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총선서 극우정당 2위…나치 이후 부는 우향우 바람

[조은아의 유로프리즘] 트럼프 집권 후 첫 주요국 선거, 초미의 관심

  • 조은아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입력2025-03-16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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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위기, 난민 범죄 증가로 극우 지지↑

    • 중도보수가 극우 집권은 막았으나

    • 反이민 정책, 국방력 강화 등 1990년대로 회귀

    • 佛 핵우산 참여 등 美와 거리두기 나서

    독일 총선을 하루 앞둔 2월 22일(현지 시간) 극우 성향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수도 베를린 도심에서 지지자들과 집회를 열고 있다. [조은아]

    독일 총선을 하루 앞둔 2월 22일(현지 시간) 극우 성향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수도 베를린 도심에서 지지자들과 집회를 열고 있다. [조은아]

    “여기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조심하세요.” 독일 총선 하루 전인 2월 22일(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 동부의 린넨 쇼핑센터 앞. 한 시민은 기자에게 이같이 귀띔했다. 마침 이곳에선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총선 막바지 유세에 나서고 있었다. 시민의 말처럼 ‘외국인 통제’를 주장하는 이 정당의 집회는 백인 일색이었다. 곳곳에 ‘국경을 통제하라’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란 푯말들이 눈에 띄었다. AfD라고 적힌 파란 현수막 아래 한 당원이 단상에 올라 “외국인들이 더는 못 오게 국경을 막아야 한다”고 외쳤다.

    도로 건너 반대쪽에선 좌파 단체들이 AfD에 맞서 ‘맞불 집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AfD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나치야 꺼져라”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필요 없다”고 외쳤다. 양측은 서로 욕설과 비난을 쏟아내며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경찰은 집회 장소는 물론 주변 쇼핑몰 층마다 배치돼 삼엄한 경비에 나섰다.

    다음 날 열린 독일 총선은 극우의 부상과 이에 맞선 좌파의 반발로 과열된 양상을 보였다. 이날 투표율은 1990년 독일 통일 뒤 최고치인 83.5%. 현 정권에 불만을 품은 극우 지지자들이 늘자 이를 저지하려는 진보정당 지지자들도 결집한 것으로 보인다. 2월 23일 베를린 도심의 한 투표소에서 만난 베를린 시민 카트린 훈제 씨는 “극우를 저지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 투표하러 왔다”며 “변화가 필요하긴 하지만 극우가 막으려는 인도적 정책은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극우 정당, 사상 첫 2위의 의미

    차기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기독민주당(CDU) 대표(왼쪽)가 2월 23일 총선 직전 뮌헨에서 선거 유세를 마무리하고 있다. [메르츠 대표 X]

    차기 총리로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기독민주당(CDU) 대표(왼쪽)가 2월 23일 총선 직전 뮌헨에서 선거 유세를 마무리하고 있다. [메르츠 대표 X]

    이날 열린 독일 총선은 올 1월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처음 실시된 주요국 선거로 관심을 모았다. 선거 결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대표가 이끄는 중도보수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이 28.5%를 득표해 1당에 올랐다. 과반을 달성하지 못해 다른 당과 연정을 꾸려야 한다. 연정 구성에 성공하면 2021년 12월 당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물러난 뒤 3년여 만에 독일에서 보수가 재집권하게 된다.

    올라프 숄츠 현 총리가 이끈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은 경제난과 이민 문제 대응에 실패하며 16.4%를 득표해 3위에 그쳤다. 반면 극우 성향인 AfD는 20.8%로 2위를 차지해 SPD를 눌렀다. AfD의 득표율이 이전 총선인 2021년 10.3%의 2배 이상으로 뛴 것이다.

    이 정당은 국경 통제 강화, 유럽연합(EU) 탈퇴 가능성 논의, 기후변화 정책 반대 등 강경 보수 성향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미국 CNN방송은 “독일 정치제도는 극단주의자들을 배제하도록 돼 있지만 AfD가 독일 정치에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독일은 새로운 정치 현실에 눈뜨고 있다”고 보도했다.

    ‌‌1당에 오른 CDU·CSU 연합은 일단 AfD와의 연정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패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우 정당은 역사상 처음으로 최대 의석을 차지하게 됐다. AfD 스스로 의회에서 의석을 늘린 만큼 독일 의회에서 극우 바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AfD 공동 대표인 앨리스 바이델은 2월 23일 저녁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뒤 베를린에서 한 연설에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고 자축했다.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알리스 바이델 공동 대표. [AP뉴시스]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알리스 바이델 공동 대표. [AP뉴시스]

    ‌집권당이 참패하고 극우가 부상한 주된 이유는 경제위기가 대표적이다. 2월 23일 베를린 도심에서 만난 주부 모니카 슐츠 씨는 “장 보는 비용이 예전에 비해 50% 이상 늘어 너무 화가 난다”며 AfD를 지지하겠다고 했다. 경제를 확실히 개선할 정당이 AfD라고 본다는 이야기였다.

    유럽연합(EU)의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은 실제 위기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2023년과 2024년 각각 –0.3%, -0.2%씩 성장하는 저조한 성적표를 썼다. 2002년, 2003년 이후 21년 만에 처음으로 2년 연속 역성장한 것이다.

    경제난의 원인으로는 수출 감소가 꼽힌다. 2023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43%를 수출에 의존하는 독일은 주요 수출 시장인 중국의 경기둔화로 수출에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올해 들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부과 등 통상 전쟁이 점화되며 향후 수출 전망도 우울하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에너지 가격의 급등도 결정적이었다. 독일은 당초 재생 에너지를 중시하는 기조에 따라 탈(脫)원자력 정책을 폈다. 원전 대신 신재생에너지를 늘리고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확대했다. 그 덕에 독일은 ‘임금은 높아도 에너지 비용은 낮다’는 장점을 자랑으로 삼았다. 기업들이 인건비 비용을 에너지 비용 절감으로 상쇄할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며 상황이 뒤바뀌었다.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막히며 에너지값이 치솟았고 이는 서민경제에 직격탄이 됐다.

    로날드 글레저 AfD 베를린지부 대변인은 2월 22일 베를린에서 기자를 만나 “독일 경제는 성장하지 않고 있다”며 “고임금에도 경쟁력을 떠받쳐줬던 에너지 가격도 높아져 이제 독일은 산업 기반을 곧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기에 난민 관련 범죄가 증가하며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마침 총선 이틀 전인 2월 21일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추모공원에서 시리아 난민이 흉기를 휘둘러 스페인 관광객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극우 정당 지지 표심을 자극했다. 총선 유세 마지막 날 AfD 지지자들은 “늦은 저녁에도 거리를 돌아다니기 안전한 도시에서 살고 싶다”고 외쳤다.

    특히 독일의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에서 이런 불만이 두드러졌다. 이 지역에서 극우 지지가 높아진 이유다. AfD는 대개 경제가 더 어려운 과거 동독 지역에서 인기가 높았지만 이번엔 서부 독일의 러스트벨트에서 지지율을 높였다. AP통신에 따르면 독일 러스트벨트를 대표하는 뒤스부르크 북부 지역구에서는 AfD 지지율이 24.6%나 됐다. 전국 지지율 20.8%를 훨씬 웃돌았다.

    원래 이 지역은 중도좌파인 SPD의 표밭이었다. 철강산업 노동자들이 많아 진보적 색채가 강했다. 하지만 철강산업이 쇠퇴하며 지역 경제가 어려워졌고, 자국 우선주의적 정책을 옹호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산업 쇠퇴로 일자리가 줄며 사람들이 떠났다. 대신 이민자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지역 경제가 팍팍해지며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는다’ ‘외국인들이 난민을 위한 혜택을 노리고 들어온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여기에 난민 범죄가 늘며 반(反)이민 정서가 더욱 공고해졌다.

    차기 정부 “미국에서 독립”

    극우의 부상을 간신히 막은 1당 CDU의 메르츠 대표가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다. 한때 정적(政敵)이었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에게 밀려 정계에서 사라졌던 그는 이번 총선에서 화려하게 귀환했다. 70세 ‘보수 올드보이’가 위태로운 독일 안보와 경제를 어떻게 재건할지 주목된다.

    메르츠 대표는 독일 북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州) 브릴론 출신으로 산업 전문 변호사로 경력을 시작했다. 정계에 입문한 시기는 1989년 유럽의회 의원이 됐을 때다. 정치 경력이 무려 36년인 셈이다.

    그는 친(親)기업 정책으로 중도보수 성향인 CDU에서 입지를 넓혔다. 드디어 2000년에는 원내대표에 올랐다. 하지만 라이벌인 메르켈 전 총리가 2005년 총리가 되면서 2009년 정계를 떠났다. 그 후엔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독일법인 이사회 의장 등 다양한 민간기업에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정계 복귀 당시 그가 공개한 연간 수입은 100만 유로(약 15억 원)였다.

    정계 복귀 뒤 CDU 대표 선거에 출마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메르켈 전 총리의 뒤를 이은 아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워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2021년에도 메르켈 전 총리의 후계자로 꼽힌 아르민 라셰트에게 밀렸다. 그는 메르켈 전 총리가 정계를 떠난 2021년 12월에야 드디어 기세를 폈다. 세 번째 도전 끝에 당대표에 당선된 것이다.

    그가 부상한 비결에 대해 알렉산더 클락슨 영국 킹스칼리지 런던의 독일 및 유럽학 강사는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1990년대 스타일의 총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CDU가 배출한 헬무트 콜 전 총리(1982∼1998년 집권)처럼 1990년 독일 통일 뒤 경제를 일으키고 사회를 안정화한 옛 보수의 리더십을 발휘할 것이란 기대를 받고 있다는 얘기다. CDU가 추구하는 정통 보수의 가치로 최근 경제난, 이민자 문제로 혼란스러운 사회를 재건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 메르츠 대표는 선명한 보수 색채와 자강론 등 자국 중심적 기조로 지지를 얻었다. AfD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총리가 되면 취임 첫날 모든 국경을 통제하겠다”는 반(反)이민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이민 범죄에 불안해진 표심을 잡아두기 위한 취지로 보인다.

    메르츠 대표는 기존 문법을 깨는 외교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우선시하는 CDU의 전통 노선에서 벗어나 유럽 독자 노선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르츠 대표는 총선 과정에서 “유럽의 핵보유국인 영국, 프랑스와 함께 핵 방위가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며 미국 의존을 벗어난 자강론을 강조했다. CDU 창립 멤버로 독일 초대 총리를 지낸 콘라트 아데나워(1949∼1963년 재임)가 미국의 전술핵을 자국에 배치하며 친미 노선을 걸은 것과 비교된다.

    그는 2월 23일 총선이 끝난 뒤에도 독일 공영방송 ARD와 ZDF에 출연해 “내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가능한 한 빨리 유럽을 강화해 단계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메르츠 대표가 영국과 프랑스의 핵우산 공유를 거론한 점은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이에 대해 ‘포린폴리시’는 “독일에서 있는 논쟁에서 큰 변화를 보여준다”며 “메르켈 전 총리와 숄츠 전 총리는 그간 유럽에서 핵 억제에 대한 전략적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을 꾸준히 무시했다”고 짚었다. 1960년대 샤를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독자 핵 개발을 추진한 이후 60여 년 만에 ‘프랑스 핵우산론’이 독일에 받아들여지는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메르츠 대표의 이례적 기조 변화에 마크롱 대통령은 호응하듯 바로 반응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3월 5일 TV에 방영된 연설에서 “우리의 (핵) 억제력으로 유럽 대륙의 동맹국을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략적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메르츠 대표는 연정 구성 전부터 재무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는 3월 4일 “국가 방어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겠다”며 독일 헌법을 개정해 국방 및 안보 지출의 한도를 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국가 부채를 제어하는 재정 준칙을 완화해 국방비를 수월하게 지출하도록 조치하겠다는 취지다. 향후 10년간 교통, 에너지, 주택 등에 5000억 유로(약 775조 원) 규모의 인프라 펀드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경기부양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며 유럽 증시가 강한 상승세를 보였고, 유로화는 강세를 나타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메르츠 대표의 초기 행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독일의 영향력이 없다면 유럽은 정복욕에 빠진 러시아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라며 “유럽 대륙은 메르츠가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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