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은 EU 헌법을 거부했다. 영국은 EU 헌법 비준을 위한 국민투표 자체를 무기한 연기한 상태다. 기대를 모으던 EU 정상회담마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유럽통합의 ‘화룡점정’, EU 헌법은 여기서 물거품이 되는가.
지난 6월 중순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담이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나자 영국과 독일 등 주요 회원국의 언론들이 내린 진단 결과다. 이번 회의는 5월말 프랑스에 이어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도 EU 헌법안(이하 EU 헌법) 비준이 부결되자 긴급 소집된 것이었다. EU 헌법의 탄생은 이렇게 좌절되고 마는가. 만일 그렇다면 EU의 미래는? 무려 50여 시간 동안 진행된 이번 회담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는 회원국의 연이은 헌법안 부결에 대한 대책과 EU 중기(2007~2013)예산안 합의, 터키 가입 여부에 대한 논의 등이었다. 그러나 회담은 중기예산안을 놓고 프랑스와 영국이 장시간 승강이를 벌이는 바람에 나머지 의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도 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프랑스와 영국의 마찰은 예견된 일이다. 프랑스는 지난 50여 년 동안 독일과 함께 유럽통합의 견인차 구실을 해왔다. 하지만 지난 5월 국민투표 결과 국민의 54%가 반대표를 던져 유럽헌법을 부결시켰다. 충격은 컸다. 엄밀히 말하면 투표 결과는 프랑스 국민이 EU 헌법을 거부했다기보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는 게 좀더 사실에 가깝다.
일반 국민이 EU 헌법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경제 여파는 곧장 피부로 느끼는 게 국민이다.
프랑스 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지난 몇 달간 공공부문의 파업이 잇달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경제 진작을 위한 정책수단의 하나인 금리를 조정할 수 없는 형편이다. 유럽 단일 화폐인 유로화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유로에 가입한 12개 회원국의 금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에서 결정한다.
또 EU 헌법이 지나친 시장 중심의 ‘앵글로 색슨’식 경제모델을 반영하고 있다는 일부 비판이 집중적으로 부각된 것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프랑스 외교정책 기조는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을 통합된 유럽이 견제하는 드골주의다. 그런데 EU 헌법이 국가개입 전통을 중시하는 프랑스 경제모델이 아니라 견제의 대상인 미국이나 영국 모델을 따른다는 것은 그동안의 외교정책 기조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라크 대통령은 국민투표를 앞두고 이 같은 비판적 시각을 불식하기 위해 수차례 텔레비전에 직접 출연해 헌법안이 프랑스식 경제모델을 반영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미 반대로 돌아선 국민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英 ‘버티기’, 佛 ‘물고늘어지기’
결국 시라크 대통령은 이번 EU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 중 하나인 EU 중기예산안 문제를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다. EU 중기예산안은 1988년 자크 들로르 집행위원장이 처음 제안한 것으로 해마다 예산을 둘러싸고 회원국 사이에 벌어지는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 5~7년 동안 공동농업정책과 저개발지역에 지원하는 구조기금, 인건비 등 주요 예산항목에 대한 예산 상한액을 미리 정해 회원국 정상회담에서 승인받도록 한 것. 이렇게 하면 몇 해 동안 EU 예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면서 그 흐름을 알 수 있다.
시라크 대통령은 바로 EU 중기예산안과 관련, 영국이 지난 1984년부터 받아온 예산환급금을 폐지하든지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상자기사 참조). 예산환급금을 제공할 당시의 영국은 가난했지만 지금은 연간 3%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이에 대한 영국의 의지는 단호했다. 영국은 현재 EU 예산의 42%를 차지하는 공동농업정책에 대한 지출을 줄이고 연구개발, 지역개발 등 경제 살리기에 필요한 예산을 늘리지 않는 한 환급금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고 버텼다.
시라크 대통령으로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이다. 공동농업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가 프랑스일 뿐만 아니라 오는 2007년에는 대통령선거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시라크 대통령이 이를 양보할 경우 소속 당 후보가 농민의 표를 잃을 것은 뻔하다. 선거가 없다 해도 공동농업정책을 유럽통합이 이뤄낸 가장 자랑할 만한 업적이라고 여기고 있는 프랑스 국민의 정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다.
EU 순회 의장국을 맡은 룩셈부르크의 장 클로드 융커 총리는 새벽까지 회담 시간을 연기하면서 양국간 합의를 성사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양국은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프랑스가 “연대감이 부족하다”고 영국을 비판하자, 영국은 “프랑스가 헌법안 부결 이후 문제의 본질을 흐리려는 전술을 쓴다”고 비난했다.
양국간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영국의 예산환급금은 연간 46억유로(5조5000억원)에 달해, EU 중기예산안 편성에 중요한 변수다. 이 때문에 회담은 2007~2013년 EU 중기예산안에 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EU 중기예산안에 대한 합의는 매우 시급한 현안이다. 중·동부 유럽국가가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예산을 집행할 곳이 더 많아졌다. 여기에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인 독일이 12%에 육박하는 실업난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프랑스도 경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상당수 회원국이 EU에 지불하는 예산을 줄이려는 분위기다. 서둘러 중기예산안에 합의해야 이런 움직임을 막을 수 있다.
또 유럽연합의 회계연도는 매년 4월1일부터 1년간이다. 따라서 아무리 늦어도 내년 초까지 중기예산안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EU가 비정상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끈끈한 독·불 관계
영국은 올 하반기 EU 순회의장국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지난 6월말 유럽의회에서 의장국의 주요 의제를 발표하며 “EU가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이 의장국을 맡아 위기에 빠진 EU를 구해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난제가 산적해 있다.
중기예산안 합의를 위해서는 독일의 처신이 매우 중요하다. 독일은 현재 EU에 가장 많은 예산을 내놓는 국가다. 그런데 최근에는 독일도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EU에 지불하는 예산액을 줄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U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데 영국과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이 영국과 손을 잡고 프랑스를 압박하기는 쉽지 않다.
프랑스와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통합의 중추적 구실을 해오면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어왔다. 독일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유럽통합에 적극 참가함으로써 주권을 되찾고 국제무대에서 신뢰할 만한 국가로 다시 부상했다. 유럽을 통해 나치의 잔재를 씻고 새로운 국가로 거듭났다. 반면 프랑스는 유럽통합이라는 틀에서 독일의 잠재적인 위협을 제어하고, 통합과정에서 중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식민지를 잃고 중위권으로 전락한 국가의 위신을 만회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냉전시기에 형성된 독일과 프랑스의 이렇듯 끈끈한 동맹관계가 이완되고 붕괴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난 2003년 슈뢰더 총리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면서, 반미전선의 선봉에 선 프랑스와 결속이 더 강화됐다.
한편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EU 헌법안이 부결되자 영국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국민투표 계획을 유보했다. 이에 대해 일부 국가가 비난했지만, 영국 나름의 현실인식에 따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2007년에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는데, 이미 중임한 시라크 대통령이 출마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국민에게 한번 거부된 헌법안을 여론이 확실히 바뀌지 않는 한 다시 국민투표에 회부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따라서 EU 헌법안이 프랑스에서만큼은 이미 사장됐다고 봐도 무난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정치학과에서 유럽통합을 가르치는 제프리 에드워즈 교수는 EU 헌법안이 부결되자 이렇게 전망했다.
“현재의 헌법안을 수정해 국민투표에 회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헌법안에 담긴 내용 가운데 회원국들이 실무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살려 운영할 것이다. EU는 수많은 조약에 근거해 운영된다. 따라서 이번 헌법안이 거부됐다고 EU 운영이 정지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헌법안에 새로 규정된 정책이 실천되지 못할 뿐이다.”
실제로 EU 외무장관 신설문제의 경우, 회원국이 각료이사회 등 기존의 기구를 통해 충분히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다. 나토(NATO)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국제적으로 명망이 있는 하비에르 솔라나가 현재 EU의 공동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각 회원국도 세계 최대의 경제블록인 EU가 국제무대에서 경제력에 맞는 정치력을 행사하려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솔라나가 꾸리고 있는 사무실에 각 회원국이 필요에 따라 외교관을 파견, 각국의 외교정책과 EU의 외교정책을 좀더 긴밀하게 조정할 수 있다. 비록 EU 외무장관이라는 칭호는 없겠지만, 이런 일은 회원국 사이에 합의만 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 현재 EU 집행위원회가 세계 각국에 파견하는 대표부를 통합해 운영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은 헌법안이 부결됐더라도 기존의 각료이사회에서 합의되면 시행이 가능하다.
의지와 양보가 해결책
1952년 석탄철강공동체 설립을 시작으로 EU는 50여 년간 통합의 길을 걸어왔다. 통합을 통해 모든 회사가 위기를 극복하고, 그것을 통해 통합이 더 진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5년 6월말, 당시 프랑스는 6개월 동안 유럽공동체에 장관을 보내지 않았다. 공동농업정책에 들어갈 예산안을 논의하는데 프랑스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때의 상황을 프랑스 장관들이 각료이사회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빈 의자 위기(Empty Chair Crisis)’라고 한다. 이후에도 1970년대, 1980년대 위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러나 EU는 이를 극복했다. 헌법안 좌절로 초래된 위기도 주요 회원국간 합의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위기를 인식한 회원국들이 합의를 이뤄내려는 의지와 양보다. 올 하반기 의장국을 맡는 영국이 과연 어떤 지도력을 발휘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