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법 개정하려던 민주당, ‘신중론’으로 선회
북한 외 적용 대상 없어 외환죄 전체 사문화
중국 및 경쟁국, 국내 기업서 기술 빼돌리기 심각
국가기밀 개념·범위 대폭 축소…처벌 어려워
중국, 삼성전자 출신 한국인 기술자에 반간첩법 적용
미·영·독·프 간첩법, 국가기밀 외 첩보·정보로 확대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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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은 ‘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때문에 민주당이 말을 바꿨다고 한다. 최근 민노총 조직국장 등 간부들에게 간첩죄로 징역 15년 등의 중형이 선고되자 민노총 관계자들이 민주당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도 비슷한 시기에 민변 등과 공동으로 간첩법 개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가기밀에 대한 제한 규정 없이 간첩죄 적용 범위를 확장하면 국가정보원(국정원)이 국내 사안에 개입할 여지가 커지고,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추진하는 국정원의 수사권 복원이 함께 이루어지면 간첩 양산과 인권침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말했다는 ‘내부적 악용 가능성’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간첩죄는 현행 형법 제2편 각칙 제2장 외환의 죄에 관한 장 제98조에 규정돼 있다. 간첩죄를 포함한 외환의 죄에 해당하는 모든 범죄가 적국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형법이 연혁적으로 전시형법(戰時刑法)의 성격을 갖는 1940년 일본 개정형법 가안(假案)을 모델로 입법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대법원 판례에 의해 ‘준적국’에 해당하는 북한 공산집단을 제외하고는 적용 대상이 없어 외환의 죄 전체가 사문화된 실정이다. 북한이 아닌 다른 외국 등 세력에 의해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간첩 행위가 있어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노총 ‘간첩단 의혹’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마친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2023년 1월 18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본부에서 압수물품을 들고 나오고 있다. 뉴시스
군사·산업 기밀 유출해도 행정 형벌에 그쳐
현행 간첩죄의 맹점은 과거 ‘시노하라 사건’과 최근 일어난 ‘국군정보사 군무원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두 사건의 경우 일본이나 중국에 군사기밀을 유출해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했는데도 간첩죄로 처벌하지 못하고 ‘군사기밀보호법’을 적용하는 데 그쳤다. 반면 미국은 한국계 미국인이 미국 정부가 보유한 북한 관련 정보를 한국 측에 유출한 이른바 ‘로버트 김 사건’과 ‘스티븐 김 사건’에서 관련자를 모두 간첩죄로 처벌했다. 중국도 최근 삼성전자 출신 한국인 기술자에게 반(反)간첩법을 적용해 구속했다. 우리나라의 간첩법 적용 범위가 외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지 못한 것이다.
최근 경제·산업계에서도 ‘국가핵심기술’의 해외 유출과 관련해 간첩죄 적용 대상을 적국이 아닌 외국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경쟁 국가들은 개인이나 기업이 아니라 국가전략 차원에서 ‘국가핵심기술’을 절취·유출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국가핵심기술’의 유출에 대해서는 ‘산업기술보호법’ ‘부정경쟁방지법’ 등으로 산업의 관점에서만 접근해서는 안 되고,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간첩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의 입법례를 살펴보면, 미국은 이미 ‘경제간첩법’을 제정해 외국 등 세력에 의한 ‘협의의 경제 간첩’뿐 아니라 상업적 목적으로 기업비밀을 절취·유출하는 행위를 ‘광의의 경제 간첩’으로 규율하고 있다. 외관상 개인·기업 간 기업비밀의 절취·유출로 보여도 배후에 외국 등 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국가안보 차원에서 방첩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대만도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국가핵심기술을 중국을 포함한 외국 등에 넘기는 행위를 경제 간첩으로 처벌하는 규정을 도입했고, 영국 또한 ‘국가안보법’을 제정해 산업기술 유출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처벌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국가핵심기술’은 국가기밀에 해당하므로 그동안 최첨단 기술보유국으로 성장한 우리도 외국 입법례에 따라 간첩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민주당은 군사기밀과 산업기밀의 유출은 특별법인 ‘군사기밀보호법’과 ‘산업기술보호법’에 의해 처벌할 수 있는데, 일반법인 형법에 외국 등으로 범위를 확장한 간첩죄를 두어 무겁게 처벌하는 것은 일반법과 특별법의 법체계에 혼란을 줄 수 있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형법상 간첩죄의 보호법익과 구성요건이 ‘군사기밀보호법’ ‘산업기술보호법’의 그것과 달라 일반법과 특별법의 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법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형법상 간첩죄의 보호법익은 국가적 법익인 ‘국가의 외적 안전’이고, 국가의 외적 안전을 해할 의사로 위해를 초래한 행위를 처벌하는 ‘형사형벌’에 속한다. 그러나 ‘군사기밀보호법’ ‘산업기술보호법’은 법률에 따라 지정·보호·관리되는 군사기밀이나 산업기밀 그 자체를 보호법익으로 하고, 그 보호·관리에 관한 규정을 위반한 행위를 처벌한다는 점에서 ‘행정형벌’의 성격이 강하다.
포괄적 적용, 강력 처벌…글로벌 추세
‘군사기밀보호법’ ‘산업기술보호법’에 의해 보호·관리되는 군사기밀이나 산업기밀을 ‘국가의 외적 안전을 해할 의사’로 탐지·수집하면 형법상 간첩죄로 무겁게 처벌된다. 형법상의 간첩죄의 법정형이 ‘군사기밀보호법’ ‘산업기술보호법’보다 무거운 것은 ‘국가의 외적 안전을 해할 의사’가 있고 그에 따른 ‘위해의 발생’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반법인 형법상의 간첩죄에 대한 특별법은 군형법상의 간첩죄, 국가보안법상의 간첩죄, 가칭 ‘산업스파이법’ 등이고, ‘군사기밀보호법’ ‘산업기술보호법’에 대한 일반법은 가칭 ‘국가기밀보호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가칭 ‘국가기밀보호법’ 역시 정치적 타결을 보지 못하고 입법해태(立法懈怠) 상태에 있다.
나아가 민주당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폭넓게 정의되던 국가기밀의 개념을 외국 등에 적용하면 처벌 범위가 지나치게 확장될 우려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해 국가기밀의 개념과 범위를 대폭 축소한 사실과 이에 따른 실무의 법 적용 현실을 전혀 도외시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대법원은 간첩죄의 행위 객체인 ‘국가기밀’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비공지성, 보호의 필요성, 고도의 기밀성 등의 요건을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고 판시해 국가기밀의 개념과 범위를 대폭 축소했다. 이에 따라 어떤 정보가 적국이나 반국가단체에 유리하고 대한민국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해도 위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국가기밀에 해당하지 않아 간첩죄 적용이 불가능하게 됐다. 2017년 북한 공작원과 연계해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기소된 이른바 ‘충북동지회(청주 간첩단)’ 사건에서 보듯이 간첩단 사건에 간첩죄 처벌이 없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폭넓게 인정되는 국가기밀’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2021년 8월 18일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 “청주간첩단의 21대 총선 부정선거 개입”을 주장하며 특검을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뉴시스
국가에 대한 반역적·배반적 활동이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위한 것인 경우, 간첩죄 적용이 어려우면 국가보안법에 규정된 선동·선전, 허위사실 날조·유포, 자진지원, 금품수수, 이적표현물 제작, 편의 제공, 무고·날조 등 조항으로 대처할 수 있다. 외국 등 세력을 위한 경우에도 당연히 이런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엄격한 의미의 ‘국가기밀’은 물론이고 ‘단순 기밀이나 첩보’를 탐지·수집·누설하는 행위, 나아가 ‘기타 반역적·배반적 활동’에 대한 처벌 규정이 검토돼야 한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외국에서는 간첩죄의 행위 객체를 엄격한 ‘국가기밀’에 한정하지 않고 첩보 및 정보로 확대하면서 단지 법정형을 달리하고 있다. 행위의 태양(態樣)도 ‘탐지·수집·누설’로 제한하지 않고 외국 등과의 직·간접 연락 및 접촉, 금지된 장소 접근, 불법적 전달·교신, 파괴 행위, 허위정보 제공, 정보 내통 등 다양하게 인정하고 있다. 중국의 ‘반간첩법’에는 유인·협박·매수를 통해 반역을 유도하는 행위, 국가기관·기밀관련부서·핵심정보 인프라 시설에 대한 사이버 공격 행위, 기타 중국의 국익을 손상하는 행위 등이 간첩 활동에 포함돼 있다.
국익 위한 간첩법 개정, 더는 미뤄선 안 돼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8월 1일 간첩법 처벌 적용 대상을 북한에서 외국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간첩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뉴시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민주당 내에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조직적 움직임이 있는 것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을 폐지한 것도 모자라 행정기관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행정조사권을 박탈하는 입법을 시도하더니 국가보안법 폐지에 나선다는 것이다. 간첩법 개정을 빌미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시도하면 반국가단체인 북한 관련 간첩 활동에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최근 잇달아 발표된 민노총 간첩단 사건이나 창원·제주 간첩단 사건과 같은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민주당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내부적 악용 가능성’과 같은 과거의 정치적 트라우마 때문에 간첩법 개정에 소극적인 것은 시대착오이고 국가적 자해행위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적과 우방의 구분 없이 국가이익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정보 전쟁을 전개하고 있고, 군사 안보에서 경제 안보로 패러다임이 바뀐 지 이미 오래다. 간첩법 개정은 정치적 유불리나 정략적 차원이 아니라 오직 국가안보와 국가이익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외국 등 세력을 위한 간첩죄’ 조항 하나라도 먼저 신설해서 국가 방첩 체계의 구축이라는 큰 방향을 법률로서 제시해야 한다. 간첩법 개정을 더는 미뤄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