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SMU 로스쿨 LLM 과정 졸업식 때, 그간 함께 고생했던 아시아권 친구들과 찍은 사진.
“도시락 싸서 도서관에 다녔고, 틈틈이 영어과외와 고시학원의 문제집 편집 일을 도우면서 번 2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한 달을 살았습니다. 절박하니 열심히 해야 했죠.”
그렇게 공부한 지 6개월 만에 7급 검찰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여성으로선 최초의 일이다 보니 고충도 적지 않았다. 동료 직원들뿐 아니라 피의자들조차 ‘여자가 어떻게 조사를 하냐’고 코웃음칠 정도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자인 데다 나이도 어려 보이니까, 청소 아주머니가 잡무를 돕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남자 직원들의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았다고 어찌나 혼을 내던지. 처음 지원할 때부터 여자가 행정직에나 가지, 왜 검찰직을 하려느냐는 얘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오기가 생기죠. ‘여자에겐 어려운 일’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자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져요. 실제로도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요. 통념 때문에 힘들 때도 있지만 오히려 힘이 되기도 합니다. 수사할 때는 여성의 부드러움이나 섬세함이 더 유용한 측면도 있고요.”
검찰직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인천지검 송무계장, 서울지검 공안2부 수사계장, 대검 강력부 계장을 거쳤다. 여자인 그가 공안부나 강력부에 가게 될 줄은 스스로도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름이 남자 같아서 인사권자들이 착각한 때문이었다. 요행 행(倖)에 바랄 선(羨), 그러고 보니 착각할 만도 한 이름이다.
“갓난아이 때 워낙 약해서 난 지 한참이 되도록 이름을 짓지 않았답니다. 나중에야 아버지가 유명한 작명가를 찾아가셨더니, 허약하게 태어났으니 ‘요행을 바래 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그렇게 짓더라고 하더군요. 이름에는 잘 쓰지 않는 한자잖아요.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들도 읽기가 어려워선지 수업시간에 질문을 별로 안 받았지요. (웃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자 같은 여자’는 내력인 듯하다. 아들 하나에 딸만 여섯인 집의 다섯째인 그는, 아들 하나를 더 원한 부모님 때문에 옷이며 머리모양을 남자아이처럼 하고 다녀 ‘공갈남자’라는 별명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딸들에게도 대학시험을 치를 기회는 주지만 한번 떨어지면 꼼짝없이 살림을 시킨다는 부모님의 교육방침 때문에 죽어라 공부했다는 이야기다. 고등학교에서는 이과를 택했지만, 한번 법대에 가겠다고 마음먹으니 다른 과에는 눈이 가질 않았다. 그렇게 해서 이화여대 법정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러고 보니 항상 시험성적이 출중했던 모양이다. 검찰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사법고시를 볼 생각은 없었느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검찰에서 일하는 동안 판·검사들을 많이 봤죠. 그런데 별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더라고요. 우선 제 성격이 수직적인 사고보다는 수평적인 사고를 좋아하는 편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밖에서 맺는 인맥이 중요하잖아요. 법조계는 그런 문화가 더 강한 편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걸 잘못했거든요.”
남자 동기들은 유학 보내는데…
나름대로 잘나가던 검찰공무원을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는 ‘매너리즘’이었다. “그럭저럭 밥이나 먹고 사는 건 나 자신에게 용서가 안 됐다”는 회고다. 미국 로스쿨 유학을 결심하고 방법을 찾았지만 그리 녹록지 않았다.
“공무원 유학신청을 대여섯 번 했습니다. 검찰청의 경우 몇 배수 추천을 받은 뒤 영어시험을 봐서 대상을 선발하는데, 우선 추천부터 안 되더라고요. 주변의 남자 동기들은 되는데…. 그래서 법무부에 항의했더니, 마지막에 지원할 땐 앞으론 지원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회의가 느껴졌죠. 낡은 인식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개인경비로 유학을 결심했다. 미국 법대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세 개의 대학인 하버드와 예일, SMU에 지원했고, 그중 장학금을 주겠다는 SMU LLM(법학석사) 과정에 진학을 결정한다. 아들과 딸을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퇴직금과 아파트 전세비 등을 털었지만 그것으론 등록금 일부와 몇 개월치 생활비를 댈 수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