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대성(朴大成·63)은 경주를 그리는 화가다. 경주 남산과 불상과 탑과 소나무와 대나무와 황룡사와 분황사와 포석정을 그리지만 더 열심히 화폭에 담는 것은 단연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그의 불국사 그림은 그림이 닿을 수 있는 경지를 아연 뛰어넘는다. 1500년 전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었다면 1500년 후 박대성은 불국사를 그렸다. 하고많은 이름 중에 하필 대성인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불국사가 왜 토함산 아래에 놓였는지 왜 거기서 1000년을 버티는지에 관해 우리는 아는 바 없다. 감격할 줄도 모른다. 박대성은 수묵으로 실경산수를 그리는 화가였다. 다들 현대로, 채색으로 몰려가버릴 때 외롭고 굳세게 동양화의 전통을 지키면서 수묵작업을 고집해왔다.
“다들 현대미술을 얘기해서 그게 뭔지 알고 싶었어요. 현대미술이 뭐냐고 물어도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어. 그것의 본고장이 뉴욕이란 말을 듣고 거길 갔지. 소호에 방을 얻어놓고 1년을 살았어요. 현대미술의 요체가 뭔지 알고 싶었거든요.”
뉴욕에서 별의별 그림들을 구경했다. 센트럴파크와 다운타운과 롱아일랜드를 수묵으로 그리며 돌아다니던 어느 날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미술이다. 현대미술 최고의 도구는 필묵이다!’”
경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게 최첨단의 현대는 다름 아닌 불국사다!’ 싶었다. 그날로 보따리를 쌌다. 경주가 그렇게 박대성을 불러들였다. 1994년이었다.
“성질이 좀 급해요. 생각대로 행동을 못하면 좀이 쑤셔 못 견뎌. 김포에 도착하자말자 경주로 달려왔더니 해가 뉘엿뉘엿 지더라고. 불국사 마당에 들어서는데 온몸에 쫘악 전율이 오데요!”
다짜고짜 주지 만나기를 청했다. 주지는 외출 중이고 부주지 성천 스님만 계시다고 했다. 성천 스님께 사정을 말하고 1년만 불국사 방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대중회의에 부쳐봐야 안다고 하시데요. 기다렸지. 얼마 후 ‘통과됐습니다’란 답이 왔어. 그날 밤이 보름이었나 봐. 달이 휘영청 밝은데 범영루 앞에 섰지. 아테네에서도 베니스에서도 백두산 천지에서도 느끼지 못한 감동이 몸을 훑고 지나가더라고.”
막상 불국사를 그리려고 붓을 잡았을 때 그는 절망한다.
“내공이 부족해. 내 실력이 못 미치더라고. 단전에 기운이 달려 마음먹은 대로 불국사를 그려낼 수가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