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패왕별희(覇王別姬)

사랑과 이별, 배반과 질투로 얼룩진 연극 같은 베이징 현대사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입력2005-08-29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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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니까 한 번은 가봐야지, 사연이 얼마나 많겠어….” 이렇게 잔뜩 기대에 부풀어 떠나지만 막상 도착하면 자금성 앞에서 사진 몇 장 찍고 돌아나오기 일쑤다. 수천 년을 이어온 정치의 중심, 미로처럼 얽힌 역사의 현장. 베이징을 낯선 외국인 관광객이 제대로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를 통해 중국인의 숨겨진 표정과 도시의 진면목을 속속들이 살펴보자. 여행 중에 꼭 맛봐야 할 음식,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곳 소개는 보너스!
    패왕별희(覇王別姬)
    누가 베이징(北京)에 간다고 하면 나는 ‘베이징 삼락(三樂)’을 꼭 체험해보라고 추천한다. ‘일락(一樂)’은 자금성 뒤편에 있는 허우하이(后海) 주변의 옛 골목을 자전거를 타고 누비는 것이다. 호숫가에 울창한 버들이 제대로 늘어지는 여름철, 그것도 해질 무렵이 최고다.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의 전통 가옥과 그 사이로 꾸불꾸불 끊임없이 이어지는 골목을 드나들면서 옛 베이징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다 지치면 호숫가를 따라 늘어선 앙증맞고 매력적인 카페에서 쉰다. 석양을 받아 더욱 황금빛으로 빛나는 자금성 지붕, 허우하이 호수, 바이타(白塔)를 보면서 차를 마시거나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정취는 정말 그만이다. 중국과 서양, 고전과 현대의 접점을 체험할 수 있다.

    ‘이락(二樂)’은 얼궈터우술(二鍋頭酒)에 양고기 샤브샤브인 훠궈(火鍋)를 곁들이는 것이다. 삼합을 먹어야 전라도를 체험했다고 말하듯, 얼궈터우에 훠궈를 먹어야 베이징을 체험한 것이다. 얼궈터우는 작은 병 하나에 우리 돈으로 200~300원 한다. 값이 싸서 좋고, 가짜가 없어서 좋다. 65도, 59도, 39도 등 알코올 도수가 다양하고, 도수가 높을수록 술맛이 좋고 비싸다. 최소한 50도는 넘어야 얼궈터우의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솥에서 두 번 내렸다고 해서 얼궈터우인데, 적어도 베이징에서는 훠궈와 천상의 궁합을 이룬다.

    경극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베이징의 겨울은 눈보다 바람이다. 예전에 베이징에서 공부할 때 새벽에 나를 깨우는 것은 창문을 꽉꽉 닫아놓아도 어느새 스며드는 황사의 흙냄새, 그리고 기숙사 옆에 세워둔 자전거가 거센 북풍에 휙휙 쓰러지는 소리였다. 황사로 목이 칼칼하고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날에 훠궈와 얼궈터우를 먹어야 한다. 베이징에서 그것은 제의(祭儀)다. 베이징에 온 사람이면 이런 고약한 땅에 왜 수도를 세웠느냐고 불만을 터뜨릴 수 있지만, 베이징의 그런 고약한 날씨를 견디는 제의가 훠궈에 얼궈터우를 먹는 일이다.

    그 맛은 겨울에는 겨울대로, 여름에는 여름대로 별미다. 겨울에도 먹다보면 땀이 솟아 에어컨을 켤 정도이니 여름에는 땀으로 목욕을 하며 먹어야 한다. 하지만 독특한 체험이 될 것이다. 뜨거운 육수에 살짝 데친 부드러운 양고기를 특유의 소스에 찍어 독한 얼궈터우와 함께 목으로 넘기는 순간, 목에서부터 불기운이 시작되어 밑으로 내려갔다가 이내 치솟아오르면서 온몸이 달아오른다. 자신도 모르게 언 몸이 스스로 풀리고 일순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예전에 ‘사나이 가슴에 불을 댕긴다’는 고량주 광고 카피가 있었지만, 술이 사람의 가슴에 어떻게 일순간에 불을 댕기는지, 불 같은 술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온몸에 불을 지르고 나면 뒤끝이 참으로 시원하다. 어찌 이런 술이 있으랴! 내가 위스키보다 중국술을 좋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슴에 불을 지르고 끝은 ‘쿨’한 그런 사람이 어디 흔한가. 그래서 중국술에 빠지는 것이다. 인간이든 술이든 뒤끝이 좋아야 하거늘 그 점에서 얼궈터우는 확실하다.

    ‘삼락(三樂)’은 차를 마시면서 경극(京劇)을 한 대목 감상하는 것이다. 호박씨를 까먹거나 중국 전통 다과와 함께 구수한 룽징차를 마시면서 감상하면 더욱 중국 맛이 난다. 중국의 심벌즈인 나오와 얼후, 비파 같은 다양한 악기로 연주하는 시끄러운 음악과 아득한 고음의 가성에 넋을 빼앗기다보면 여행의 피로를 잊는다.

    경극은 원래 베이징 지방에서만 유행했다. 하지만 이제 베이징을 넘어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 1990년대 말부터 중국에는 전통 문화를 즐기는 복고주의 물결이 크게 일었는데, 그 덕에 경극을 감상할 수 있는 극장도 급증했다. 중국인의 관심이 높아졌고, 여기에 외국인 관광객이 가세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공연장이 생겼다.

    그런데 경극은 중국 역사와 고전에 사전 지식이 없으면 줄거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또 모든 동작이 관습적으로 약속된 것이어서 미리 알고 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경극은 무대장치나 소품이 없고, 모든 것을 동작으로 표현한다. 팔을 괴고 기대면 잠자는 것이고, 말채찍을 들고 있으면 말을 타는 것이다. 상징성이 뛰어난 예술 장르다. 그래서 그저 시끄럽고 엽기적인 오페라쯤으로 여길 수 있다. 외국인이 문화체험 삼아 경극을 감상할 때는 유명한 작품을 한 대목씩 뽑아서 들려주는 극장을 선택하면 경극의 백미를 감상할 수 있다. 영어 자막을 서비스하는 곳이라면 더욱 좋다.

    1990년대 후반부터 경극 감상이 베이징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필수 코스가 된 데에는 천카이거(陳凱歌) 감독의 대표작 ‘패왕별희(覇王別姬)’의 덕이 크다. 1993년 개봉된 이 영화에서 경극 학교 사부는 “경극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고 말한다. 사람이라면 경극을 봐야 하고, 개·돼지인 것은 경극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극을 봐야만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경극을 봐야 베이징의 참맛을 체험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인도 그렇지만 중국인 역시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에서 패한 항우(項羽)를 좋아한다. 항우는 원래 힘이 장사였다. 힘이 센 사람을 가리켜 항우장사라고 하듯이, 항우는 산을 뽑을 만한 힘을 지녔다고 한다. 지혜나 요령, 꾀는 부족하지만 우직하고 순박한 사람이다. 그런 항우의 모습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그의 마지막 순간이다.

    항우는 유방(劉邦)에게 포위당해 ‘사면초가’가 되자 한밤중에 일어나 술을 마셨다. 늘 그의 곁을 지키던 애마 추(?)와 애첩 우희(虞姬)를 곁에 두고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시로 노래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로 시작하는 시로, 영화 ‘패왕별희’에선 경극 학교 아이들이 수련하면서 늘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한데때가 불리하여 추도 나아가지 않는구나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쩔거나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하는가

    항우가 이 노래를 부르자 우희도 따라 부른다. 주위는 온통 눈물바다다. 항우는 우희더러 유방에게 가서 목숨을 보전하라고 권한다. 유방이 한때 우희에게 마음을 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희는 “어떻게 두 지아비를 섬기며, 천하통일을 꿈꾸는 황제께서 어찌 일개 계집의 안위를 마음에 두느냐”면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다가 자결한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역발산 기개세’의 능력을 가졌지만 때가 불리하여, 천명과 천시가 따라주지 않아 좌절하는 영웅의 비애와 한탄이 담겨 있는 애절한 노래다. 경극 ‘패왕별희’는 이런 패왕과 우희의 최후를 다루고 있다.

    뜨뜻미지근하고 답답한 중국인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하늘이다(謀事在人, 成事在天)”고 했다. 사람의 노력은 결국 하늘의 명을 넘을 수는 없다. 중국인에게 천명이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는 그것을 천명이라 여기며 체념하고 순응한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간이라고 해도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 자신이 패할지라도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순응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숙명론이자 운명론인데, 자칫 보수적이고 노예적인 심리를 낳을 소지가 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 사람들이 종종 중국인이 뜨뜻미지근해서 답답하다고 하는데, 중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소극적이다. 여기에는 이런 천명관(天命觀)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이런 천명관은 불행한 사람을 위로하고, 한 걸음 물러서 불행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실패한 사람을 구원하는 구실을 한다. ‘내가 실패한 것은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이나 때가 맞지 않아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면 자신의 책임을 하늘에 떠넘기는 일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이러한 태도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구출한다. 개인이 직면한 불행과 좌절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일단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항우의 최후에는 이런 중국인의 삶의 철학이 압축되어 있다. 항우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오강을 건너 그곳 왕이 되어 후일을 도모하라는 주위의 권고에 “내가 강동의 젊은이 8000명을 싸움터에서 죽게 했는데 무슨 낯으로 그곳 사람을 보겠느냐”면서 강을 건너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자결한다.

    이 순간 항우는 정치적 패배자를 넘어선다. 어차피 인간이 천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천명에 순응하여 자신의 최후를 시적으로 마감한 문화적 영웅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우희와 추의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항우의 최후는 한편의 시가 되었다. 자기가 받든 사람이 완전히 망하게 됐어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는 우희, 그녀는 모든 남성이 갈망하는 영원한 여성상, 아니마의 또 다른 상징이다. 그래서 중국인뿐만 아니라 한국 남성도 양귀비보다 우희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리라.

    영화 ‘패왕별희’는 두 경극 배우의 이야기다. 두 배우의 단골 레퍼토리가 ‘패왕별희’이고, 초나라 패왕 항우와 그의 애첩 우희 역을 맡는다. 영화는 두 사람이 경극 배우를 양성하는 곳에서 만나 연극 파트너를 넘어 사랑과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 결별과 배반, 비극적인 최후까지를 1924년부터 1979년까지 중국 현대사의 중요 사건 속에 배치한다.

    중국 현대사의 전개에 따라 베이징의 주인과 그들이 지배하던 역사 무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차례로 등장한다. 청나라를 상징하는 장 내시와 중화민국을 상징하는 원 대인, 일본군 침략자 아오키 장군, 그리고 베이징 최후의 승자인 중국 공산당을 상징하는 샤오쓰가 그렇다. 영화는 이렇게 베이징이라는 역사의 무대를 차지하는 주인이 바뀜에 따라 경극의 운명은 물론 패왕 샬로와 우희 데이의 운명이 어떻게 희·비극을 오가는지 보여준다.

    북경인은 기침소리에도 가락이 있다

    패왕별희(覇王別姬)

    장궈룽이 열연한 영화 ‘패왕별희’ 한 장면.

    이 영화에는 역사라는 무대와 경극의 무대가 함께 등장한다. 역사 무대의 주인공이 바뀌면서 경극 무대의 주인공이 웃고 운다. 사실 이것이 베이징의 역사, 베이징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다. 중국의 다른 지방 사람들은 베이징 사람을 거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베이징 사람은 베이징 사람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중일전쟁,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문화대혁명의 폭발, 4인방(마오쩌둥의 권력을 승계하려던 문혁파 일원·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의 몰락, 천안문 사태 등 중국 역사의 중요 고비를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의 주인 교체는 곧 베이징 주인의 교체였고, 그런 역사의 변화를 직접 목도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강하다. 베이징 사람은 정치를 화제로 끊임없이 주절주절하기를 좋아한다. 베이징 사람을 사귈 때는 그런 정치 취향을 이용하는 것이 비결이다.

    ‘패왕별희’를 찍은 천카이거 감독은 유달리 베이징을 사랑한다. 베이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만은 아니다. 그는 훗날 “‘패왕별희’를 찍을 때 나도 모르는 어떤 힘에 조종당하는 듯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베이징이 내게 남긴 것을 모두 찍으려 했다”고도 했다. 베이징을 사랑하고 베이징에 관한 추억이 많은 그가 베이징을 말하기 위해 경극을 택했다. 천카이거는 “베이징 사람은 기침소리에조차 가락이 있고 눈물이 나올 지경”이라고 말했다. 천카이거가 경극과 경극 배우를 소재로 한 영화 ‘패왕별희’를 찍은 것은 고향 베이징과 경극에 대한 추억과 애정 때문이다. 천카이거는 이 영화를 찍은 뒤 꿈을 꿨는데, 꿈에 장궈룽과(張國榮) 데이가 자신에게 작별을 고했고, 자신은 꿈속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천카이거에게 ‘패왕별희’는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각별한 영화다.

    경극에서는 여자 주인공을 ‘단(旦)’이라고 부른다. 특기할 점은 여자 주인공을 남자가 맡는다는 것. 봉건시대에 남녀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해서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 역할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경극의 성패가 달렸고, 이 때문에 경극만의 신비스러움과 매력을 지니게 됐다.

    중국 작가 루쉰(魯迅)은 이를 두고 “중국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원하고 가장 널리 보급된 예술은 남자가 여자로 분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루쉰의 해석은 이렇다. 남자가 여자로 분장하면, 남자 관객은 여자로 분장한 것이니까 그를 여자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여자 관객은 남자가 여자로 분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남자라고 여기게 된다. 결국 남자가 여자로 분장함으로써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마술적인 장치라는 것이다. 경극의 최전성기이던 1920~30년대 중국 경극계에서 그런 여성 역할을 가장 잘한 배우가 중국 경극사의 상징인 메이란팡(梅蘭芳)이다. 특히 경극 ‘패왕별희’에서 우희 역할을 잘했다.

    천카이거는 어려서 메이란팡의 손자와 같은 유치원에 다녔다고 한다. 그 집에 가면 부모는 바빠서 늘 가정부가 아이들을 챙겨줬는데 어린 천카이거의 눈길을 끈 것이 있었다. 하나는 그 집에 있던 텔레비전이다. 1950년대 후반에는 매우 귀한 것이었는데, 소련 정부가 메이란팡에게 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난히 많은 고양이, 또 친구의 할아버지인 메이란팡이 아침 일찍 일어나 검무를 추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메이란팡이 신고 있던 하얀 띠를 두른 신발도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삶의 여유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연이 됐는지 훗날 영화감독이 된 천카이거는 메이란팡이 가장 잘 연기한 우희에 관한 영화를 찍는다.

    “입 벌려, 입 벌려, 넌 계집애야!”

    영화 ‘패왕별희’는 남자가 여자로 변신하는 경극의 신비와 마력이 있는 지점을 다룬다. 경극이 유사 이래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1920년대, 베이징의 경극 학교에 한 여자가 곱상한 소년을 데리고 온다. 술집 여인인 어머니는 아이가 커서 더는 홍등가에 둘 수 없으니 받아달라고 간청한다. 경극학교 사부는 얼굴이 곱상한 아이가 마음에 들지만 손이 육손이어서 안 된다고 거절한다. 그러자 엄마는 아들의 한 손가락을 싹뚝 잘라버린 뒤 다시 데려온다. 이 사내아이가 훗날 미인 우희 역을 맡는 ‘데이’(아명 도즈)이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들어온 아이 옆에서 부모가 되고 연인이 되어주는 경극학교 사형이 훗날 패왕 항우 역을 맡는 ‘샬로’(아명 시토)다.

    그런데 사내아이를 여자아이로 어떻게 성전환시킬 것인가. 방법은 폭력이다. 데이는 극중에서 우희의 대사인 “나는 본래 계집아이로서…”를 자꾸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라고 잘못 노래한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남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만다. 그럴 때마다 사부의 엄청난 체벌이 가해진다. 안타까운 샬로가 “네가 진짜 여자라고 생각하면 안 틀릴 거야” 하고 달랜다. 데이 스스로도 의식적으로 노력해보지만 노래를 하다보면 다시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 하고 나와버린다. 무의식이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사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데이는 결국 도망친다. 그런데 밖에서 경극 공연을 보고는 패왕의 멋진 모습과 화려한 무대에 압도당해 다시 경극학교로 돌아온다. 전보다 더 열심히 연습하고 노래 실력도 제법 늘었지만 여전히 ‘성전환’은 이뤄지지 않는다.

    패왕별희(覇王別姬)

    황사가 몰아친 베이징 시내에서 자전거를 탄 시민이 서둘러 귀가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경극학교에 후원자가 방문한다. 청나라 때 경극의 최대 후원자이자 경극계를 좌지우지하던 사람은 궁중의 내시였다. 그 내시 밑에서 경극 극장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경극학교를 방문해 곱상한 얼굴의 데이를 발견하고는 한 소절 해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중요한 자리에서도 데이는 “나는 본래 계집아이로서…”라고 해야 할 대목을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라고 해버린다. 사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지켜보던 아이들도 모두 얼어붙는다.

    그 절망적 상황에서 패왕 항우 역을 연습하고 있던 샬로가 스승의 담뱃대를 들고 나선다. 데이의 보호자이자 든든한 버팀목이던 사형이 나서서 그를 의자에 앉힌다.

    “입 벌려, 입 벌려! 넌 계집애야, 넌 남자가 아니고 계집애라고!”

    사형 샬로가 담뱃대를 데이의 입에 넣고 휘젓자 붉은 피가 데이의 입가에 흐른다. 끔찍한 장면인데 데이는 처음에는 놀라고 긴장했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고, 결국은 무엇인가 결심이 선 듯한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자신에 차고 기쁜 표정으로 노래한다.

    “나는 본래 계집아이로서, 여자로 태어나…”

    데이를 경극학교에 넣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다섯 손가락 외에 덧난 여섯 번째 손가락을 자른 것이 거세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 장면에서 샬로가 담뱃대를 데이의 입안에 집어넣은 것은 데이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일이다. 담뱃대는 남근이고, 데이의 입에 흐른 피는 초혈(初血)이다. 그 상징적인 성폭행이 있고 나서 데이는 이제 자신은 본래 계집아이였다고 노래한다. 성폭행을 당한 뒤 자신을 여성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데이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바꾸어 마침내 경극 속으로 들어가 우희가 되었다. 이제 패왕 항우와 애첩 우희, 한 커플이 탄생한 것이다. 어머니와 스승, 샬로 등 자신을 둘러싼 사람과 환경이 폭력을 통해 자신을 여자로 만들었고,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던 데이가 이제는 그 폭력의 질서 속에 들어가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우희로서 그의 새로운 인생은 그렇게 시작된다.

    여성으로, 우희로 변한 데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동성애 성향을 지닌 권력자들이었다. 청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환관 장 내시와 중화민국의 권력자 원 대인이 그들이다. 이들은 데이를 성적 노리개로 삼는다.

    송·명·청대, 동성애 유행

    청나라 때에는 관료가 성을 매수하는 것을 법률로 금했는데, 그러다보니 남성 동성연애가 성했다. 그 성적 파트너가 남창(男娼)이나 경극에서 여자역을 맡은 남자였다. 이런 이유로 무대에서는 배우이고 무대를 내려오면 남창 노릇을 하는 배우가 많았다. 일부 관료와 부자들은 개인적으로 경극단을 만들어 여자역을 하는 경극 배우를 동성애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원래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 배우를 지칭하는 ‘상공(相公)’이란 말이 동성연애 상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이게 된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사실 예전에 중국은 동성애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관대했다. 멀리는 한나라 때부터 궁중에 동성연애가 매우 유행했고, 송·명·청대에는 민간에까지 동성애가 폭넓게 퍼졌다. 명나라 때는 남자가 처나 첩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내교(內交)’라 하고, 남자와 남자 사이의 성관계를 ‘외교(外交)’라고 부를 정도로 유행이었다. 그런가 하면 청나라 때는 남자 커플이 버젓이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할 정도로 동성애가 성행했고, 사회 분위기도 동성애 커플에게 매우 관대했다. 남자 커플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계(契)’라는 의식을 치르고 ‘계형(契兄)’ ‘계제(契弟)’의 관계를 맺었다.

    지금도 중국 골동품가게에 가면 남성 동성애를 그린 춘화를 간혹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동성애가 가장 유행한 지역은 남부 푸젠(福建)성이다. 동성애에 관한 한 근대 이전의 중국이 훨씬 자유로웠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도 너그러웠다. 역사가 꼭 시간을 따라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장 내시의 동성애 파트너 노릇을 하고 나온 데이에게 사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각자의 운명이 있단다. 네 운명을 거역하지 말거라.”

    이후 데이는 스승의 말대로 폭력으로 바뀐 자신의 성 정체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경극의 세계에 빠져 우희로 살아간다. 그에게 경극학교 사형인 샬로는 서초 패왕이고, 그는 평생 패왕 샬로만을 따르면서 한 남자를 끝까지 따른 우희의 길, 경극학교 사부가 당부한 길을 간다.

    데이 역의 장궈룽이 보여주는 여성의 섬세한 몸놀림과 부드러운 자태가 가히 압권이다. 여장 남자 역을 하는 진짜 경극 배우처럼 훌륭하게 배역을 소화한다. 당시에야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여자 역할을 잘 해내는 장궈룽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양귀비의 맞바람 이야기 ‘목단정’

    중화민국 시절인 1920년대부터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베이징에 쳐들어온 1937년 이전까지 베이징에 밀어닥친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경극의 무대는 역사의 무대와 화해하며 공존한다. 경극도 그렇고 이 두 배우 역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 두 사람은 최고의 파트너를 이루고, 죽을 때까지 둘이 함께하라는 스승의 말을 충실하게 따른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불안한 조짐이 나타난다. 패왕 샬로가 기생집을 출입하더니 술집 여자와 눈이 맞은 것이다. 샬로에게 여자가 생기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 현실 속의 여자와 극 속의 여자 우희 사이에서 배신과 질투가 일어나고, 그것이 베이징의 역사와 뒤엉킨다.

    샬로가 주선이라는 술집 여자를 만나 연인 관계를 맺고 나중에 결혼까지 하는 것은 샬로가 경극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철저히 구분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다. 경극 무대에서는 서초 패왕으로 살고, 무대를 내려와서는 현실 속의 평범한 남성 샬로로 산 것이다. 하지만 데이에게는 오직 경극 무대뿐이었다. 패왕을 평생 따르면서 지조를 바치는 우희로만 산 것이다. 데이에게 경극은 삶의 전부였고, 오직 경극 무대 위에서만 그의 삶은 의미가 있었다. 경극 무대가 없으면 그는 존재할 수 없다. 경극이 전부이고 오직 패왕만 바라보고 사는데, 패왕 샬로가 자신을 배반하고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것이다.

    이 와중에 일본군이 베이징에 들어오고, 패왕 샬로가 일본군을 때려 감옥에 갇히게 된다. 주선이 데이에게 샬로를 감옥에서 빼달라고 하자 데이는 일본군에게 경극을 보여주고 샬로를 빼오면 패왕 샬로의 곁을 떠나라고 요구한다. 주선은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 떠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주선은 샬로에게 경극 무대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고, 샬로는 경극을 그만둔다. 경극을 버리고 현실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패왕에게 새 여자가 생긴 것만이 아니라 패왕이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제 우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에게는 아직 경극 무대가 남아 있다. 술집 여자 주선과 중일전쟁 때문에 패왕을 빼앗겼지만 경극을 이해하고 경극을 사랑하는 일본 군인이 있었다. 그는 패왕의 배반의 고통을 아편으로 달래면서 홀로 무대에서 일본군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양귀비가 자신에게서 멀어진 당 현종을 원망하면서 장수 고력사(高力士)와 맞바람을 피우는 이야기인 ‘목단정(牧丹亭)’을 부른다. 일본군 앞에서 경극을 하면서 맞바람을 피운 죄로 데이는 중일전쟁이 끝난 뒤 매국노로 몰려 법정에 서게 된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다.

    “일본군은 경극을 아는 사람들이다. 아오키 대좌가 살아 있으면 아마 경극이 일본에 전해졌을 것이다. 나를 차라리 죽여라!”

    그의 유일한 기준은 경극이다. 패왕도 떠난 마당에 경극마저 없으면 그가 더는 존재할 수 없다. 일본은 그런 그에게 경극 무대를 제공했다. 패왕은 우희를 배반하고 떠났지만 우희는 아직 패왕을 포기하지 않았고, 경극 무대는 일본군이 베이징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순간에도 역사의 무대에서 침탈당하지 않았다.

    일본이 물러가고 이제 베이징의 역사 무대를 차지한 주인은 중국 공산당이다. 마오쩌둥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마오쩌둥의 시대가 열리면서 경극은 치명적인 위기를 맞는다.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 혁명은 두 가지 혁명을 동시에 수행했다. 하나는 봉건주의를 타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이다. 마오쩌둥 정권이 들어 선 뒤 경극은 봉건주의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개조의 대상이 되었다. 경극에 혁명을 찬양하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는가 하면, 남녀가 한 무대에 서고, 현대음악이 가미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다.

    데이는 이런 경극 개조 작업을 거부한다. 더군다나 그가 단골로 맡아온 우희 역을 경극학교 후배이자 경극학교 사부가 죽은 뒤 자신이 데려다 키운 샤오쓰에게 빼앗긴다. 이제 그에게는 패왕도, 경극 무대도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입던 경극 무대의상을 불사른다.

    그리고 1966년 5월 문화대혁명(1966~76)이 터진다. 한 남자와 두 여자, 패왕 샬로와 우희 데이, 패왕의 또 다른 여자인 주선은 팔을 뒤로 묶이고 머리를 숙인 채, 서로 고발하고 비판한다. 문혁 때 벌어진 전형적인 광경이다.

    천카이거는 자신의 문혁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14세에 이미 배반을 배웠다.”

    문혁 때 아버지를 배반한 것이다. 문혁 때 그의 아버지는 국민당 사람으로, 반혁명분자로 몰려 비판을 받았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향해 ‘반혁명분자’라고 외칠 때 그도 따라 외쳤다. 그런데 마오쩌둥 배지를 단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있는 단상 위로 올라오라고 했다. 천카이거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올라가 구호를 외친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어깨를 밀친다. 그리 세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아버지를 밀쳤다. 천카이거는 그 순간, 아버지를 밀치기 위해 자기 손이 아버지의 어깨에 닿던 순간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한다.

    패왕별희(覇王別姬)

    초기 문화혁명을 주도한 홍위병(1967년).

    가족을 배반하는 전형적인 문혁의 비극을 천카이거 역시 직접 체험했다. 천카이거만이 아니라 패왕 샬로와 우희 데이, 패왕의 또 다른 여인 주선도 그런 체험을 한다. 먼저 패왕 샬로가 우희 데이를 비판한다.

    “그는 경극에 미친 자입니다. 경극만 알고, 관객이 어떤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무대에 섰습니다. 일본군 앞에서도 노래했습니다. 그는 반동 부역자입니다.”

    홍위병의 거듭된 재촉에 샬로는 마침내 우희 데이가 장 내시와 국민당 고관 원 내시의 성적 파트너였다는 사실까지 폭로하고 만다. 그러고는 “그는 노동인민의 피와 땀을 빨아먹은 자”라고 외친다.

    패왕이 우희를 완전히 버린 것이다. 홍위병 앞에 철저하게 무너진 것이다. 우희는 패왕의 배반 앞에서 이제 패왕에 대한 충절을 거둔다. 우희 데이가 자신의 전부였던 패왕을 향해 절규한다.

    “결국 다 배반하는군, 너마저도. 너는 치사하고 야비한 인간이야. 내가 왜 일본군 앞에서 목단정을 불렀는지 알아? 그래 내 인생은 진작 끝났어, 하지만 너 패왕도 남 앞에 무릎을 꿇었어. 이제 모든 게 끝났어, 끝났어, 경극은 이제 끝이야.”

    그러고는 주선이 술집 여자였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자결한 우희 역의 장궈룽도 자살

    문혁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경극도, 패왕도, 우희도 모두 끝났다. 패왕 샬로와 그의 두 여자, 경극 속의 여자 데이와 현실 속의 여자 주선 사이의 삼각관계도 끝이 났다. 경극 무대는 사라졌다.

    천카이거는 문화가 중국 민족의 토대이자, 중국 민족의 정신적 지주라고 생각한다. 중국이 분열과 이민족의 침략 속에서도 꿋꿋이 유지되어온 것은 문화의 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경극을 비롯해 모든 전통 문화를 파괴한 문혁은 중국 문화가 결정적으로 위기를 맞은 시기이자, 중국인이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 시기라고 본다. 그런 문화의 위기를 천카이거는 문혁 시기 경극의 위기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문혁이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문혁이라는 한 편의 광포한 연극, 연극 같은 역사가 경극의 무대를 대신한다. 역사라는 무대가 경극의 무대를 침탈해버린 것이다. 패왕과 우희는 천시(天時)를 잘못 만나서가 아니라 문혁과 홍위병 때문에 사랑도, 무대도 잃는다. 애초에 데이는 폭력으로 여성이 되고, 우희가 됐다. 그리고 오직 경극 속에서, 무대 속 역할에 빠져 우희로만 살았다. 그런데 현대 중국의 연속된 역사의 비극, 역사의 폭력은 우희로서의 삶과 경극이라는 무대, 우희의 삶의 터전을 앗아가버렸다. 그럴 때 우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문혁이 끝나고 패왕과 우희가 다시 무대에 선다. 두 사람은 이미 늙고 지쳤다. 오랜만에 ‘패왕별희’의 마지막 대목을 연기한다. 그런데 극중 우희가 자진하는 대목에서 데이는 실제로 자기 목을 칼로 벤다. 이 죽음은 흡사 2003년 만우절에 일어난 장궈룽의 죽음만큼이나 돌발적이고 충격적이다. 결국 데이는 영원히 극 속의 인생을 살다가 끝내 우희로 자신의 삶을 마쳤다. 서초 패왕이 그를 배반하고, 역사가 그런 삶을 가로막기도 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초 패왕의 여인 우희로 살았고, 우희로 죽었다.

    문혁이 끝나고 다시 경극의 무대를 회복한 시점, 역사가 정상으로 돌아온 그 시점이 아마도 데이에게는 우희로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경극 무대에 서서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함께하고자 한 패왕 샬로 앞에서 경극 속의 우희가 되어 자진한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우희다.

    데이가 여자 우희로 산 것은 애초에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엄마와 사부와 샬로의 폭력 때문이었다. 그는 폭력의 희생자이지만 그 폭력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살았다. 그것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다. 그런데 역사의 폭력은 그 역할은 물론이고, 그 역할의 터전이던 무대마저 빼앗았다. 이 비극이 어찌 우희 데이만 겪은 것이겠는가. 권력자에게 충절을 바쳤지만 늘 배반당하던 중국 민중, 역사의 폭력에 휘둘리던 중국 민중의 비극적 경험, 베이징인의 비극적 경험의 한 상징이 아니겠는가. ‘패왕별희’의 역사의식이 빛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자금성 앞에 있는 쳰먼(前門)이 서울 숭례문에 해당한다면, 쳰먼 앞의 다산란(大珊欄) 장은 서울 남대문시장에 해당한다. 한국 관광객이 약을 사러 동인당 약국으로 가는 길에 들르는 곳이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한창 정비 중이어서 옛 모습을 많이 잃었다. 그러나 시장은 베이징 서민의 활기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거리에서 시작하여 옛날 우리 선비들이 책과 지필묵을 사기 위해 연행길이면 꼭 들르던 류리창(琉璃廠)까지 베이징의 옛 골목길을 따라 걷거나 인력거를 타고 돌아보는 것은 잊지 못할 베이징 체험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정권이 수립되기 이전만 해도 쳰먼 앞 서민의 거리에 중국 서커스와 경극, 중국 만담인 ‘샹성(相聲)’ 등 중국 전통 예술을 공연하는 공연장이 밀집해 있었다. 지금도 경극을 공연하는 대표적인 극장이 여기에 모여 있다. 베이징에서 외국 관광객이 경극을 관람하기에 좋은 곳은 세 곳이다.

    패왕 전설은 동아시아의 유산



    정이츠(正義祠) 극장은, 옛 목조 건물의 정취 속에 경극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고, 외국 관광객용으로 영어 자막과 더불어 중요한 대목만 불러주는 곳으로는 리위안(梨園) 극장이 좋다. 쳰먼에 있는 호텔 궈판뎬(建國飯店) 안에 있다(베이징에는 궈판뎬이 두 곳 있다. 궈먼에 있는 궈판뎬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 경극이나 그 밖의 잡기(雜技)라고 하는 민간 예술을 골고루 감상하기에는 라오서차관(老舍茶館)도 좋다. 쳰먼에 있는 KFC 옆에 있다. 베이징을 대표하는 작가 라오서(老舍)의 대표작 ‘찻집(茶觀)’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옛 찻집을 재현해놓았다. 가격은 비싸지만 여러 가지를 가볍게 체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서초 패왕의 전설은 이미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 공동의 문화유산이 되었다. 이 문화유산을 재미있게 그려낸 이는 역시 고우영이다. 영화의 경우 ‘서초패왕’이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하지만 그처럼 충실한 재현이 오히려 재미를 반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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