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평화의 상인’ 꿈꾸며 1조 원 들여 노벨상 제정
상금과 수상자 선정 등 전반 책임지는 노벨재단
후보자 추천위→ 시상 담당 기관 검토 거쳐 수상자 선정
추천위 후보자 평가 내용은 50년간 비밀
세계 최고 권위에도 샤르트르, 레 둑 토는 수상 거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2024년 12월 10일(현지 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사에서 열린 만찬에서 연설하고 있다. [AP=뉴시스]
한국인으로는 처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2024년 12월 11일(현지 시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노벨상 시상 행사의 특별함을 이야기했다.
한 작가에게 강한 인상을 준 노벨상 시상 행사는 스웨덴은 물론 세계가 주목하는 ‘지성의 올림픽’이다. 스톡홀름에선 시상식 약 1주일 전부터 시상식뿐 아니라 각종 행사가 가득한 ‘노벨 주간’이 진행된다. 노벨상 각 분야 수상자들의 강연과 기자회견, 이들을 축하하는 콘서트와 화려한 조명 등으로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다.
스웨덴이 노벨상 시상식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도 드러난다. 시상식에서 한 작가에게 노벨상 메달과 증서를 수여한 이는 칼 구스타브 16세 스웨덴 국왕. 그날 밤 연회는 스톡홀름의 심장부인 시청사에서 6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한 작가는 연회에서 안드레아스 노를리엔 국회의장,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 등과 함께 중앙에 마련된 메인 테이블에 앉았다.
노벨상의 중심엔 노벨재단이 있다. 스웨덴에서 태어나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유산으로 설립된 민간기관이다. 민간기관 한 곳이 노벨상 시상 기간을 국경일처럼 들썩이게 만들고, 세계인들까지 끌어들인 힘은 어디에 있을까.
작가 한강이 칼 구스타브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받은 노벨문학상 증서. [노벨재단]
‘죽음의 상인’에서 ‘평화의 상인’으로
“재산이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준 사람들을 보상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
1896년 알프레드 노벨은 숨지며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노벨재단이 1900년 설립됐고, 이듬해 첫 노벨상이 수여됐다. 이후에도 제 1·2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매년 수상자를 배출했다.
노벨이 이런 유언장을 남기게 된 배경이 흥미롭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등에 따르면 노벨은 프랑스 신문의 오보로 세계사에 남은 유언을 결심한다. 1888년 노벨의 동생 루드비크가 프랑스 칸을 방문하던 중 숨졌다. 당시 프랑스의 한 신문은 실수로 이를 알프레드 노벨의 부고로 보도했다. 제목은 ‘죽음의 상인이 죽다’였고 ‘더 많은 사람을 더 빨리 죽일 수 있는 방법(다이너마이트 발명)을 찾아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 박사가 사망했다’란 내용이었다.
노벨은 자신을 ‘죽음의 상인’으로 표현한 보도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죽음의 상인’이 아닌 ‘평화의 상인’이 되고자 했다. 자신의 유산으로 인류에 긍정적 기여를 한 사람들을 기리는 상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노벨은 유언장에서 재산 대부분을 노벨상 제정에 배정해 뒀다. 현재 가치로는 약 10억 달러(1조40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유언장에 서명한 뒤 약 1년 만에 뇌졸중으로 숨졌다. 유언장은 그의 사망 1년 뒤 공개됐다.
거액의 상금, 유산 투자 수익금
노벨상은 노벨의 유언에 따라 물리학, 화학, 생리학 또는 의학, 문학, 평화 등 5개 분야로 나뉘어 시상했다. 이후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은 설립 300주년을 맞아 노벨을 기리며 경제학상을 제정했다. 이로써 노벨상 수상 분야는 6개가 됐다. 그해의 노벨상 수상자는 매년 10월 발표된다. 시상식은 노벨이 사망한 12월 10일에 열린다.
노벨은 유언장에서 상의 분야별 담당 기관까지 구체적으로 정해뒀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가, 생리·의학상은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 노벨위원회가 수여한다. 한 작가가 받은 문학상은 스웨덴 아카데미가 맡는다.
평화상은 특이하게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상한다. 노벨이 왜 평화상 시상을 노르웨이에 맡겼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전 비서였던 가이르 룬데스타드 씨는 그의 논문에서 노벨이 살아 있을 땐 노르웨이가 스웨덴과 연합된 국가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814년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침략한 뒤 노르웨이는 마지못해 스웨덴과 연합국가가 됐다. 노벨은 스웨덴 연합국으로서 노르웨이를 인정하고 이곳에도 시상 권한을 줬다는 추측이다. 1905년 노르웨이는 평화롭게 스웨덴에서 분리됐고, 별도의 국가가 됐지만 여전히 시상식을 연다.
노벨재단이 120년 넘는 노벨상의 역사를 안정적으로 이어온 비결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상당한 상금의 재원인 튼튼한 재정이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이번에 한 작가가 받은 상금은 1100만 크로나(약 14억3000만 원)나 된다.
매년 수상자 여럿에게 거액을 줄 만큼 노벨의 유산이 충분히 넘쳤던 것은 아니다. 노벨은 숨지기 약 1년 전인 1895년 11월 서명한 유언장에서 3100만 크로나가 넘는 재산 대부분을 기금으로 전환해 ‘안전한 증권’에 투자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지금 화폐가치로는 22억 크로나(약 2861억 원)가 넘는다. 이런 규모의 원금을 안전한 증권에 투자해 얻은 수익금을 상금으로 쓰란 얘기였다.
노벨재단에 따르면 1901년 투자 원칙에 규정된 ‘안전한 증권’은 당시 금박 채권이나 그런 증권을 담보로 한 대출, 부동산 담보 대출로 해석됐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 속에서 그 개념도 재해석됐다.
독립적이고 권한이 분산된 조직
1901년 지급된 노벨상의 첫 상금은 876만 3633크로나. 현재 가치로 한화 약 11억 8500만 원에 달한다. 이후 기금 부족 사태로 인해 상금은 조금씩 줄었다. 하지만 이후 스웨덴 정부가 투자 규제를 완화하며 상금 규모가 커졌다. 정부는 1950년대 초 노벨재단 이사회의 요청에 따라 이사회가 부동산, 채권 및 담보 대출뿐 아니라 대부분의 주식에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상금의 재원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만이 재단의 목표는 아니다. 노벨재단은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는 ‘책임 있는 투자를 위한 가이드라인’에서 “재정적 목표 외에도 훌륭한 윤리적 원칙을 준수하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세계 발전에 기여하는 게 목표”라고 소개했다. 환경, 사회적 책임, 기업 거버넌스 등이 세계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에서다. 재단은 이러한 기준에 따라 투자 대상을 결정한다.
노벨상이 제정될 당시 상이 정치적으로 변질되고 불공정해질 것이란 우려도 있었다. 당시 미국 뉴욕타임스는 “스웨덴이 인기 있는 사람을 고르는 정치에 굴복할 것이기 때문에 이 상은 영광보다는 문제를 불러올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노벨재단도 이러한 시선을 의식하고 수상자 선정 과정에 특히 신경을 썼다. 재단은 우선 독립적인 노벨상 후보자 선정 조직을 꾸렸다. 객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5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든 것. 이 위원회는 후보자들을 추천받아 검토했다. 위원회는 또 권한을 분산했다. 후보자들을 정하는 데서 멈췄다. 최종 수상자 결정은 분야별로 나뉜 각 수상 기관에 맡겼다.
특히 평화상을 수여하는 노르웨이의 노벨위원회는 노르웨이 의회가 임명하는 5명으로 구성된다. 노르웨이 정부나 정치권 인사는 위원회에서 활동할 수 없게 금지돼 있다. 이는 노르웨이 정치권이 수상자 선정에 입김을 넣지 못하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장치다.
위원들이 외압을 받지 않고 소신 있게 후보자를 평가할 수 있는 제도도 갖췄다. 추천된 후보자와 이들에 대한 위원들의 평가를 50년간 비밀에 부친 것이다. 위원들은 이러한 여건에서 수상자 후보들의 성과가 얼마나 실제 영향력이 있는지, 과장된 홍보는 없는지, 앞으로도 영향력이 이어질지 등을 면밀하게 따지게 된다.
객관적인 평가 전통을 이어온 덕에 노벨재단은 대부분 인류에 기여한 이들을 수상자로 배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테레사 수녀 등 대부분은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감사와 겸손을 표했다.
아시아 여성 작가 중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이 2024년 12월 10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에서 열린 노벨상 연회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있다. [뉴스1]
위험한 발명에 상 주기도
하지만 2명은 수상을 거부했다. 1964년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는 “노벨상이 내 글의 영향력을 제한할까 두렵다”며 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 1973년 베트남 정치인 레 둑 토는 미국 외교관 헨리 키신저와 평화상을 공동 수상할 예정이었다. 동양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배출될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베트남전쟁 평화협정 이후에도 계속된 혼란 속에서 “베트남에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노벨상 수상에 대한 잡음도 종종 있다. 노벨의학상이 ‘뇌절제술’을 발명한 이에게 돌아간 때가 대표적이다. 1949년 포르투갈의 의학자 안토니우 에가스 모니스는 전두엽 절제술을 정신질환 치료에 도입한 업적을 높이 평가 받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시술법은 뇌의 일부를 영구적으로 파괴해 논란을 낳았다. 이 시술법이 노벨상 수상 이후 확산하면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때문에 그의 수상을 취소해야 한다는 요구가 매년 제기됐다.
반대로 노벨상 수상 가치가 있는 연구도 소수의 위원이 평가하는 제도의 허점 탓에 선정되지 못한다는 시각이 있다. 소아마비 백신 발명자인 조너스 소크가 일례다. 소크의 백신은 많은 어린이를 구했다. 또 그는 병원균을 죽여 만든 사백신이 생백신과 동등한 수준의 면역력이 있음을 입증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여러 차례 후보에 올랐음에도 상을 받을 수 없었다. 심사위원 1명이 “선행 연구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새롭지 않다”며 공격한 영향이 컸다.
노벨상은 수상자가 백인 남성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최근 한강 작가가 아시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됐을 때도 이런 비판을 의식해 시도한 변화라는 해석이 나왔다. AP통신에 따르면 2023년 기준으로 여성 수상자는 60명가량. 물리학 여성 수상자는 4명, 경제학 여성 수상자는 2명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