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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은 없었다…학병 권유는 힘 기르라는 뜻”

육당 장손 최학주가 말하는 ‘내 할아버지 최남선’

“친일은 없었다…학병 권유는 힘 기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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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무실역행, 진실정신, 지방색 타파’ 강조
  • ● 육당은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어딘지도 몰랐다
  • ● 친일이 ‘부역’이라면… 그런 일은 없었다
  • ● 학병 권유는 軍 지휘 경험 쌓으라는 의미
  • ● 후예들 “육당은 한국의 토머스 제퍼슨”
“친일은 없었다…학병 권유는 힘 기르라는 뜻”

● 1941년 서울 출생<br>● 경기고, 서울대 공대, 미국 터프스대 대학원 졸업<br>● 한국기술개발공사, 아메리칸 시아나미드 근무, 블록드러그사 기술이사<br> ● 미국 식품의약국(FDA) 규제 자문회사 ‘케이텍’ 설립<br>● 조선광문회복원추진위원회 자문

파란만장했던 20세기 한국사에 한 획을 그은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이 최근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의 장손 최학주 씨(72)가 화두를 던졌다. 최 씨는 2011년과 2012년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근대의 터를 닦고 길을 내다’라는 책을 각기 한국어와 영역본으로 펴낸 데 이어 8월 출간을 목표로 ‘최남선 한국학 현대문 총서’를 만들고 있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최 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도미 유학 후 줄곧 뉴저지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런 그가 육당 사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왜 새삼 이 같은 책들을 내는 것일까. 육당의 행적과 공과(功過)에 대해 그와 후손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그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최남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육당은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상가요, ‘시대일보’라는 일간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었다.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시인이었으며, 일생을 조선사 연구에 매진한 역사학자였다. 육당은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열하일기’를 비롯한 우리 고전 35종 59책을 중간(重刊)했다.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도 펴냈다. 조선광문회를 만들어 선대가 일군 가산 30만 원(현재 가치 300억여 원)을 모두 이런 출판·문화사업에 쏟아 부었다. ‘황성신문’에 투고해 일화배척(日貨排斥)을 주장하고,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죄로 옥고를 치렀다. 그럼에도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 말기 조선사 편수위원 등을 지낸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육당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육당은 반민족행위자라는 오명과 건강 악화로 말년을 불우하게 보냈다. 최학주 씨는 육당과 17년을 함께 산 장손인 만큼 그에 대한 궁금증을 누구보다 명쾌하게 풀어줄 만한 증인이다. 태평양 너머의 그와 e메일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 집안에서 육당은 어떤 분이었나요.



“당신이 태어난 시기가 유교적인 가족 질서와 전통을 중요시하던 때였으니 가문의 명예를 지키며 부모님 말씀 잘 따르고 형제간 우의에 충실했습니다. 육당이 소년시절에 벌인 조선 근대화 작업은 갑신정변의 실패에 실망했던 엄친(嚴親) 최헌규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고 모친은 엄친보다 더 엄했다고 합니다. 육당은 어려서부터 부지런한 학동으로 소문 나 있었는데 그런 성품과 체질은 모친을 닮았다고 합니다. 육당은 한때 프랑스 유학을 계획했었는데 엄친의 병환으로 뜻을 접었을 만큼 유교적 효심이 지극했어요.

참척(慘慽)의 아픔을 딛고

“친일은 없었다…학병 권유는 힘 기르라는 뜻”

1957년 정초 최남선(왼쪽) 최두선 형제.

차남이던 육당은 맏아들을 형님이 가문을 이을 수 있도록 양자로 보냈습니다. 3남1녀를 뒀는데, 자식들의 선택과 판단을 신뢰했습니다. 진로 선택도 스스로 하게 해서인지 아무도 육당의 학문적 유업을 계승하지 않았어요. 육당은 집안 살림과 대소사 통솔을 제 할머니인 부인에게 맡겼습니다. 소년시절부터 명사로 이름이 나 바쁘기도 했지만 안팎의 일에 분명하게 선을 그었고,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었던 듯합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 할머니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사랑방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늘 바쁘셨어요. 제 아버님이 휴전 직후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빈자리까지 채워주셨습니다. 아주 자상하셨고 손자손녀들의 응석을 물리치는 때가 없었습니다. 육중한 체구로 제 손아래 누이와 고무줄 넘기도 할 정도였어요. 자전거 타는 법도 할아버지께 배웠지요.”

▼ 6·25전쟁을 전후해 힘겨운 나날이 이어진 걸로 압니다.

“큰딸은 인민군에게 학살당했고, 그 사위는 납북되어 아직도 생사불명입니다. 막내아들은 자진 월북하고, 몸이 약해진 큰아들은 부산 피난처에서 병사했어요. 손자 하나도 대구 피난처에서 익사했고요. 전쟁으로 풍비박산 난 집이 우리뿐은 아니었지만 육당에겐 가슴을 찢는 아픔이 또 있었습니다. 하나는 민족과 국토가 둘로 갈라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우이동에 소장하고 있던 17만 권의 장서가 소진(燒盡)된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도 귀한 문화재를 잃은 거죠. 자손들 앞에서 내색하진 않았지만 많이 아파하셨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불경으로 마음을 달래곤 하셨지요. 그런 중에도 전쟁 전부터 집필하시던 ‘조선역사사전(朝鮮歷史辭典)’을 완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당신을 지탱하셨어요. 사전 편찬 작업으로 불철주야 과로한 탓에 병환을 얻었고 돌아가시기 수년 전에 천주교에 귀의했습니다.”

▼ 불교에 독실했고 또 평생 단군 연구에 매진하던 분이 왜 개종한 건가요?

“당시 많이들 놀랐지요. 특히 조계종 내분으로 적잖이 시끄럽던 불교계가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압니다. ‘경향신문’인가에 당신의 개종 성명서가 나온 다음 날, 넓은 마당은 아니지만 아무튼 마당에까지 스님과 유림계 손님들이 가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성명에서 ‘과거 50~60년간의 종교적 체험을 청산하고 가톨릭에 귀의하여 감연히 영세하니,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구령(救靈)인 동시에, 국가 민족에 대하여는 혁구진신(革舊振新)에 일대 염원’이라고 하면서 ‘지난 200년 우리 우국선철(憂國先哲)들이 미처 다하지 못한 빚의 책임을 벗어볼까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실학운동으로 시작된 우리의 근대화 작업을 끝내지는 못하더라도 가톨릭적인 정신체계가 결국은 당신의 조국 근대화 염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후 제 어머님을 포함해 가족들 전부가 천주교 영세를 받았지만 저만 아직도 이른바 종교의 구제, 구속, 구령의 문제에 확신이 없어 그 은혜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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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기자│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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