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 위험 상황 빈번… 보행자와 갈등 심화
코로나19 팬데믹 겪으며 러닝 인구 급증
“뛸 수 있는 인프라, 청년 체육 예산 없다”
자전거 보급 초기 상황과 유사… “표준화된 에티켓 필요”
2024년 10월 자전거, 보행자, 러너의 동선이 겹치는 저녁 시간대의 서울 성동구 성수동 살곶이 다리 주변 한강 산책로. [박선영, 최예원]
문제는 이용자가 많다 보니 보행자와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회인 러닝 크루를 이끄는 윤여운(37) 씨도 보행자들과 갈등을 겪었다. 당시 윤 씨의 크루는 약 30명으로, 속도에 따라 5개 그룹으로 나뉘어 두 줄로 훈련을 진행했다.
그런데 갑자기 4명의 보행자가 트랙에 들어와 천천히 횡을 지어 걸으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에 달리는 이들은 보행자를 피하면서 달려야 했고, 금방이라도 보행자들과 충돌할 상황에 처했다. 크루 가운데 한 명이 조심스럽게 보행자 일행에게 한쪽으로 산책해 달라고 요청하자, 보행자 일행은 화를 내며 대응했다. 결국 이날 그들과 윤 씨의 크루는 서로 얼굴을 붉혀야 했다.
인구 1400만 도쿄엔 트랙 11개, 935만 서울엔 5개
2024년 10월 30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청년정책포럼에서 청년정책 관계자, 전문가, 청년 대표자가 모여 러닝크루에 대한 정책 대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박선영, 최예원]
러닝 크루는 참가에 강제성이 없다. 과도한 소속감을 요구하지 않으며, 최소한 규율만 부여하는 모임이라는 점에서 자율성도 높다. 한번 모여 달릴 때면 30~50명의 사람이 모이며, 약 10명씩 무리지어 특정 코스를 함께 달린다.
하지만 이는 보행자와의 갈등을 낳았다. 기존의 공원, 트랙과 같은 공공 체육 인프라는 급격히 늘어난 러닝 인구를 포용하기에 부족한 실정이었고, 급격히 증가한 러너와 보행자들은 한정된 공간을 공유해야 했다. 또 공공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시민 간에 준수해야 하는 공식적 러닝 에티켓이 부재한 상황이 갈등을 더 심화했다.
러닝 크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생겨나며 정석근(51) 감독이 운영해 온 러닝 아카데미는 훈련 장소 섭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가 게시한 러닝 아카데미 회원 모집 영상에 한 시민이 “시민들 이용하라고 무료 개방해 놓은 장소에서 왜 자기 돈벌이를 하느냐”라며 비판 댓글을 남기는 일도 있었다.
보행자와 러너 간 갈등을 만드는 원인은 달릴 수 있는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 감독은 “순수하게 달리기만 할 수 있는 공간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며 “인구 30만 명을 기준으로 운동장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약 1400만 명이 거주하는 일본 도쿄에 전문 육상 트랙은 약 11개 있다. 하지만 인구 약 935만 명의 서울엔 5개의 공공 트랙만 있으며, 심지어 최근 빚어진 갈등에 집단 달리기 활동에 대한 규제도 생겨나고 있다.
이처럼 공공 체육 인프라의 부족은 러너와 보행자 모두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달리는 사람이 많아진 2024년 10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살곶이 다리 근처 보행로엔 러너와 보행자가 뒤엉켜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듯했다. 이곳은 보행자와 자전거, 달리는 이들이 세 방향에서 접근하는 데다 U자 형태로 꺾여 있어 맞은편에서 오는 이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1년 전 러닝을 시작해 주 4회 달리기를 하는 대학생 박우형(26) 씨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야광 조끼와 야광 밴드를 팔에 착용하고 달린다. 그는 “한강에서는 사이클과 보행자, 러너가 겹쳐 충돌 사고가 발생할 수 있어 항상 긴장하면서 뛴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인프라 부족을 문제로 꼽는다. 10월 30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청년정책포럼 ‘러닝크루를 통해 바라본 청년 문화’에서 변금선 서울연구원 연구원은 “러너를 지원하기보다는 인프라를 만들어가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의 보도블록은 달리기에 취약한 상태이며 자동차, 사람이 걷는 공간이 혼합된 상태”라며 “우리의 도시가 뛸 수 있는 수준으로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고 부연했다. 강선미 서울시 청년 정책담당관은 “청년정책 분야에서 주거, 일자리, 교육·문화와 달리 체육 정책을 위한 예산은 사실상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표준화된 러닝 에티켓 마련·교육 필요”
경기 하남시 망월동 하남종합운동장에 러닝 에티켓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박선영, 최예원]
실제 러닝을 새롭게 시작하는 젊은 층은 대부분 달리기를 제대로 배우는 과정 없이 시작하게 된다. 만일 달리기를 배운다고 하더라도 빠르게, 더 오래 뛰는 방법을 배울 뿐, 에티켓을 함께 배우는 경우는 드물다.
이에 대해 김대희 부경대 스마트헬스케어학부 교수는 “러너와 보행자 간 공식적 에티켓이 부재한 상황”이라며 “‘러닝 붐’ 이후 우리 사회에 보이는 혼란 양상이 우리나라에 자전거 인구가 급증하던 상황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자전거 인구가 많아진 초창기에는 에티켓이 부재했지만, 이후 연맹에서 규칙을 마련하고 자전거 전용 도로가 생겨나며 혼란이 잦아든 것처럼 지금의 혼란 역시 개선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육상연맹, 러닝 크루 협회, 지자체 등에서 나서서 표준화된 에티켓을 마련하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실제 시민 간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발 빠르게 러닝 에티켓을 만들어 운동장에 현수막을 건 지자체도 있다. 예컨대 경기 하남시는 망월동 하남종합운동장에 ‘1~4번 레인은 인터벌 훈련 또는 빠른 달리기 전용, 5~8레인은 느린 달리기 또는 걷기 전용’이라는 트랙 이용 에티켓이 적힌 현수막을 걸어 러너와 보행자 간의 갈등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