터키’는 원래 인디언 말로 초원지대라는 뜻. 이곳을 완충지대로 북쪽의 쇼니 족과 남쪽의 체로키 족이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사냥감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 일가는 가족과 몇몇 이웃을 데리고 켄터키로 오던 중 컴벌랜드 갭 근처에서 인디언의 공격을 받아 장남 제임스를 잃고, 이주를 포기하고 노스캐롤라이나로 되돌아가고 만다. 2년 뒤인 1775년, 분은 땅 투기 회사인 트란실바니아 회사의 길잡이 겸 측량사로 컴벌랜드 갭을 통과해 다시금 켄터키로 들어와 ‘윌더니스 통로’를 개척하고 켄터키 강 남쪽에 정착한다. 얼마 후 트란실바니아 회사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고, 이것이 결국 오늘의 분스버러가 됐다.

굴곡투성이 인생



한동안 서부 진출의 변방 중심지 구실을 한 분스버러는 늘 인디언들의 공격 표적이 됐다. 독립혁명 와중인 1776년, 인디언들이 분의 딸 제미나와 다른 두 소녀를 납치해간 사건이 일어났다. 즉시 이들을 추적한 분은 이틀 뒤 이들의 소재를 찾아내 기습 공격으로 딸을 구해냈다. 이를 계기로 인디언 투사로서 분의 명성이 서부에 자자해지기 시작했다.

1778년 버지니아 민병대의 일원으로 뒤늦게 독립전쟁에 참여한 분은 소금을 구하러 가다가 쇼니 인디언들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켄터키에서 처음 사냥꾼 생활을 시작할 때도 인디언의 포로가 되어 모아둔 사슴가죽을 모두 빼앗기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 쇼니 족 추장 블랙피시는 분의 사냥 솜씨에 반해 그에게 인디언 이름을 지어주고 양자로 삼아 부족의 일원으로 대접했다.

이들과 4개월가량 함께 지내다가 쇼니 족이 영국의 후원 아래 분스버러를 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우연히 접한 분은 인디언 마을을 탈출해 분스버러로 달려가 공격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비했다. 100명이 넘는 쇼니 인디언들의 포위 공격을 받았지만 분스버러 주민들은 분의 지휘 아래 결국 인디언들을 물리쳤다. 이주자가 늘어나면서 켄터키 도처에서 인디언과의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면서 켄터키는 ‘피로 얼룩진 땅(The Bloody Ground)’이라는 별칭을 얻기에 이른다.

1782년 인디언과 벌인 또 다른 싸움에서 분은 다시 아들을 잃는 비운을 겪는다. 그 후 그는 켄터키에서 측량사로, 민병대장으로, 혹은 주의회 의원으로 활약했으나, 땅 사기 사건에 휘말려 가진 땅을 모두 잃고 빚까지 지고 한동안 웨스트버지니아, 버지니아, 오하이오 강 연안을 전전하다가, 스페인 총독의 권유를 받아들여 당시 스페인 땅이던 미주리로 이주했다. 그 자신 문명의 전령사였으나 분은 쿠퍼가 쓴 소설의 주인공 내티 범포처럼 문명의 전진으로 혜택 받은 것은 별로 없었다.

분은 미주리에 갖고 있던 방대한 땅의 소유권을 1803년 미국의 루이지애나 영지 매입으로 상실한다. 1814년 미 의회는 이미 국제적 전설이 된 분(그는 이미 사토브리앙이나 바이런과 같은 유럽 작가들의 문학적 소재가 되어 있었다)의 개척 업적을 인정해 850에이커에 이르는 미주리 땅을 그에게 돌려줬다. 아들이 사는 켄터키로 돌아와 만년을 보낸 분은 1820년 85세를 일기로 그 변전무쌍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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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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