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호

“내가 69세? 신체 나이 맞춰 49세로 해달라”

[이명현의 과학으로 보는 세상] 초고령사회 불붙은 ‘나이 논란’

  • 이명현 과학콘텐츠그룹 ‘갈다’ 대표

    입력2025-04-06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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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네덜란드 법정서 열린 나이 변경 소송

    • “성별 바꿀 수 있다면 나이도 조정 가능해야”

    • 동일 나이라도 신체 나이 최대 33세 차이나

    • 과학기술 발전으로 법적 나이 개념 바뀔 수도

    신체 나이가 젊은 ‘건강한 노인’이 늘어나면서 현재의 나이 시스템이 개인의 상태를 제대로 알려주는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사진 속 인물은 본문 내용과 관련 없음). Gettyimage

    신체 나이가 젊은 ‘건강한 노인’이 늘어나면서 현재의 나이 시스템이 개인의 상태를 제대로 알려주는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사진 속 인물은 본문 내용과 관련 없음). Gettyimage

    2018년 네덜란드에서는 흥미로운 재판이 열렸다. 동기부여 강사 겸 작가로 활동하던 에밀 라텔반트가 자신의 법적 나이를 조정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949년 3월생이었던 그는 소송 당시 출생일 기준으로 만 69세였는데, 법원에 “49세로 나이를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본인의 나이를 무려 스무 살이나 어리게 인정해 달라는 파격적 요구였다.

    라텔반트는 다양한 근거를 들었다. 먼저 자신은 의학적으로 건강하고 젊기 때문에 신체 나이에 걸맞게 나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트랜스젠더의 사례도 언급했다. “성별을 바꿀 수 있다면 법적 나이 역시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텔반트는 나이를 변경하면 삶의 만족도가 올라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체 나이에 맞춰 법적 나이를 줄이면 취업의 기회가 늘고, 데이트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더 많은 이성과 만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법적 나이 변경, 사회시스템 붕괴 위험 있어

    네덜란드는 그간 안락사, 동성 결혼, 대마초 흡연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전향적 입장을 취해 왔다. 이에 라텔반트의 소송 역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은 네덜란드 법원이 이른바 법적 나이 문제에 대해서도 전향적 결정을 내릴 것인지 기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덜란드 법원은 라텔반트의 소송을 기각했다. 한 사람의 출생 연도는 법적으로 기록된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에 개인이 임의로 변경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트랜스젠더가 성별을 변경하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로, 출생 연도와는 경우가 다르다고 봤다. 네덜란드 법원은 라텔반트가 ‘개인의 신념’과 ‘법적 현실’을 혼동했다고 지적했다.

    네덜란드 법원이 가장 우려한 부분은 사회시스템의 붕괴 가능성이었다. 신체 나이 등을 이유로 법적 나이를 바꾸는 것을 허용하면 여러 사회문제가 촉발할 수 있다. 법적 나이에 기반한 여러 사회제도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투표권, 연금 수령, 자동차 운전면허 발급 등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제도는 법적 나이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각종 권한과 의무의 기준이 되는 성년 기준 역시 마찬가지다. 법원은 성별 변경과 달리 법적 나이의 변경은 기존 사회시스템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개인이 저마다의 이유로 법적 나이를 조정하게 되면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15세 청소년이 자신의 정신연령은 18세를 훌쩍 넘겼으니 투표할 수 있도록 요청한다고 생각해 보라. 반대로 70세 노인이 신체 나이를 이유로 50세로 바꿔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개인은 회사를 오래 다녀 삶이 풍족해질 수 있지만 사회적 파장이 불가피하다. 연금 지급 시기 및 액수가 달라지고, 고용 연령 제한 같은 제도 역시 무의미해진다. 상황이 악화되면 연금 및 보험 시스템이 무너질 수도 있다.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나이 변경을 악용할 가능성도 있다. 성인 범죄자가 형을 면제받거나 형량을 낮추기 위해 미성년자로 인정받으려 하는 경우다. 마찬가지로 군복무 의무를 회피하거나 세금을 줄이려고 나이를 변경할 수도 있다.

    앞선 재판에서 네덜란드 법원은 법적 나이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정체성이 아니며, ‘법적 기록의 일부’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신체 나이(biological age)는 법적 나이, 정확하게는 ‘역연령(chronological age·출생을 기점으로 한 달력상의 나이)’과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법적 나이의 변경이 허용되면 사회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커 이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핵심 논리였다.

    그럼에도 라텔반트의 소송은 우리에게 여러 의문을 남긴다. 사람은 저마다 노화 속도가 다르며 신체 나이 역시 제각각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같은 나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나 외모가 차이 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기존의 나이 체계는 이 같은 차이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각기 다른 신체 나이를 지닌 사람을 동일하게 분류해야 할까.

    텔로미어는 염색체의 양 끝에 위치한 특수한 DNA 구조다. 텔로미어의 길이는 나이 측정에 중요 지표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텔로미어는 염색체의 양 끝에 위치한 특수한 DNA 구조다. 텔로미어의 길이는 나이 측정에 중요 지표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정교해진 신체 나이 개념, 새로운 장 맞아

    신체 나이의 개념이 정교해지면서 관련 논의는 새로운 장을 맞이할 전망이다. 향후 인간의 활동 지표로서 법적 나이보다 신체 나이가 중요해지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법적 나이와 신체 나이의 간극이 커질수록 기존 나이 체계가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은 커질 것이다.

    이미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어떻게 하면 개인의 건강을 정확히 반영해 숫자로 나타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른바 ‘건강 나이’를 중시하는 양상도 이와 맞닿아 있다. 건강 나이란 개인의 건강 상태와 신체 기능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산출한 나이다. 최근 들어 “건강 나이야말로 삶의 질과 평균수명을 결정해 주는 ‘진짜 나이’”라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법적 나이와 신체 나이의 차이가 부각되는 연구 결과의 발표 역시 관련 흐름을 앞당기고 있다. 2015년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뉴질랜드 더니든에서 38세 954명의 신체 나이를 측정해 보니 이들은 각기 다른 나이를 가졌다는 결과가 관측됐다. 연구진은 참가자의 생물학적 노화 속도를 18개의 생체 지표를 통해 조사했고, 28세에서 61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체 나이가 측정됐다. 같은 나이의 사람일지라도 최대 33년의 신체 나이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아브라함 아비브 박사의 연구팀이 수행한 텔로미어 연구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나이가 같더라도 텔로미어의 길이는 달랐다. 심한 경우 20년에 해당하는 차이가 발견되기도 했다. 텔로미어는 염색체의 양 끝에 위치한 특수한 DNA 구조로 세포분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텔로미어의 길이가 조금씩 줄어들기 때문에 그 길이는 생물학적 나이 측정에 중요 지표로 사용된다.

    신체 나이를 결정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식생활, 운동, 수면, 스트레스 관리 등 생활 습관 전반이 신체 나이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염물질에 대한 노출 정도와 만성질환의 유무도 마찬가지다. 이 밖에도 사회적·경제적 지위 또한 신체 나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유전적 요인도 중요하다. 실제로 신체 나이는 법적 나이보다 건강 상태와 질병 위험, 사망률을 더욱 정확하게 예측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때문에 유의미한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앞서 ‘나이 변경’이 허용됐을 때 생길 수 있는 혼란에 대해서 다뤄봤다. 반대로 신체 나이에 기반해 법적 나이를 산정하면 어떤 긍정적 변화가 있을까. 먼저 나이로 인한 단순 차별이 감소할 것이다. 단순히 나이가 많거나 적다는 이유로 특정 기회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줄어들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장년층의 취업 기회 역시 확대될 전망이다. 고령화 현상이 심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는 의미 있는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사회적으로 연령이라는 개념이 유연해지는 효과 역시 기대할 만하다. 이는 개인이 삶을 더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하게 된다. 가령 의료 및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개인별 맞춤 나이 시스템’이 도입될 수 있다. 이는 오늘날의 집단화된 사회시스템을 개인 맞춤형 시스템으로 전환하게 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 관련 변화는 개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만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전망이다.

    추가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라텔반트는 법정에서 나이 변경을 ‘성별 정정’, 즉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변경과 비교했고, 네덜란드 법원은 둘은 다르다고 반박했다. 성별 변경은 개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며 과학적·사회적 논의를 거친 다음에야 성별 정정이 가능해졌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양자가 완전히 다른 사안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성별 역시 예전에는 출생 시 기록되는 객관적 정보로만 여겼다.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성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정하는 풍토가 자리 잡았고, 성별 정체성의 문제로 인식하게 됐다. 같은 논리로 향후 신체 나이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쌓인다면 나이 역시 인간 정체성의 일부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

    미래의 나이 체계는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신체 나이 측정법이 정교해지면서 개인의 유전자, 건강 상태, 신체 기능을 기준으로 새로운 연령 측정 방식이 등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출생 기반 나이가 60세이고 신체 나이가 40세인 사람이 있다면, 두 정보를 나란히 기술한 후 법적 나이를 50세로 산정하는 식이다. 이외에도 인지 능력과 신체 능력, 경험 등이 법적 나이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현대사회는 출생 연도를 바탕으로 한 나이를 기준으로 여러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향후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사회 분위기 역시 변화하면 법적 나이의 개념이 바뀔 가능성도 있다. 가령 ‘개인의 성숙도’를 평가해 법적 성년 여부를 정할 수 있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 분석 기술이 발달하면서 ‘맞춤 연령’이 도입될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관련 방식이 표준화하면 법적 나이를 대체하는 새 지표로 사용될 수 있다.

    신체 나이에 기반한 새로운 나이 체계를 도입하려면 두 가지 난관을 넘어야 한다. ‘표준화된 지표’를 만들 수 있는지와 ‘사회적 합의’를 얻을 수 있느냐다. 현재 사용하는 출생 연도 및 날짜는 객관적 역사 기록이다. 이와 유사한 수준의 형식상 객관성을 갖춘 시스템을 찾기 어려운 것 역시 사실이다. 향후 출생 연도를 대체할 만한 객관적이고 표준적인 나이 지표를 설계할 수 있을지가 중요해질 전망이다. 관련 법 제정 역시 필수적이다.

    과거의 65세와 오늘날의 65세는 다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월 28일 법정 정년을 현행 60세에서 65세로 상향할 것을 권고했다. 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노인 빈곤 문제가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신체 나이가 이전보다 젊어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은 초고령사회 대책의 일환으로 70세 이후로도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활동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조성하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 이중근 대한노인회장은 법적 노인 연령 기준을 65세에서 75세로 단계적으로 상향하자고 제한했다.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심각해지자 ‘노인의 기준’을 재정의하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해당 주장이 힘을 얻는 배경에는 “과거의 65세와 오늘날의 65세는 다르다”는 인식의 확산 역시 영향을 미쳤다.

    의학이 발달하고 생활 습관이 개선되면서 실제 나이보다 신체 나이가 젊은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향후 이 같은 차이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신체 나이에 대한 정보가 늘어나면 ‘나이 논쟁’은 한층 본격화할 수 있다. 좋든 나쁘든 법적 나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제기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셈이다. 라텔반트는 네덜란드 법정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패배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명현
    ‌● 1963년 출생
    ● 연세대 천문기상학과 졸업, 네덜란드 흐로닝언대 천문학 박사
    ● 과학문화민간협의회 회장
    ● 과학콘텐츠그룹 갈다 대표
    ● 저서: ‘지구인의 우주공부’ ‘이명현의 과학책방’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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