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와 동시에 이문열은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작가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표적인 보수 작가로 손꼽혀온 그는 진보적 지식인들과 크고 작은 논쟁을 벌여왔다. 그는 작가의 창작 공간이자 작가 지망생을 위한 학숙(學塾)으로 경기도 이천에 ‘부악문원’을 열기도 했다. 광복 70년을 맞아 그에게 우리 사회의 역사와 작가 개인의 역사에 대해 물어봤다. 인터뷰는 5월 26일 그가 거주하는 부악문원에서 진행됐다.
김호기 1948년에 태어나셨습니다. 광복 70년과 거의 생을 같이해오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회가 어떻습니까.
이문열 제 생일이 1948년 5월 18일(음력)이에요. 양력으로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을 때 개표하던 순간이었다고 해요.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됐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나라가 세워지고 분단되던 해에 태어났다는 점에서 광복 못지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김호기 저는 1979년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화제작이던 선생의 ‘사람의 아들’을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선생은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한 다음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결국 작가가 되셨습니다.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요.
이문열 작가가 되고부터 40년 가까이 계속 받는 질문 중 하나예요. 그런데 그 답이 자꾸 변해요. 우리가 무엇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되고자 해서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밀려 밀려 가다가 되는 사례도 있어요. 예전에는 작가가 되고자 해서가 아니라 어쩌다 됐다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그런 무책임한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서 마음속에 작가가 되고자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답을 하기도 했어요. 제 경우는 적극적으로 되고자 선택했다기보다는 생업을 가진 대다수 사람에게서 보듯이 살다보니 그게 제일 하기 쉬웠고 글 쓰는 일이 가깝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만의 리그

자화상 앞에 선 이문열 작가.
이문열 내가 중년에 접어들기 전까지 권력을 가진 그 사람들은 모두 다 한 발 떨어져 있는 이들이었어요. 4 · 19, 5 · 16, 10월 유신 등과 같은 정치적 변혁은, 내 나이 40대 초반까지 실감 나는 현실이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였어요. 나는 국외자였지요. 그 까닭은 아마 아버지의 유산 때문이었을 것이에요. 사회는 살아 있었지만, 나는 연좌제 같은 것에 억압돼서 지냈어요. 어릴 적에 어머니나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영향이 컸어요. 예를 들어 4 · 19 때 어머니가 노심초사 걱정하고 못마땅해하신 것은 형님들이 그 속에 뛰어드는 것이었어요. 자유당과 민주당이 싸울 때도 어머니는 그들만의 리그처럼 여기면서 우리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말씀하셨지요.
김호기 우리 현대사에서 산업화를 연 박정희 시대만큼 논란이 큰 시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은 10대에서 20대에 걸쳐 박정희 시대를 겪었는데, 이 시대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문열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대통령 후보였을 때의 공약 중 하나가 연좌제를 푼다는 것이었어요. 아무도 그런 말을 못할 때였지요. 그 뒤 상황이 이상하게 풀리면서 자기가 다급해지니까 못 풀었어요. 그래도 최초로 연좌제를 푼다고 말한 사람이 박 대통령이지요. 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그게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어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시대에 악감정이 많지는 않았어요. 3선개헌과 유신체제를 지켜보면서 의심은 가졌지만 절실한 문제의식은 없던 셈입니다. 문제의식이 있었다면 시위나 데모에 참여했을 텐데, 그들만의 리그로 생각했어요. 내가 끼어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랬다가는 손해를 보게 되는 거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북한으로 간 아버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한때 ‘일본을 통해 밀항해 몰래 아버지를 만나고 6개월 동안 교육을 받고 와서 뭘 했다’는 혐의를 받은 적도 있는데, 내가 6개월 동안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어려웠어요. 식구들 외에는 증명받기가 어려웠지요. 술집도 한 달에 한 번은 갔지만 그 술집에서 나를 잘 모른다고 했어요. 참 막막했어요. 1982년 연좌제가 풀리고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후에도 북한대사관이 있는 나라에 갈 때는 절대 혼자 가지 않았어요. 내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갔어요. 무슨 지령을 받았다 하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이런 상태였으니 제게는 그들만의 리그로 보였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