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호

배경도 파벌도 없이 실력으로 정상 향하는 무당파 4인

  • 하종대│동아일보 사회부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11-02-23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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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춘셴 신장위구르자치구 서기
    • 루잔궁 허난성 서기
    • 왕이 당 대만공작판공실 주임
    • 양제츠 외교부장
    이번에 소개하는 4인은 사실상 모두 무당파(無黨派) 인사다. 중국의 최고지도자와 약간의 친분 관계는 있지만 중국의 3대 정치세력으로 꼽히는 퇀파이(團派)나 상하이방(上海幇), 태자당(太子黨)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굳이 꼽자면 장인이 외교부에서 제네바 주재 대사를 지냈던 왕이(王毅·58) 공산당 대만공작판공실 주임 겸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주임 정도가 태자당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으로 국가영도자의 지위 앞까지 올라온 셈이다.

    소개하는 네 사람 가운데 장춘셴(張春賢·58)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당위 서기 겸 신장생산건설병단 제1정치위원과 루잔궁(盧展工·59) 허난(河南)성 당 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은 지방 제후다. 반면 왕이 주임과 양제츠(楊潔?·61) 외교부장은 모두 부장(장관)급 정통 외교관이다. 장 서기와 루 서기는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중국 정치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25인 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반면 왕 주임과 양 부장은 하나밖에 없는 외교담당 국무위원 또는 부총리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 장·춘·셴

    거미줄 고속도로의 총 설계사

    ‘중국 거미줄 고속도로의 총 설계사.’ 장춘셴 신장위구르자치구 당위 서기 겸 신장생산건설병단 제1정치위원에게 한결같이 따라다니는 말이다. 1997년 12월 교통부 당조(黨組)성원으로 시작해 이듬해 4월 부부장을 거쳐 2002년 10월 교통부장에 임명돼 2005년 12월 후난(湖南)성 당 서기로 옮길 때까지 8년간 교통부에 재직하면서, 그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중국의 고속도로 교통망을 갖춰놓았다.



    당시 그가 완성한 3만5000㎞의 고속도로망은 ‘5종7횡(五縱七橫)’이라 불린다. 중국 전역을 가로 7개, 세로 5개의 고속도로로 바둑판처럼 연결해 웬만한 지역은 자동차로 달릴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의 가장 북쪽인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가장 남쪽인 하이난(海南)성의 남부 싼야(三亞)까지 장장 5200㎞의 고속도로가 뚫렸다. 또 중국 중북부의 네이멍구(內蒙古) 얼롄하오터(二連浩特)부터 중남부 윈난(雲南)성의 허커우(河口)까지 중국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3600㎞의 고속도로가 놓였다.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푸젠(福建)성의 성도 푸저우(福州)와 광둥(廣東)성의 주하이(珠海)를 잇는 각각 2500㎞, 2400㎞의 고속도로도 새로 생겼다.

    배경도 파벌도 없이 실력으로 정상 향하는 무당파 4인
    동부와 서부를 잇는 고속도로도 줄줄이 탄생했다. 장쑤(江蘇)성의 롄윈강(連雲港)에서 신장위구르자치구의 훠얼궈쓰(·#53926;爾果斯)까지 4400㎞의 고속도로가 이미 뚫렸다. 랴오닝(遼寧)성의 동쪽 단둥(丹東)에서 티베트의 수도 라싸(拉薩)를 잇는 4600㎞의 고속도로도 조만간 완성된다.

    상하이(上海)에서 청두(成都)까지, 상하이에서 윈난성의 루이리(瑞麗)까지 각각 2500㎞의 고속도로도 모두 개설됐다. 중국 전역의 주요 도시를 대부분 고속도로로 연결한 셈이다. 당초 ‘5종7횡’ 계획은 2020년까지 완성키로 돼 있었던 사업이다. 하지만 장 서기는 2007년까지 13년이나 계획을 앞당겨 대부분의 건설 계획을 마쳤다.

    이로써 1991년 500㎞에 불과했던 중국의 고속도로는 지난해 말 7만4000㎞로 19년 만에 무려 148배 늘어났다. 중국은 이를 기초로 2030년까지 전국을 고속도로로 촘촘히 연결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5종7횡’의 완성으로 그는 국제도로연맹이 수여하는 ‘2006년도 인물상’을 받았다. 그의 도로망 확충 노력을 세계가 인정한 셈. 지난해 말 현재 중국의 도로 총연장은 398만4000㎞다.

    다양한 분야 두루 섭렵

    이처럼 교통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그의 원래 전공은 기계 설계 및 제조 분야다.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에 위치한 둥베이(東北)중형기계학원(현 燕山·옌산 대학) 기계제조과를 졸업한 뒤 1980년 9월 삼기(三機)부 116공장 15작업장에서 기술원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이어 기계부 제10설계연구원 계획과 계획원, 기계부와 기계위원회, 기전(機電)부 제10설계연구원 당위원회 서기, 기전부 제10설계연구원 당위 서기 겸 부원장, 중국포장식품기계총공사의 부총경리 및 총경리 등 1995년 8월 윈난성 성장 조리(助理)로 갈 때까지 무려 19년 가까이 기계 분야에서만 일했다.

    하지만 경력을 보면 장 서기만큼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한 사람도 드물다. ‘공(工), 농(農), 병(兵), 학(學), 상(商), 관(官)’을 모두 넘나들었다. 기계공장에서 16년을 일했고 고향인 허난성 위(禹)현 청관(城關)공사의 둥관(東關)대대에서 농민으로 1년9개월을 일했다. 고교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4년3개월을 우한(武漢)군구 통신단 전사로 복무했다. 기전부 제10설계연구원에서 부원장을 지냈고 중국포장식품기계총공사에서 부(副)총경리와 총경리로도 일했다. 1995년 8월 윈난성 성장 조리로 발탁된 이후 현재까지 23년간 관직에 몸담고 있다.

    장 서기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을 좌장으로 하는 상하이방(上海幇)도, 후진타오(胡錦濤)현 주석을 필두로 한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출신)’도 아니다. 그렇다고 중국 고급 당정군 간부의 자제를 일컫는 태자당(太子黨)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10월 교통부장으로 발탁될 때는 당시 국무원 장관 중에서 최연소 장관이었다.

    이처럼 배경도 파벌도 하나 없는 그가 고교를 졸업하고 17세의 나이로 인민군 전사(戰士)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35년 뒤 후난성 당 서기를 거쳐 위구르자치구 서기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불치하문(不恥下問)의 타고난 성실함과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상상력, 불굴의 추진력 때문이다.

    기계 분야에서만 일하다 처음 교통부 당조 성원과 부부장으로 임명됐을 때 그는 국장들에게 직접 찾아가 질문을 하면서 업무를 익혔다. 윈난성 성장 조리로 재직할 땐 산악 지형이 많은 윈난성의 특징상 대기업보다 소기업이 더 적합하다는 새로운 발상으로 유명 소기업을 일궈냈다. 철로 변압기 시장의 80%를 장악한 쿤밍(昆明)변압기와 프린터 업체인 블루 컴퓨터가 바로 그것이다.

    배경도 파벌도 없이 실력으로 정상 향하는 무당파 4인
    자타공인 ‘일벌레’

    ‘5종7횡’ 계획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2005년 1월 그는 2030년까지 베이징에서 대만의 타이베이(臺北)를 고속도로로 연결하겠다는 ‘엉뚱하면서도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건설할 수 있다는 대한해협의 해저길이가 128~148㎞인 점을 감안할 때 최단거리가 100㎞에 불과한 양안(兩岸·중국과 대만)해협은 기술적으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능력 있고 열심히 일 잘하는 사람이 손해 보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가 가장 공정하고 투명하며 공평한 사회입니다.” 그가 인사가 있을 때마다 부하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다. 그 역시 이를 좌우명으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다. 그는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온화하고 예의를 갖추며 친화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상이 개방적이고 근면하며 몸가짐이 바르다는 말도 빠지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일벌레(工作狂)다. 취미가 일과 독서라고 할 정도다. 2005년 12월 후난성 서기 취임 이후 4년 만에 후난성은 전국 31개 성 가운데 지역총생산(GRDP) 상위 10위 안에 드는 성으로 발돋움했다. 농업대성으로만 불렸던 후난성은 2009년 해외직접투자 1위를 할 정도로 급속히 공업화가 이뤄지고 있다.

    ‘부민강성(富民强省)’을 기치로 동부에 비해 크게 뒤처진 중부지역의 한 성인 후난성의 굴기(·#54366;起)를 위해 투혼을 불사르던 그는 지난해 4월20일 갑작스레 중앙의 호출을 받고 베이징에 갔다가 4일 뒤 곧바로 신장자치구의 서기로 취임했다. 이날 취임식엔 차기 최고지도자로 유력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과 리위안차오(李源潮) 중앙조직부장도 참석해 최고의 찬사를 보내며 그를 격려하고 지지했다. 신장에서의 그의 첫 임무는 독립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위구르자치구를 안정시키는 일이다. 20년 가까이 신장의 제후로 군림해온 왕러취안(王樂泉·67)을 대신해 그를 보낸 것도 중앙정부가 그의 이런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비록 무파벌 무배경으로 특정 정치세력의 후원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촘촘한 고속도로망으로 중국의 교통대계를 일궈놓은 장 서기가 내년 가을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진입하는 것은, 신장에서 대규모 독립투쟁이 일어나 그의 지위가 흔들리는 등의 결정적인 이변이 없는 한 어려울 것 같지 않다.

    ▼ 루·잔·궁

    관리 티 안 나는 무당파 복장(福將)

    배경도 파벌도 없이 실력으로 정상 향하는 무당파 4인
    ‘관리 티(官架子) 안 나는 복장(福將)’. 루잔궁 허난성 당 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을 이르는 말이다. 1억명의 인구를 거느린 중국 최대 인구대성의 당 서기가 아니라 시골 촌 서기 같은 인상을 풍기는 그의 이력을 보면 복(福)이 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 운은 1999년 샤먼(廈門)에서 터졌다. 사회주의 중국 건립 이래 사상 최대의 밀수사건에 푸젠성과 중앙 고위 지도부가 줄줄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자 당시 대리성장이던 시진핑은 사건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려 했다. 리펑(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아들과 자칭린(賈慶林)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주석의 부인 린유팡(林幼芳) 등 상상을 뛰어넘는 고위직 인사의 친인척이 범죄에 관련된 것으로 드러나자 시 성장도 법대로 처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그는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강력 주장했고, 결국 웨이젠싱(尉健行)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등 중앙지도부가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건은 원칙대로 처리됐다. 사건을 적당히 처리하려 했던 시 당시 푸젠성장은 2002년 저장(浙江)성 대리성장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반면 루잔궁은 2001년 1월 푸젠성 부서기, 2002년 10월 대리성장을 거쳐 2003년 1월엔 성장으로 쾌속 승진했다.

    두 번째는 2000년 12월 푸젠성 서기로 내려온 쑹더푸(宋德福)가 폐암에 걸리는 바람에 베이징으로 돌아가 입원 치료를 받은 2003년부터다. 쑹 서기가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되자 2004년 2월 당시 성장이던 루잔궁이 대리 서기로 당 업무까지 맡게 됐고 이어 같은 해 12월 정식으로 서기 직에 올랐다. 2003년 당시 57세였던 쑹은 병이 깊어지자 2005년 1월 결국 푸젠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직도 사직한 채 병마와 싸웠지만 지난해 9월13일 결국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복과 운도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포착되는 것이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게 아니다. 루 서기는 정치적 연줄도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배경을 묻는 질문에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며 “시골에 내려가서는 우마차를 잘 잡아탔고 학교에 들어가는 반장과 공청단 지부 서기를 했듯 기회를 잘 잡았을 뿐”이라고 대답한 바 있다.

    배경도 파벌도 없이 실력으로 정상 향하는 무당파 4인
    하지만 이는 겸손의 말일 뿐이다. “난 단지 땅에 발을 디디고 착실하게 일했을 뿐이다.” 어느 회의석상에서 한 이 말처럼 그는 항상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며 기회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쪽만 있는 쌍꺼풀, 깊게 팬 주름살. 루 서기는 폼 재기 좋아하는 중국의 고위관리와는 영 딴판이다.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2009년 12월 그는 허난성 뤄허(?河)시의 린잉(臨潁)현에서 푸젠성 출신 기업가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기업가들을 맨 앞줄에 앉히고 자신은 두 번째 줄에 섰다.

    헤이룽장성의 지식청년

    그는 저장성 출신이지만 인생의 가장 귀중한 젊은 시절을 헤이룽장성에서 보냈다. 문화대혁명 시절인 1969년 고교를 마치자마자 머나먼 헤이룽장성의 푸민(富民)공사라는 농장에 배치돼 중국의 가장 추운 북쪽에서 무려 13년을 살았다. “북대황(北大荒)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형식주의에 물들지 않고 ‘멋 부리는 틀(花架子)’을 좋아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인민을 위해 일하는 것을 가르쳐줬다. 만약 헤이룽장성의 13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루 서기는 언젠가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중국의 가장 북쪽인 헤이룽장성에서 보낸 젊은 시절은 그로 하여금 의지를 단련시켰고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서 노력하는 정신을 배우게 했다.

    역시 무당파 인사인 루 서기는 장 전 주석시절 요직을 휩쓴 상하이방과도, 요즘 기세를 올리는 ‘퇀파이’와도 인연이 없다. 다만 그의 뒷배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웨이젠싱(尉健行)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헤이룽장성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를 눈여겨봤던 웨이젠싱은 1998년 10월 전국 총공회 주석으로 가면서 저장성 당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이었던 그를 중앙으로 끌어올려 부주석으로 데리고 갔다. 이후 그는 웨이젠싱의 심복이 됐고 웨이젠싱 역시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중병에 걸렸던 쑹더푸 역시 그를 믿고 지원했다. 2004년 12월 정식으로 성 서기로 임명되기 직전 베이징에 와 병 문안을 하는 그에게 쑹더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푸젠성에 애틋한 감정이 있다. 병이 난 뒤 나는 두 번의 감정 변화를 겪었다. 당신을 대리 서기에 임명한 뒤 나는 손을 놓았고(放手), 당신을 서기로 임명한 뒤 나는 마음을 놓았다(放心).” 쑹은 이렇게 말하며 “이제 걱정을 안 하게 됐다”고 기뻐했다.

    그는 중국에서 ‘보모(保姆) 서기’로 통한다. 푸젠성 서기로 일하면서 “관리로 일하는 것은 보모로 일하는 것과 같다”며 인민을 자식 돌보듯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생긴 별명이다. 푸젠성 성장으로 일하던 2003년 그가 다른 성에 비해 비교적 이르게 농촌주민의 최저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한 것도 이런 생각에서다. 2004년 1월부터 시작해 2008년 마무리한 ‘육천(六千) 수리공정’도 농민을 위한 사업이다. 육천 공정이란 1000만 농민의 식수 문제를 해결하고 1000개의 저수지를 개보수하며 1000만 무(畝·1무는 대략 201.7평으로 한 마지기에 해당) 경작지의 관개시설을 확보하고 1000만㎥의 목재산지에 물을 대며 1000만 무의 토지유실을 막고 1000리의 하천을 정비한 것을 말한다.

    그는 양안 관계의 개선이 푸젠성 경제발전의 관건이라고 보고 중국과 대만의 관계 개선에도 힘쓰고 있다. 푸젠성에 ‘해안 서안 경제구’를 만들어 대만 기업을 대거 유치해 창장(長江) 삼각주와 주장(珠江) 삼각주의 중간에 위치한 푸젠성을 또 하나의 경제견인차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헤이룽장성의 지식청년에서 전문대 교수, 저장성 자싱(嘉興)시 서기에서 허베이(河北)성 부서기, 전국 총공회 부주석, 푸젠성 서기에 이르기까지 중국 강·남북과 중앙과 지방을 가로지르며 성실함 하나로 달려온 그가 앞으로 정치적 연줄이 없는 무당파로서 어디까지 달려나갈지 주목된다.

    ▼ 왕·이

    대만과의 관계 개선으로 기선 제압한 일본통

    배경도 파벌도 없이 실력으로 정상 향하는 무당파 4인
    지난해 6월29일 중국과 대만 언론은 양안이 분단 60년 만에 단일 경제공동체로 거듭나게 됐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 언론 역시 ‘차이완(China+Taiwan)’시대가 열렸다며 높이 평가했다. 이날 양국이 서명한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은 사실상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마찬가지다. 중국이 염원하는 대만과의 통일이라는 긴 여정에서 ‘경제적 통일’의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이 역사적 장면의 무대 전면에 중국에서는 천윈린(陳云林)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 회장이, 대만에서는 장빙쿤(江丙坤)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 이사장이 각각 대표로 섰다. 하지만 중국의 무대 배후에서 모든 걸 지휘한 사람은 바로 왕이 당 대만공작판공실 주임 겸 국무원의 대만사무판공실 주임이었다. 대만과의 관계 개선 및 통일의 초석 다지기라는 중책을 맡고 2008년 6월 외교부를 떠날 당시만 해도 많은 전문가는 피할 수 없는 ‘위험한 기회’ 앞에 놓인 왕 주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3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러한 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왕 주임은 당초 ‘중국 외교가의 떠오르는 샛별’로 불리던 사람이다. 문화대혁명으로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부에 들어왔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최연소 부부장에 이어 과거와 달리 업무가 막중해진 대만사무판공실 주임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장관급 이상 간부로서는 보기 드문 베이징 출신인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1969년 9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지식청년으로 헤이룽장성에 하방돼 7년5개월을 농촌에서 생활하다가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인 1977년 2월에야 베이징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왕이는 그해 12월 문혁 이후 10년 만에 처음 실시된 대학입학 시험에서 베이징제2외국어대 아시아아프리카어학부 일어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농공병단(農工兵團)에서 일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한 덕택이었다. 대학 입학 당시 만 25세로 동료들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는 비교적 조숙했고 거동이 신중했다. 특히 식견이 풍부하고 논리적이고 주관이 뚜렷해 절대 시류에 흔들리지 않았다.

    당시 교수들은 왕이 주임의 졸업논문을 지금도 기억한다. 친밍우(秦明吾) 당시 교수에 따르면 그가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중국과 일본의 역사 비교’와 ‘일본어와 몽롱시(朦朧詩)의 비교’란 2개의 논문은 다른 학생들의 졸업논문과 달리 수준이 너무 높아 이를 심사, 평가할 교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몽롱시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사회 불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무형식의 시를 말한다. 그의 논문은 극히 이례적으로 일어계의 잡지 ‘일어학습과 연구’라는 권위지에 실렸다.

    1982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부에 들어온 뒤 그는 승진가도를 달렸다. 외교부에 들어올 때는 만 29세의 늦깎이였지만 5년 만에 아시아를 담당하는 아주사(亞洲司) 처장에 올라 그보다 10여 년 전에 외교부에 들어온 선배를 앞질러갔다. 이어 1995년 6월엔 아주사 사장(司長), 1998년 4월 외교부 부장 조리(助理)에 이어 2001년엔 만 48세로 당시 외교부의 최연소 부부장(서열은 3위)이 됐다.

    배경도 파벌도 없이 실력으로 정상 향하는 무당파 4인
    이 같은 초고속 승진은 윗사람들의 눈에 들어서가 아니다. 나라를 막론하고 외교부 직원의 주요 평가 능력 가운데 하나는 얼마나 문장을 잘 다듬어 연설 원고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비터우(筆頭)’라고 불리는 이 분야에서 왕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1982년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일본 방문 때 일화다. 왕이가 쓴 원고 초안이 후 총서기로부터 단 2곳만이 간단히 고쳐지고 원고에 ‘아주 잘 썼음’이라는 비점(批點)까지 찍혀 내려온 것이다. 보통 담당 직원이 초고를 쓰면 상급자로 올라가면서 빨간 펜으로 수정되는 문장이점차 늘어 외교부장까지 올라가면 원고 전체가 빨간색 투성이가 되는 게 상례지만 그가 쓴 원고는 항상 거의 고칠 데가 없었다고 한다.

    성실하고도 근면한 근무 자세 역시 외교부 내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 밤 12시가 넘어 퇴근하는 것은 보통이고 바쁠 때는 새벽 2,3시까지 일했는데도 오전 6시엔 어김없이 사무실에 나온다. 항상 신중하고 근엄한 그의 표정은 외교부의 많은 직원으로부터 ‘쿨’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사람이 그리 살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라는 반응을 보이는 직원도 있다. 평소 테니스를 치기 좋아하며 외교부 등산협회 명예회장으로 등산도 즐겨 한다.

    중일 갈등을 넘어

    왕 주임은 ‘일본통’이다. 대학시절 일본어를 전공했을 뿐 아니라 대사 3년을 포함해 7년6개월을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또 1982년 외교부에 들어온 뒤 줄곧 아시아를 담당하는 아주사에서 일했다. 일본인 뺨치는 그의 일본어 구사 능력은 일본인을 탄복하게 만들 정도다. 후쿠다 야쓰오(福田康夫) 전 일본 총리와는 사적으로도 매우 가깝게 지내며 아키히토(明仁) 일왕 부부와도 교분이 깊다.

    하지만 그가 주일대사로 임명됐던 2004년 9월은 중국과 일본의 관계의 최악을 향해 달리던 시절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양국 관계는 냉각되기 시작했고 일본의 평화헌법 수정과 최근 공동개발로 합의를 본 동중국해 가스전 분쟁,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치치하얼(齊齊哈爾) 화학무기 방치 사건 등이 겹치면서 양국관계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가 대사로 취임한 지 3개월 만에 일본은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해 중국을 더욱 자극했고, 2005년 5월엔 고이즈미 총리가 “올해 안으로 또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발언하자 방일 중이던 우이(吳儀) 부총리가 갑자기 일정을 취소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사건까지 터졌다.

    이런 과정에서도 그는 와세다(早稻田) 대학 등 여러 민간기관을 돌면서 일본이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고 중일이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한다는 중국의 기본 외교정책을 열심히 설파하고 다녔다. 이런 일들이 밑거름이 되어 2006년 10월 아베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5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2007 4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일본을 방문했고 2008년 5월엔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일본을 답방했다. 꽁꽁 얼어붙었던 양국 관계가 아베 총리의 ‘파빙지려(破氷之旅·얼음을 깨는 여행)’와 원 총리의 ‘융빙지려(融氷之旅·얼음을 녹이는 여행)’, 후 주석의 ‘난춘지려(暖春之旅·따뜻한 봄날의 여행)’를 거치면서 봄날의 따스한 관계로 바뀐 것이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한 왕 주임은 앞서 2003년 8월 제1차 6자회담의 중국 측 수석대표가 되어 북한 핵을 푸는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왕 주임은 후 주석과도 관계가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다. 2007년 4월 원 총리가 일본을 방문할 때는 풍부한 대일 지식과 폭넓은 일본 주요 인사와의 교류, 주도면밀한 수행으로 원 총리를 매료시켰다. 그의 장인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중국 총리의 비서를 지내고 후일 주(駐)연합국 제네바 대사를 맡았던 첸자둥(錢嘉東·87) 씨다. 게다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는 마잉주(馬英九·61) 대만 총통 역시 임기가 2012년 5월까지로 그가 대만공작판공실 주임으로 있는 동안 양안 관계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래저래 경쟁자인 양제츠 외교부장보다 유리한 형세인 셈이다. 그가 이런 우세를 끝까지 잘 유지해 외교담당 국무위원이나 부총리 이상의 영도자급에 오를지 주목된다.

    ▼ 양·제·츠

    온유한 인상의 행운 잇따른 미국통

    배경도 파벌도 없이 실력으로 정상 향하는 무당파 4인
    2007년 4월27일 리자오싱(李肇星·68)의 후임으로 양제츠 외교부 부부장이 제10대 외교부장에 임명됐을 때 외국인은 물론 중국인들까지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자는 사실 중국에서도 이름에 잘 안 쓰는 벽자(僻字)다. ‘?’는 당초 8개의 관이 있는 고대 죽관악기를 말하는데, 진품은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공자 사당(孔廟)’에 있을 뿐이라고 한다. 양 부장 자신도 이름으로만 듣던 이 악기를 20세 때 베이징 톈탄(天壇)공원에서 처음 모형으로 봤을 정도라는 것이다.

    1950년 5월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부친이 지어준 것이다. 부친은 호랑이띠 해에 태어난 그가 사나운 성격말고 온유함과 강인함도 겸비하라는 뜻으로 호랑이 호(虎)자 위에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를 씌웠다고 한다. 작명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학자 타입의 그는 성격도 매우 조용하고 부드럽다. 그래서인지 5000명 외교부 직원 가운데는 그가 외교부장에 오를 때까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양 부장은 말 그대로 ‘미국통(美國通)’이다. 주미 대사 4년을 포함해 주미 중국대사관에서만 3번에 걸쳐 10년을 근무했다. 본국에 돌아와서도 11년1개월을 미국을 담당하거나 영·미권 국가의 통역으로 활약했다.

    후진타오 지도부가 이런 그를 외교부장에 앉힌 것은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겠다는 뜻이다. 리 부장에 이어 양 부장까지 미국대사를 지낸 사람을 연달아 외교부 최고 수장에 임명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미 외교에 능통한 그가 상하이 외국어학원 부속중학교 급우였던 왕광야(王光亞·61) 당시 유엔대사(현 국무원 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 주임)를 제치고 외교부장 자리를 거머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부시 전 대통령 집안과는 30년 가까운 교분이 있었다. 1977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티베트자치구까지 수행하며 통역을 담당했다. 이때 아버지 부시와 매우 친해졌고 아버지 부시는 그에게 ‘타이거 양(Tiger Yang)’이라는 별호를 지어줬다. 외교부장에 임명된 것에도 이러한 부시 일가와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배경도 파벌도 없이 실력으로 정상 향하는 무당파 4인


    미국에 대한 이해와 평소 관리해온 인맥은 2001년 4월 중국 남중국해 하이난(海南) 섬에서 미 해군의 EP-3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충돌해 중국 전투기가 추락하고 조종사가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 크게 힘을 발휘했다. 그는 미국 국무부와 의회 등 미국 권력기관과 대사관을 하루 동안 네 번이나 오가며 중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같은 날 그는 CNN 등 미국 TV 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 “자동차 사고가 나서 한 쪽은 사람이 크게 다치고 다른 한쪽은 차만 부서졌다면 어느 쪽이 먼저 사과하느냐”라고 주장했다. 미국 일상생활의 논리를 활용한 그의 비유는 미국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는 미국 국내 여론을 20%에서 단박에 5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양국의 비행기 충돌로 미국 정찰기는 무사히 안착했지만 중국 전투기는 추락하고 조종사가 실종한 점을 부각해 상대방 국민의 공감을 얻어낸 것이다.

    양 부장은 문화대혁명 당시 농촌 벽지로의 하방(下放) 광풍에도 불구하고 시골로 내려가지 않았고, 대신 집에서 가까운 상하이 푸장(浦江)의 적산전력계 공장에서 학도공으로 일하는 행운을 얻었다. 문혁 기간 중이던 1973년엔 첫 번째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돼 영국에서 유학하는 행운이 뒤따랐다. 부인 러아이메이(樂愛妹)씨는 이때 만났다.

    나이와 경력으로 볼 때 그는 경쟁자인 왕이 주임보다 앞선다. 왕 주임은 2007년 가을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출됐지만 양 부장은 2002년 가을 제16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된 데 이어 5년 뒤 중앙위원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최근 두 사람의 경쟁에서 왕 주임이 우세를 굳혔다는 평가가 많다. 왕 주임이 대만과의 관계 개선에서 큰 성공을 거둔 반면, 바람 잘 날 없는 중미 관계 등 외교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양 부장의 정치적 성과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정계에서는 후진타오 주석과 교분이 깊은 왕 주임이 장쩌민 전 주석의 눈에 들었던 양 부장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분석이 더 많다. 물론 최종 결과는 2012년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가 끝나봐야 알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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