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출자 해소 하던 중 독립 경영 원칙 흔들려
영풍 “최윤범 회장, ‘무차입 경영’ 원칙 깨”
고려아연 “영풍 무리한 배당 요구, 경영 간섭 끝내야”
2024년 9월 영풍, 사모펀드 MBK 끌어들여 ‘전면전’
정·재계는 물론 임직원도 고려아연 손 들어줬으나
지분 경쟁 과정 고려아연도 유상증자 ‘패착’ 후 철회
지분율 17% 기관·소액주주 손에 달렸다
[뉴스1]
2024년 10월 8일 고려아연의 온산제련소가 위치한 울산 울주군 온산읍 온산오거리에 MBK파트너스의 고려아연 인수를 반대하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동아DB]
갈등의 당사자인 영풍과 고려아연은 2024년 2월부터 본격 경영권 다툼에 돌입해 2024년 9월 MBK파트너스(이하 MBK)가 참전하는 적대적 M&A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 분쟁을 이어가고 있다. 영풍은 현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경영 방침을 문제 삼는다. 최 회장이 양사가 오래 지켜온 ‘무차입 경영’의 원칙을 깼다는 것이다. 최 회장을 필두로 한 고려아연 측은 영풍이 고려아연에 무리한 배당 요구와 경영간섭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양측의 주장은 사실일까. 고려아연과 영풍의 경영권 다툼과 MBK의 참전까지 주요 순간과 그 내막을 정리했다.
두 회사가 경영권 다툼을 벌일 수 있었던 이유는 특이한 지분 구조에 있다. 고려아연의 모기업인 영풍그룹은 1949년 11월 최기호·장병희 공동 창업주가 서울 남대문 인근에 ‘영풍기업사’를 설립한 이후 고려아연은 대대로 최 씨 일가(현 회장 최윤범), 영풍은 장 씨 일가(현 회장 장형진)가 경영해 왔다. 분리 경영 체제를 택하긴 했으나 상대 일가의 계열사 주식을 상호 보유했다. 지분을 통한 견제와 상호 영역을 존중하기 위한 장치였다.
최·장 씨 일가 ‘균형’ 깨뜨린 순환출자
그런데 이 장치가 2019년부터 흔들렸다. 당시 정부가 순환출자 해소를 재벌 개혁 핵심 과제로 삼자 영풍그룹도 순환출자 구조를 고쳤다. 이 과정에서 최 씨 일가의 그룹 내 영향력은 크게 줄었다. 최 씨 일가는 영풍의 지분을 직접 보유하는 대신 계열사인 ‘서린상사’를 통해 영풍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최 씨 일가는 서린상사의 최대주주였고, 서린상사는 영풍의 최대 주주였다.
하지만 순환출자 구조 해소를 위해 서린상사의 영풍 보유지분 10%가량이 장 씨 일가에게 넘어갔다. 영풍의 최대주주도 서린상사에서 장 씨 일가로 바뀌었다. 장 씨 일가는 고려아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나 최 씨 일가는 영풍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가 돼버린 셈이다.
고려아연 측 관계자는 “최 씨 일가는 그룹 내 영향력을 잃어가면서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협조했으나 영풍은 지분 정리가 끝나자 고려아연에 부당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고려아연 측이 지적한 부당한 요구 중 하나는 ‘비철금속 제련 후 폐기물 처리’(자로사이트와 황산). 고려아연 측 설명에 따르면, 영풍은 자사가 운영하는 경북 봉화군 석포제련소의 폐기물을 고려아연이 운영하는 울산 울진군 온산제련소에서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고려아연은 처음에는 동업자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했다. 폐기물에서도 금속을 제련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풍이 폐기물 운송비까지 고려아연이 부담하라고 요구하며 두 회사 사이 미묘한 감정 다툼이 생겼다는 것. 반면 영풍 측은 “사실무근”이라며 맞서고 있다. 고려아연 측과 폐기물 처리에 관해 논의한 적은 있지만 온산제련소에 보내지는 않기로 했다는 주장이다.
경영 방침 문제 삼아 물밑 지분 경쟁 돌입
조금씩 불거지던 두 가문의 갈등은 지분 경쟁으로 치달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표면적 갈등의 원인은 경영 방침과 관련한 이견이었다. 2022년 최윤범 고려아연 대표가 취임하면서 고려아연을 성장시킬 신사업으로 ‘트로이카 드라이브’를 발표했다. △신재생에너지 △2차전지 소재산업 △자원순환(자원 재활용) 사업을 필두로 고려아연의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새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일이니만큼 대규모 투자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차입금이 생겼다. 2023년 6월 기준 고려아연 차입금 규모는 총 1조575억 원. 2021년 말(4460억 원)에 비해 약 2.3배 늘었다.
영풍은 이 차입금을 문제 삼았다. 영풍그룹의 전통인 ‘무차입 경영’ 원칙을 깬 것을 지적했으나, 실제 불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신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화, LG, 현대차와 손을 잡은 것이 영풍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 철강업계의 중론이다. 해당 기업들이 지분 교환과 유상증자 등으로 고려아연 지분을 갖게 된 것을 두고 최윤범 회장을 포함한 최 씨 측의 우호 지분이 늘어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표적 예가 2022년 8월 고려아연이 한화그룹의 계열사 ‘한화H2에너지USA’를 대상으로 한 유상증자다. 유상증자를 통해 5%의 지분이 한화로 넘어갔다. 최 회장과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미국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다.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영풍은 이 지분을 최 회장 측 우호 지분으로 보고 있다. 고려아연은 “신사업 투자 유치를 위한 유상증자”라고 강조했으나 영풍은 직접 지분 매수로 맞섰다. 계열사인 코리아써키트, 에이치씨 등을 통해 고려아연 지분을 모았다.
본격적인 경영권 다툼은 2024년 2월 주주총회에서 촉발됐다. 고려아연이 주당 5000원의 결산 배당을 진행하겠다고 밝히자, 영풍은 “2023년 6월 중간 배당으로 주당 1만 원을 배당한 것을 합해도 전년의 2만 원보다 5000원 줄어든다”며 배당 확대를 요구했다. 고려아연은 “영풍의 주장대로 기말 배당금을 올리면 주주환원율이 96%에 육박하는데 이는 기업이 모든 이익금을 투자나 기업환경 개선에 할애하지 않고 주주환원에만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가치와 주주 권익을 떨어뜨린다”며 영풍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2024년 9월 영풍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이하 MBK)와 손잡고 고려아연 지분 확보에 나서며 경영권 다툼은 적대적 M&A라는 새 국면으로 전환됐다. 영풍은 MBK와 경영협력계약도 맺었다. 계약의 세부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MBK는 영풍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 일부를 사고팔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풍은 경영권은 물론 1대 주주 자리까지 MBK측에 내준 셈이다. 2024년 9월 영풍은 보도자료를 통해 “스스로 팔을 자르고 살을 내주는 심정으로 MBK에 1대 주주 지위를 양보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MBK, 고려아연 매각 계획 “현재로선 없다”
금융자본인 사모펀드가 국가 기간산업으로 분류되는 비철금속 제련 회사 인수에 나서자 각계각층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사모펀드가 고려아연의 핵심 기술을 매각하거나 중국 등 해외에 기술 공유를 통해 적극적인 수익화에 나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MBK 합자회사에 중국 연기금인 중국투자공사의 자금이 약 5% 포함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우려는 더 커졌다.
김두겸 울산시장은 2024년 9월 16일 “고려아연에 대한 외국자본의 약탈적 인수합병 시도를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며 “120만 울산시민과 함께 ‘고려아연 주식 사주기 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울산에는 ‘고려아연의 심장’이라 불리는 온산제련소가 있다.
2024년 9월 19일에는 고려아연 노조가 영풍·MBK의 고려아연 주식 공개매수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문에서 노조는 “50년 역사의 세계 최고의 비철금속 제련 회사인 고려아연이 기업사냥꾼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에 회사를 빼앗기는 엄청난 위협 앞에 직면해 있다”며 “이들은 지난 50년간 근로자들의 피땀과 헌신으로 일군 고려아연을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매수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위원장도 한 달여 지난 10월 28일 “특정 산업은 20~30년간 길게 보고 (경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며 “5년이나 10년 안에 사업을 정리하는 구조를 가진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했을 때 중장기적 관점에서 주주가치 훼손이 있을 수 있지 않나”라고 우려를 표했다.
MBK는 즉각 해명에 나섰다. 김광일 MBK파트너스 부회장은 2024년 9월 18일 “국가 기간산업인 고려아연을 중국에 팔수도 없고 팔지도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매각할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선 김 부회장은 “중국 말고 다른 나라에 (고려아연을) 매각할 의향은 있나”라는 질의에 “현재로서는 없다”는 다소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2024년 11월 13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뉴스1]
지분 17% 기관·소액주주가 ‘캐스팅보터’
지금까지의 지분 매입 상황만 놓고 보면 영풍·MBK가 앞서고 있다. 양측의 공개 지분 매수가 끝난 2024년 10월 21일 기준 영풍·MBK가 공개매수로 모은 고려아연 지분은 39.83%로 최 회장 측 우호 지분은 35% 정도다.
최 회장 측은 이를 뒤집고자 ‘유상증자’라는 ‘묘수’를 뒀다. 고려아연은 2024년 10월 30일 주식은 373만2650주 유상증자를 공시했는데, 발행량의 20%는 직원에게 돌아가는 우리사주로 우선 배정했다. 이를 두고 금융업계에서는 “사실상 최 회장 측 우호 지분인 임직원 지분을 늘리려는 의도”라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묘수는 ‘패착’이 됐다. 유상증자가 발표되자마자 주가가 급락했다. 유상증자 발표 다음 날인 2024년 10월 31일 금감원이 최 회장의 자본시장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고려아연은 임시 이사회를 열어 유상증자 결정을 철회했고, 최 회장은 이사회 의장직에서 내려왔다. 최 회장은 12월 9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유상증자는 실책이었다”며 “실망한 주주들의 용서를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고려아연이 사들인 의결권 없는 자사주를 둘러싸고도 법정다툼이 벌어졌다. 고려아연은 2024년 9월 공개매수로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 204만 주(9.85%)를 사들였는데, 고려아연은 10월 2일 해당 지분을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고려아연이 공개매수로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하면 양측의 의결권 지분율은 영풍·MBK가 44.19%, 최 회장 측이 39%대로 변한다. 남은 의결권 지분 17% 정도는 국민연금과 기관, 소액주주들이 가지고 있다. ‘캐스팅보터’인 셈이다.
영풍·MBK는 이 지분도 문제 삼는다. 12월 11일 영풍·MBK는 서울중앙지법에 고려아연이 취득한 자사주 204만 주의 처분을 금지하는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MBK·영풍 관계자는 “계속되는 자사주 소각 요구에도 고려아연은 소각할 계획이라는 말만 하고 실행을 미루고 있다”며 “자사주를 제삼자에 출연·대여·양도하는 등의 방식으로 의결권을 살리려는 꼼수를 얼마든지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고려아연은 같은 날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MBK가 존재하지도 않는 허위 사실을 가정해 또다시 가처분 소송을 벌이며 고려아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하려 하고 있다”며 “공개매수로 취득한 자사주를 적절한 시기에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전량 소각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자본시장법상 자사주는 취득일로부터 6개월간 처분이 금지돼 있다.
고려아연은 공개매수 이전에 매입한 자사주 1.4%도 보유하고 있다. 당초 ‘임직원 평가보상 및 소각’ 목적이라고 공시한 주식이다. 고려아연 측은 “시장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처분을 고민 중인 상태”라며 “유상증자 추진으로 한 차례 (주식) 시장의 질타를 받은 만큼 자사주 활용도 신중한 논의를 거칠 계획”이라 밝혔다.
결국 2025년 1월 23일 양측의 경영권 대전은 누가 회사의 미래 비전을 바탕으로 주주들을 설득하는지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1989년 서울 출생. 2016년부터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4년 간 주간동아팀에서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노동, 환경, IT, 스타트업, 블록체인 등 다양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20년 7월부터는 신동아팀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생은 아니지만, 그들에 가장 가까운 80년대 생으로 청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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