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국 개신교와 목사들에 대한 쓴소리를 담은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삼인)라는 제목의 책을 낸 그는 “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고 했다. 중앙대 철학과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985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숭의여중과 대광중고등학교에서 교목실장을 지낸 류씨는 ‘강의석군 사건’ 여파로 지난해 대광고 교목실장에서 직위해제됐다.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에 목사직을 스스로 반납한 후 지난 3월초 액세서리 노점상으로 나섰다.
-굳이 노점상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얼마 안 되는 퇴직금에 손댈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만약 그 돈으로 일을 벌였다가 본전도 못 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밑천이 별로 안 드는 액세서리 노점상을 시작한 겁니다.”
-장사는 잘되나요.
“힘들죠. 하루 매상이 1만~2만원인 적도 있고 많아야 4만~5만원이에요. 노점상을 하면서 그동안 학교와 교계에 갇혀 지내느라 모르던 세상살이를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대화의 주제가 노점상에서 우리나라 개신교가 당면한 문제로 옮겨가자 조용한 말투와 온화한 미소는 사라지고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배타성과 독선으로 덧칠한 우리나라 개신교는 언제 공중폭발할지 모른 채 날고 있는 결함투성이 비행기와 같습니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비행기는 서둘러 연착륙시켜야 해요. 비행기를 탄 승객(신도)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니까요. 저 또한 20년을 목사로 살면서 한국 교회의 잘못된 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비겁하게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나는 겁쟁이였다”
한국 개신교가 처한 상황과 직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침묵했다는 류씨. 그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겁 많은 소년이었다”고 고백했다. 컴컴한 밤에 마당 끝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에 갈 때마다 늘 무서움에 떨었고, 아버지보다 키가 더 자랐을 때도 그 두려움은 여전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한국 개신교와 목사를 향해 ‘칼’을 빼든 계기는 무엇일까.
“소심하고 용기 없던 제가 지난해에는 투사처럼 살았어요. 2004년 6월16일 아침, 의석이가 교내방송을 통해 폭탄선언을 했어요. ‘우리나라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미션스쿨이라고 해서 학생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예배 참여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듭디다. ‘나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몹시 두려웠죠. 대단한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솔직히 도망갈 데가 없어서 의석이 편에 섰던 겁니다.”
류씨가 잠시 말문을 닫았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다시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바른 소리를 외치는 제자를 외면할 수 없었어요. 학교측이 제자에게 취한 부당한 조처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싶지 않았어요. 의석이가 교내방송 이후 22일 만에 제적을 당한 날, 밤새워 고민하다가 새벽에 학교 홈페이지에 학교의 결정(제적)에 반박하는 성명서를 올렸어요. 그런데 출근길에 라디오를 듣는데,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제가 쓴 글(성명서)을 소개합디다. 순간 ‘아, 이제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한국 개신교에 대해 할 말이 많았지만 ‘밥줄’ 때문에 미적거리며 꾹 참고 살았는데, 이제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슴에 묻어둔 쓴소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겁니다. 만약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학교에 남아 ‘조용히’ 살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