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서울올림픽 성공 바탕은 기업인 체육 후원
이건희 회장 사면이 꼭 필요했던 이유
휠체어 타고 다니며 평창 유치 운동 벌여
삼성의 도전 정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발전
두산그룹 비서실 앞에 있는 ‘박승직상점’ 간판과 창업주 박승직 회장 동상 앞에 선 박용성 전 회장. [허문명 기자]
박 전 회장은 한국 체육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세계유도연맹회장을 맡아 오랫동안 한국 유도를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대한체육회장, IOC위원을 지내며 평창올림픽 유치에 큰 공헌을 했다. 김 전 지사는 “매사 합리적이고 예리한 통찰을 갖고 계신 데다 세계 올림픽 관계자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소통하신 분이라 올림픽 유치 활동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 전 회장에게 이건희 회장과 평창올림픽에 대해 인터뷰하고 싶다는 청을 넣자 흔쾌히 응하겠다는 답이 왔다. 인터뷰는 2024년 11월 말 그의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건강하고 밝은 얼굴에서 생기가 묻어났다.
양궁 정몽구, 권투 김승연, 유도 박용성
이건희 회장을 처음 만난 건 언제였는지요.
“1967년인가 1968년에 내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뉴욕 음식점에서 우연하게 만났어요. 상당히 오래된 얘기죠. 그건 스치듯 만난 거였고. 본격적으로 만난 건 1982년에 기업들이 스포츠 종목을 맡았을 때 삼성이 레슬링을 맡았고, 현대 정몽구 회장은 양궁을 맡으셨고, 한화 김승연 회장은 권투 맡으시고, 저도 한 다리에 껴들어 가서 유도를 맡아 이후 이 회장하고 저하고 스포츠로 맺어지는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기업인들이 각 경기단체를 하나씩 맡으면서 대한민국 스포츠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지요. 그 결실이 88서울올림픽이었고요. 정작 올림픽을 어렵게 유치했는데 메달을 하나도 못 따거나 기껏해야 한두 개 따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들 헌신적으로 노력해서 금메달 12개를 따고 은메달 동메달도 땄습니다. 여기에는 기업들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지요.”
기업인들이 국내 스포츠 경기단체장을 맡고 후원한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기업인들이 스포츠를 후원하는 건 좀 더 들여다보면 단순히 좋아해서가 아니라 국내 스포츠가 발전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거 같습니다.
“1982년에 정부에서 기업인들에게 스포츠 종목을 맡길 때 분위기가 ‘당신네들은 돈만 대시오. 우리가 다 하겠소’ 이랬어요. 어느 회장님이 ‘우리는 돈 대는 기계가 아니다. 직접 체육계 경영에 관여해서 선수들을 잘 키워 7년 뒤 서울올림픽에서 메달이 나오도록 하는 게 우리 목적이다’라고 했는데 우리 심정을 대변한 말이었습니다.
기업들이 돈만 댄다고 메달이 나오는 게 절대 아니잖아요. 실제로 기업들이 각 스포츠 협회를 맡으면서 주먹구구 경영을 바꾸며 개선을 이뤘고, 운영 방식도 많이 바꿨습니다. 우리나라 체육 발전에 큰 공헌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박 회장님과 이건희 회장님은 스포츠 외교도 많이 하셨습니다. 두 분 다 IOC 위원을 하셨죠. IOC 위원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스포츠인으로서 전 세계에서 뽑힌 사람이 기껏해야 115명 이내니까 거기에 뽑힌다는 건 굉장히 큰 영광이죠. 스포츠 발전에 직접적으로 맨 앞에서 관여할 수 있고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자리 아닙니까.
이건희 회장님은 1996년에 IOC 위원이 되셨고 저는 2002년에 됐으니 저하고 몇 년 차이는 있습니다. 이후 여러 국제회의 장소에서 많이 만나 뵙고 의견도 나누고 그러면서 오히려 국내보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자주 만나는 사이였죠.”
평창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세 번째 도전을 앞두고 2009년에 이건희 회장 사면 요청 발표를 직접 하셨죠.
“당시 대한체육회장으로서 일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평창올림픽을 진짜 성공시키려면 이 회장님 사면부터 좀 해달라고 정부에 직접 건의했어요.
이 회장님이 IOC 내에서 갖고 있었던 위상이나 영향력 면에서 빨리 사면이 돼 일선에 나서야지 뒤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컸어요.
또 제가 국제회의 때 나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른 나라 많은 IOC위원이 ‘이건희 회장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왔어요.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였어요. 당시 신문 인터뷰 때도 이야기했는데 ‘천군만마를 얻은 거 같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리(Lee)가 이미 다녀갔다”는 IOC 위원의 말
박 회장님도 IOC 위원을 할 때였는데 이 회장님 힘이 필요했나요.
“이 회장님은 남들이 못 가진 그런 걸 가졌잖아요. 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경영 능력을 국제적으로 증명받았고, IOC 톱 프로그램 스폰서로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저나 또 김진선 유치위원장과는 또 다른 격의 영향력이 있으니까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죠.”
당시 IOC 내에서 이 회장님 위상이나 영향력이란 걸 비유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어느 조직이나 그렇지만 IOC도 핵심 멤버 몇이 이끌어나가는 이너서클이 있어요. 전체 위원은 100명이 넘지만 집행위원회 위원 20~30명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죠.
그 이너서클을 자유롭게 접촉하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회장님 사면이 꼭 필요하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일반 IOC 위원들 만나는 거야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지만 그건 대세에 큰 영향을 안 미치니까.
또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나라가 프랑스하고 독일이었는데, 다 스포츠 강국이고 IOC 내에서도 상당히 영향력 있는 사람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건희 회장 정도 위상에 있는 분이 대표 주자로 나서야지 우리만 가지고는 힘이 모자란다고 정부에 말씀을 드렸죠.”
모두 헌신적으로 열심히 하지 않은 분이 없겠지만 특히 마지막 도전에서 이건희 회장은 이전 두 번의 시도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신 거 같습니다.
“제가 IOC 위원들을 만나면 ‘리(Lee)가 이미 다녀갔다, 우리 집에서 저녁도 같이 먹고 갔다’ 이러는 거예요. 대외 활동을 열심히 적극적으로 하시는 분이 아닌데 외국에 가서 IOC 위원 집에서 저녁까지 드셨다니 ‘이 양반이 정말 올인을 하고 계시구나’ 느낀 적이 있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셔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셨잖아요. 몸 컨디션이 그 정도면 직접 하기는 힘드니까 직원들을 시키거나 못 간다고 하셨을 텐데 말이죠.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걸 보면서 ‘저 양반이 지금 삼성에 에너지를 쓰면 돈을 더 많이 벌었을 텐데?’ 그런 생각도 했어요(웃음). 어떻든 집념이 굉장히 강한 분이구나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세 번째 도전 때는 IOC 위원들을 직접 만나는 데 제재가 생겼고, 2006~2007년엔 스폰서 기업이 유치 활동에 관여하는 것에도 제재가 생긴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세 번째 도전할 땐 정말 인적 네트워크로 접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돈을 쓰기보단 마음을 쓰는 정성을 많이 들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세 번째 도전 때는 내가 IOC 위원을 은퇴한 뒤에 대한체육회 입장에서 유치를 도왔어요. 이 회장은 IOC 위원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더 만남이 자유롭고 편한 상태였죠. 나는 아무래도 IOC 위원직을 그만둔 상태이고, 그냥 국내 대한체육회 회장으로서만 하려 하다보니 제약이 좀 있었죠.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다리가 불편한데도 휠체어를 타고 남의 부축을 받으면서 회의장을 돌아다닌다는 게 웬만한 의지가 없으면 못 하는 거죠. 사실 이건희 회장이 부러울 게 뭐가 있습니까? 올림픽 유치가 무슨 큰 사업거리도 아닌데 정열을 쏟은 거 보면 참 그런 면에서는 굉장히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기업들을 선도한 삼성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 [두산그룹]
“두 번이나 떨어졌으니 약 오르잖아요. 누구나 IOC 위원이 되면 자기네 나라에서 동계든 하계 올림픽을 유치해서 나라를 빛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올림픽 유치는 모든 IOC 위원의 꿈입니다.
스포츠 강국이고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있는 나라 출신 IOC 위원들은 누구나가 다 ‘언젠가 한번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해봤으면’ 하는 꿈을 갖고 있거든요. 이건희 회장님 입장에서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IOC 위원으로서 피날레를 좋게 장식해 제가 보기엔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회장님에 대한 인상적 대목이 있다면요.
“상당히 과묵하시잖아요. 초창기에 우리끼리 만나도 거의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래서 나는 ‘저 양반이 말주변이 본래 없어서 말씀을 안 하시나’ 싶어서 삼성에 있는 친구들한테 물어봤어요. 웬걸! 말문이 트이시면 6시간 원고 없이도 하신다는 거예요.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때도 그랬다면서 원고 없이 몇 박 며칠씩 하셨다면서 말이죠.
그래서 제가 ‘아, 이 회장은 필요할 때만 말을 하고 듣는 분이로구나’ 싶었어요. 지도자로서 상당히 좋은 장점이죠. 자기 말이 앞서기보다는 남의 말을 다 들어주고 꼭 필요할 때만 말하는 거, 제가 볼 땐 가장 장점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두 분 만나셔서 스포츠와 경영이라든지, 이런 거에 대한 사담을 나누신 적 있나요.
“그런 걸 구체적으로 나눈 적은 없지만 스포츠 단체를 운영하거나 회사를 운영하는 건 다 똑같아요. 좋은 사람 골라서 열심히 일하게 해주면 좋은 결과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88서울올림픽 할 때에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거지. 스파르타식으로 훈련만 하다고 해서 메달이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이 회장님은 원 없이 일하고 가신 분이라고 봅니다.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바를 다, 목표했던 바를 다 이루고 가셨으니까. 삼성도 대한민국 최고 기업으로 키웠고, 또 스포츠에도 관여해서 우리나라 수준을 국력보다 더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상당히 큰 보람을 느끼셨을 겁니다.
삼성이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앞서가고, 또 선대 이병철 회장 때부터 큰 기업을 일으키면서 많은 혁신에 앞장서셨죠. 우리 기업들은 삼성이 어떻게 하느냐를 보고 항상 따라가는 그런 위치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떤 거는 삼성 거를 베껴서 우리가 성공한 것도 있고, 어떤 건 기업 사이즈나 그런 거에 맞지 않아서 우리가 받아들였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도 있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삼성이 여러 가지 앞장서서 나가준 것이 나머지 기업들에 큰 자극과 교훈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반도체 같은 거 일본 사람들이 절대 성공 못 한다고 조롱하고 비아냥대던 걸 성공시켰잖아요. 그런 도전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삼성이 있었고, 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 전 회장으로부터 직접 듣는 삼성과 호암, 이건희 회장에 대한 칭찬은 신선했다. 애초에 비서실을 통해 인터뷰 청을 넣었을 때 대기업 총수들은 만나기도 어렵지만, 특히 경쟁이 심한 한국 기업문화에서 남의 기업과 총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기자를 만나줄 것인지 반신반의했었다.
하지만 박 전 회장은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했고, 평창올림픽 유치를 화두로 한 이회장의 노력을 평가하는 데 진심이었다. 마지막에 ‘대한민국 기업들이 삼성으로부터 배웠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열심히 기업을 일궈온 사람들만이 서로 간에 가질 수 있는 동질감과 이해가 느껴졌다. 나라가 어수선한데 자기 살길만 찾는 정치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겹쳐서 였을까, 지금 사회 지도자들에게 저런 박 전회장이 보여준 품과 아량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1시간가량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비서실 앞에 ‘박승직상점’이라고 한자로 적힌 나무 간판이 보였다. 1896년 8월 1일 서울 종로4가 15번지에서 박승직(1864~1950) 창업자가 설립한 국내 최초 현대식 상점 ‘박승직상점’이 내걸었던 그 간판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의 뿌리를 눈앞에서 실체로 확인하는 듯해 숙연해졌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도 묵묵히 자기가 딛고 있는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기업인들과 근로자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힘이라는 자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