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27호에 의해 1993년 안보리 산하에 설립된 ICTY는 보스니아 내전 때 옛 유고 연방에서 자행된 반인륜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마련된 국제 법정으로 해당 범죄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소추, 처벌한다. 권오곤 재판관은 ‘20세기 최악의 전범’으로 꼽히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 재판도 진행했지만 그가 2006년 돌연사하는 바람에 ‘최종’판결엔 이르지 못했다.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1976년), 사법시험(19회) 수석 합격, 사법연수원(19기) 수석 수료 ‘기록’을 지닌 그는 1979년 서울민사지법에서 판사로 근무를 시작해 대구고법 부장판사로 재직하다 2001년 ICTY 재판관에 선출됐다. 한국인 최초로 선출된 국제형사재판기구 재판관이다. 이후 15년간 ICTY에서 일했다.
판결 6개월 전부터 ‘고시생 모드’
▼15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소감이 남다를 것 같네요.“아직 정신없어요. 그간 이사를 10번쯤 했는데, 짐을 풀 때 제가 함께 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카카오택시 같은 앱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선진 조국’에 돌아온 실감이 났습니다(웃음). 집 앞에 아침밥 사 먹을 식당도 있고, 주말에 문 여는 슈퍼마켓도 있으니 편리하죠. 어른이 된 뒤로 가장 오래 산 도시를 떠나 허전하기도 합니다.”
▼ICTY 연구관으로 파견됐던 어느 판사가 ‘권 재판관님은 평소 토론을 즐기고 후배의 의견도 잘 수용하신다. 한인 커뮤니티 사람들에게 밥도 잘 사주신다’고 하더군요.
“그곳 사람들은 밥도 각자 먹어요. 회식은 일절 없죠. 그래서 제가 우리 재판부 4명이라도 두세 달에 한 번씩은 회식하자고 했어요. 밥은, 내가 너무 외로우니까 사람 만나고 싶어서 사는 거예요(웃음). ICTY는 자원해서 간 곳이라 일하는 게 참 재미있었어요. 영미법과 대륙법 체계를 절충하며 적합한 형사사법제도를 선택해 선례를 만드는 게 좋고, 세계 각국 동료들과 얘기하는 게 즐거웠어요. 가족한테는 미안했죠. 손녀(첫째가 낳은 딸)도 자주 못 보고, 미국에 사는 둘째는 서울에서 만나야 할지 헤이그에서 봐야 할지 모르겠고, 셋째도 마음에 걸리고, 무엇보다 10년 넘게 매일같이 ‘코끼리표’ 보온밥통에 도시락을 싸준 아내에게 미안했어요. 아내가 ‘도시락 졸업’을 해 아주 좋아했죠.”
▼아침밥 파는 식당에 감탄하신 걸 보니 요즘은 아침도 사 드시나 보네요.
“아, 들통났나요?”
▼귀국 일주일 전에도 판결을 하셨더군요.
“판결을 6개월 앞두고부터는 사법시험 막바지 공부할 때처럼 했어요. 집에 오면 저녁 먹고 와인 한잔 한 뒤 밤 9시에 잠들고 새벽 2시면 일어나 일했죠. ICTY 운영 최종 기한이 올 3월 31일로 못 박혀 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6년 걸린 카라지치 재판
▼판결 선고를 들을 때 카라지치의 태도는 어떻던가요. 밀로셰비치와 비교해보면.“두 사람 모두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카라지치가 법원 절차를 좀 더 잘 따라줬어요.밀로셰비치는 증인에게 소리를 지르고 단식투쟁도 불사했습니다. 사건 규모가 카라지치의 3배에 달했지요. 피해 지역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으로 방대하고요. 밀로셰비치는 저를 ‘미스터 권’이라고 불렀고, 재판부가 선고 시 주문을 낭독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해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카라지치는 재판관들을를 ‘각하(your excellency)’라고 불렀어요. 선고 시 주문을 낭독할 때도 일어나더군요.”
▼카라지치에게 왜 40년형을 선고했습니까. 검찰은 종신형을 구형했는데.
“보스니아의 유기징역 최고형이 40년이고, 유럽 인권재판소에서 감형 가능성이 없는 무기징역은 헌법정신에 어긋난다고 보는 시각을 고려했습니다. 카라지치가 보스니아 내전을 끝내고 나서 미국 주도의 데이튼 평화협정에 따라 당수직에서 내려왔다는 점이 감경 사유였지요. ICTY는 형의 일부를 복역하고 행형 성적이 좋으면 가석방해주는데, 피고인이 이미 8년 정도 구금된 점도 참작했습니다(카라지치는 1995년 전범으로 기소됐으나 13년간 도피하다 2008년 7월 붙잡혔고 2009년부터 재판을 받아왔다).”
▼권 재판관께서 이번 재판의 판결문을 90분에 걸쳐 읽었다고 들었습니다. 영국 BBC방송은 이 재판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요한 재판 중 하나’라고 보도했더군요.
“90분을 예상했지만 판결문 2600쪽을 읽다보니 실제로는 100분이 걸렸습니다. 이번 재판은 e-Court(전자법원)의 표본입니다. ICTY 홈페이지를 통해 판결문의 한 대목을 누르면 사건 소개는 물론 관련 증인의 심문 과정도 영상으로 볼 수 있죠.”
▼2009년부터 재판을 받아왔는데 왜 지금에야 판결이 난 건가요.
“증거를 확보하고 문서를 정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재판 녹취문만 5만 쪽, 공소장을 비롯한 각종 결정서가 9만 쪽, 증거 기록이 18만 쪽에 달합니다. 국제 재판의 문제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건데, 저만 해도 밀로셰비치 재판 4년 반, 포포비치 외 6명 재판 4년, 카라지치 재판에 6년이 걸렸어요. 카라지치 사건의 경우 보스니아라는 큰 나라에서 일어났는데, 별지 사실만 178개가 있습니다. 가령 크라비츠아 창고에서 1000명을 죽인 게 하나의 별지 사실인 겁니다. 이 별지 사건 하나만 재판해도 국내에선 역대 최대 규모일 겁니다. 카라지치 재판을 위해 600명의 증언을 들었는데, 어떤 증인은 피해 사실이 너무 많아 10일, 3주, 한 달에 걸쳐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아빠 찾는 피투성이 꼬마
▼일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피고인의 건강 문제도 있어 일주일에 나흘만 재판했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수시로 들어오는 신청사건을 재판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판사들과 모여 재판에 거론된 증언, 법률의 중요성을 판단하며 정리했습니다. 나중엔 피고인은 많이 잡혀오는데 법정은 한정돼 있으니 법정을 오전반(오전 9시~오후 2시 15분), 오후반(오후 2시 45분~오후 7시)으로 나눠 운영했지요. 재판 과정이 보통 3개 국어로 동시통역되니 또 시간이 걸리죠. 대개 오전반 재판 후 도시락 먹고, 오후에는 관련 기록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죠.”
▼참혹한 증언을 많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가슴 아픈 증언이 많았죠.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하차시켜 들판에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쏴 죽였는데, 그 틈에서 대여섯 살짜리 꼬마가 피투성이가 된 채 ‘아빠, 아빠’ 하면서 나왔대요. 지휘관이 ‘아이를 쏘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아이를 쏘지 못했는데, 그 애가 청년이 돼 우리 재판의 증인으로 나왔어요. 증언을 듣는데 목이 메더군요.”
▼그가 어떻게 증인으로 출석할 수 있었나요.
“ICTY는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증인이 증언 후 신원을 바꾸고 외국에 나가 사는 비용까지 부담합니다. 그러니 운영비가 많이 들어요. 우리가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와 자매 법원(sister court)인데, 두 재판소가 유엔 1년 예산의 10분의 1인 1억 달러(약 1140억 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장 검증도 갑니까.
“갑니다. 밀로셰비치 재판 때는 사건이 너무 많아서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는 데다 변호인이 없어서 안 갔습니다. 하지만 ‘포포비치 외 6인 사건’ 재판을 맡아서는 현장검증을 1번, 카라지치 때도 2번 다녀왔습니다. 포포비치 사건과 카라지치 사건 때는, 1995년 7월 세르비아인들이 스레브레니차라는 유엔 보호구역을 침범해 무슬림을 쫓아내고 1주일 사이 8000명의 보스니아인을 죽인 지역에 다녀왔습니다. 이후 크라비차 창고와 필리차 극장에도 갔습니다. 크라비차 창고에는 1000명 정도를 가두고 수류탄을 던졌는데 생존자가 3명이 있었고, 필리차에선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현장이 보전된 덕에 수없이 많은 핏자국을 볼 수 있었습니다.”
▼피해 현장이 남아 있으니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겠군요.
“불충분합니다. 2차 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소 때는 독일 SS부대가 학살한 과정이 일기로 꼼꼼하게 남아 있어 증거 확보에 문제가 없었어요. 하지만 유고 재판에선 그렇지 못했어요. 다행히 인공위성 사진, 보스니아 사람들이 기록해둔 통화도청 기록을 통해 핵심 증거 한두 개를 찾았지요. 1995년 7월 5일까지는 멀쩡하던 땅이 일주일 뒤인 7월 12일에 찍은 인공위성 사진에는 파헤쳐져 있어요. 이걸 바탕으로 집단매장지를 찾아낸 겁니다. 그런데 세르비아인들이 이걸 알고는 집단매장지에 묻힌 시신들을 포클레인으로 끄집어내 수백 km 떨어진 곳에 묻어버렸어요. 이것도 결국 찾아냈습니다.”
이준 열사와 ‘평화궁전’
▼증언을 듣거나 현장 검증을 다녀오면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법정에서 들은 걸 실생활에 안 가져오고, 실생활을 법정에 안 가져오도록 노력하죠. 판사들이 그래서 법복을 입는다고 해요.”
▼2005년 ICTY 재판관 재선 이후 재선 소식 을 못 들었습니다.
“ICTY가 2010년 말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기에 유엔에서 2009년 ‘굳이 1년 일할 재판부를 꾸리기 위해 선거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ICTY 소장이 먼저 이를 유엔에 건의했고,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해 기존 재판관들의 임기가 연장됐지요. 그런데 카라지치, 믈라디치 같은 핵심 전범들이 2008년에 잡혀 오면서 할 일이 늘어나 매년 결의를 통해 ICTY가 1년씩 연장됐습니다.”
▼ICTY 재판관 재임 중에 헌법재판소, 대법원 재판관 후보자로 거론되기도 했는데요.
“곧 임기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 후보직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2006년의 일인데, 사법연수원 2년차 때 ‘야간방위’를 병행한 것이 문제 돼 결국 안 된 걸로 압니다. 도리어 잘됐죠. 그 덕에 ICTY 재판관으로서 전범 판결을 끝마칠 수 있었으니까요.”
▼야간방위?
“대학 동기들이 대개 사법시험을 1, 2번 보고 붙었는데, 저는 3번 도전해 됐어요. 그래서 판사가 빨리 되고 싶었지요. 법무관을 3년 하는 것보다 사법연수원 있을 때 야간방위(오후 6시~오전 8시)로 1년 2개월 근무하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공무원이 겸직할 경우 기관장의 허락을 받아야 해서, 저도 연수원장의 허락을 받고 복무를 해 법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어요.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판사 생활을 잘 하셨을 것 같은데,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가….
“아이가 셋인데, 당시 첫째가 대학에 갈 때인 데다 둘째가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까 경제적으로 부담되라고요. 그전부터 국제재판소 근무를 선망했고, 국내보다 대우가 나아 도전했어요(ICTY 재판관은 유엔 사무차장급 대우를 받는다). 마침 네델란드 여행을 한 판사 후배가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일하는 한국인 할머니의 소원이 ICTY가 들어선 평화궁전에 한국인이 진출하는 걸 보는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줬습니다. 이준 열사가 만국평화회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만국평화회의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평화궁전에 한국인이 없다니 마음이 쓰였어요.”
▼ICTY 재판관이 된 뒤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지낸 인물을 법정에 세웠더군요.
“2001년 3월 유엔 선거를 통해 선출돼 11월에 ICTY에 부임했는데, 밀로셰비치가 그해 7월에 잡혀왔습니다. 그래서 세기의 재판을 할 수 있었죠. 그전에 ICTY가 밀로셰비치를 기소했지만 현직 대통령이라 사실상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구속할 수 없었는데,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전직 대통령을 인도해준 거죠.”
▼1980년대에 청와대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던데요.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에게 잡힌 겁니다. 군대 3년을 피하려다 청와대에서 3년 근무했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입법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국회의 입법 기능을 싹 없애고 그 기구가 부처의 법안을 받아 법을 만들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부처 이기주의에 따라 법이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 청와대에서 그런 걸 최종적으로 체크하는 태스크포스팀(상부조직-법제위원회, 하부조직-법제연구반)을 만들고 법조인들을 부른 겁니다. 당시 저는 주로 법원과 관련한 입법 작업을 했습니다.”
▼청와대 생활은 어땠습니까.
“굉장한 모순 속에서 살았습니다. 1979년 9월에 판사 임용됐는데 1981년 11월에 거기로 불려간 겁니다. 저는 지금도 판사를 외부에 파견하는 데 반대합니다. 판사로서의 독립성, 진실성을 해칠 수 있거든요. 청와대 있을 때 ‘나는 판사이면서 판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판사로서 지킬 건 지키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년을 채울 무렵 유학을 이유로 법원 복귀를 요청했고, 복귀 후 하버드대 로스쿨로 유학 갔습니다.”
전두환과 일본 전범
▼ICTY 전범 재판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과거사 청산 문제가 떠올랐습니다.“일례로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은 국제형사법상 ‘인도(人道)에 반한 죄’에 해당하기에 전두환 등 관련자들을 (국내 처벌 이전에)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시위 진압 목적도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간인에게 본때를 보인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공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관련자들이 국내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이제는 국제형사재판소에 세울 수 없습니다. 당시 우리가 견문이 부족했다고 할까.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제법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처벌을 모면한 2차 대전 중 일본 전범들도 법정에 세울 수 있을까요.
“그동안 전범재판은 전승국이 패전국에 전범재판을 강요하는 형식으로 운영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유엔 안보리가 재판소를 만드는 방법도 있죠. ICTY도 그렇게 만들어졌고요. 하지만 후자는 유엔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결의되지 않습니다. 가령 일본 전범재판소를 만들려고 해도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불가능합니다. 국제사회에서 누군가를 처벌한다는 건 선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 있는 나라에 밉보이는 나라를 재판하는 건데, 그럼에도 처벌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으니까 국제 사회로서는 발전이라고 봅니다. 다행히 국제형사재판소(ICC)라는 상설 재판소가 생긴 뒤에는 가입 국가 내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하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수 없게 하는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국제 전범 재판을 더 할 의향은 없습니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쓰거나, 로펌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갈 때만 해도 한국인이 아무도 없었지만 한국 대법원과 ICTY에 연구관 펠로(fellow)를 건의한 뒤 7년 동안 매년 1명의 재판관이 ICTY에 왔고, 그들이 현재 국제법연구모임 SHILA(Seoul, Hague, International Law Academy)도 꾸려가고 있습니다. 국제 재판소 현직에 계속 있고 싶지는 않아요. 이젠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