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공지영 “이제는 자만도, 자학도 하지 않는다”

5년 만에 새 소설집 ‘별들의 들판’펴낸 공지영

  • 글: 이나리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12-27 1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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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생각해요. 우리가 스무 살에서 과연 한치라도 변했을까. 예를 들어 사람을 보는 기준, 시대를 보는 기준 같은 것들이 깊어지고 넓어진 건 있겠지만 중심축은 하나도 안 변했어요.
    • 그러니 쓸밖에요. ‘후일담’은 없습니다. 모두 현재일 뿐.”
    공지영 “이제는 자만도, 자학도 하지 않는다”
    소설가공지영을 처음 만난 것은 11년 전 , 서울 삼선교 시장통 어귀에 있는 한 제과점에서였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주간지에 소설을 연재하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집이 그 근처라 했고,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을 온통 보낸 동네라 편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 제과점, 낡은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게 크고 하얗고 맛난 최신 스타일 빵이 즐비하던 그곳은 내게도 추억이 꽤 많은 장소였다.

    나는 스물다섯, 그녀는 서른하나. 여름도 겨울도 아니었던 그날, 마실 온 듯 가벼운 차림새로 나타난 그녀는 지쳐 보였다. 말랐고 어두웠고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내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새벽마다 검은색 타르 가득한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꿈을 꾸던 시절이었다.

    빵은 내가 골랐던 것 같다. 집게를 들고 신중히,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녀이니 오늘 빵 값은 그녀가 낼 거라 생각하면서. 먹고 싶은 게 많았지만 작가들은 원래 조금만 먹으니까, 정신적 허기라는 거, 나는 입으로 채우지만 그들은 맞서 싸우니까, 그런 사람들 앞에서 많이 먹는 건 아무래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

    하여튼 그렇게 그녀와 마주앉아 빵을 먹었고, 예상대로 그녀는 정말 조금밖에 먹지 않았고, 일 얘기도 진전될 만한 것이 별로 없어, 나와 그녀는 헤어졌다. 연재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11년. 나는 지금 2만7000원짜리 사과상자 하나를 껴들고 그녀가 사는 경기도 분당의 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다. 곧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날 알아볼 것이다.



    곱씹고, 되씹고, 또 후벼 파고

    “아, 안녕하세요!”

    스스럼없이 밝은 하이 톤의 목소리. 여전하구나. 여전히 예쁘고 키 훌쩍 크고 당당하구나. 그런데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다. 살이 붙었고 환해졌으며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 그녀를 보지 못한 제법 긴 세월, 아이를 더 낳고 글을 더 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서 그녀는 점점 더 좋아졌나 보다. 열심히, 아주 잘 살아왔나 보다.

    그녀는 최근 연작소설집 한 권을 펴냈다. ‘별들의 들판’(창비)이란 낭만적인 제목이다. 지지난해인가, 대학 교수인 남편, 세 아들과 함께 독일 베를린에서 살았던 1년간의 기억을 바탕 삼아 쓴 글이라 한다.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한겨레신문 문학전문기자인 최재봉씨는 관련 기사에서 ‘개인과 사회, 사적인 차원과 공적인 맥락이 섞여 있는, 이른바 386세대 작가의 대표주자로서 공지영 소설의 변치 않는 핵심을 이루는 양상’이 잘 투영된 작품이라 했다. ‘때로 대립할 수도 있는 그 두 지점을 한데 묶는 요소는 연민인 것처럼 보이’며 ‘공지영 소설의 강한 호소력과 파급력을 보장하는 그 연민’은 ‘버림받은 것들, 잃어버린 것들, 상처를 벗어나려고 안간힘 쓰는 것들, 용서하게 해달라고 울고 있는 것들, 울 시간은 많다면서 밥을 먹는 것들을’ 향해 있다고도 써놓았다.

    개인, 사회, 386, 연민, 용서, 상처, 밥. 여기에다 폭력, 희생, 절망, 사랑, 어쩔 수 없이 품는 작은 희망 같은 단어를 몇 개 더 보태면 공지영 문학의 큰 덩어리가 거친 형태로나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왠지 그것은 눈물 범벅이 된 소녀의 꼬질꼬질한 손에 들려 있는, 끈적한 꿀물이 조금씩 밖으로 배어나오는 중인, 고소하고 달콤하면서 쌉싸래한 뒷맛이 목구멍으로 넘긴 후에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을, 계핏가루 듬뿍 들어간 중국식 호떡만 같다.

    -야, 전망이 좋은데요. 28층이죠. 이렇게 높은 데서 자면 기분이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오, 제가 아파트 생활을 언제부터 했는데요. 전 완전히 아파트 키드예요. 이사 온 첫 날부터 잠 잘 잤어요.”

    -작품 속에 그런 게 자주 보이죠. ‘나는 부잣집 딸’이라는 자의식, 혹은 죄의식? 그게 문제적 상황일 수 있다는 걸 언제 자각했나요.

    “제가 3남매 중 막내거든요. 언니, 오빠는 공립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제가 학교 입학할 때쯤 살림이 좀 폈나봐요. 부모님께서 절 동네(서울 아현동) 사립초등학교로 진학시키셨어요. 아무래도 그런 게 좀 달랐겠고. 하지만 그보다 더 생생히 기억 나는 게 있어요.

    여섯 살 때쯤일 거예요. 전 유치원 대신 피아노학원에 다녔는데 그게 당시로선 아주 흔한 일은 아니었거든요. 어느 날 집 앞 담벼락에 기대 서서 손가락 장난을 치고 있었어요. 왜, 양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 움직이는 거 있잖아요. 그런데 한 동네 친구가 지나가며 이러는 거예요. ‘너 지금 피아노 친다고 잘난 체 하니?’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막 답답한 게, 무슨 변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하고. 하여튼 그런 상황이 평생을 이어져온 것 같아요.”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이네요.

    “그렇죠. 언제나 어떤 오해 같은 거, 오해 받고 있다는 생각. 난 나대로 자연스럽게 한 건데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겠구나….”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인가봐요.

    “그렇지 않아요. 저 원래 다른 사람 별로 신경 안 써요. 그런데 공격을 받으면 많이 억울해요. 하여튼 여섯 살 때 그 일이 제게는 운명적 사건만 같아요.”

    -그래서 말과 글 속에 ‘상처’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건가요.

    “그게, 어떤 사람의 말 한 마디, 눈빛 하나에도 전 평생 아프거든요. 예를 들어 학교 다닐 때도 선배들이 너 치마가 어떻다 저떻다 하면 그걸로도 깊이깊이 상처 입었어요. 그 사람 말을 곱씹고 되씹으며, 내가 뭘 또 잘못한 걸까. 예민한 데다 기억력은 좋으니까 그런 것들이 자꾸 증폭되는 것 같아요.”

    “마당극도, 판소리도 싫었다”

    -공지영씨 작품에 대해 ‘감상적’이라는 평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데요.

    “제가 감정 기복이 좀 심해요. 그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저 사랑 얘기 같은 거 보면서 안 울거든요. 사춘기 때 친구들이 ‘촛불 켜고 음악 듣자’ 그러면 속으로 ‘꼭 저래야 하나’ 생각하는 편이었고. 감상적이라는 게 감정과 이성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거라면 난 절대 아니다, 내 속에 다른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면이 있다는 걸 잘 아니까. 그래서 전엔 누가 감상적이라 그러면 ‘아니에요 저’ 하면서 손사래를 치곤 했죠.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받아요. 감상적이죠 뭐, 감성적이기도 하고.”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열넷, 열여덟살에 만나 엄마 스무 살 때 결혼한, 그런 분들이세요. 하지만 합리적이고 실용적이고요. 남들이 뭐라 해도 니가 올바로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늘 강조하셨어요.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전 성질 드러운 것까지 아버지랑 꼭 닮았대요. 예를 들면 무슨 일을 할 때 머리 나쁜 건 절대 못 참아주는 거라든가. 그래선지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았어요. 애교는 기본, 영특하기까지 한 데다(웃음) 서로를 너무 잘 이해했으니까.

    제가 ‘왜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분명한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은 우리집에서 몽땅 사라졌어요. 그런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처음 깨진 게 저 대학교 2학년 때인 1982년이에요. 형사가 처음 집을 다녀간 후 아버지가 ‘이제부터 밤 10시가 니 통금시간’이라 못박았죠. 그 전까지 전 부모님께 이래라 저래라 하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평생 처음 강제 조항이 생기니 뒤 돌아볼 것도 없이 싸웠죠.

    아버지한테 막 소리를 질렀어요. 왜 아무 합리적 이유 없이, 내가 정하지도 않은 규칙을 강요하느냐구요. 할 말이 없으니까 아버지는 궁여지책으로 ‘니가 아니라 세상을 못 믿어 그런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그랬죠. ‘좋다, 그렇다면 내게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뭐냐, 강간 같은 거냐. 그럼 해를 입을 위험에 처한 나를 감싸주지는 못할 망정 왜 족쇄를 채우느냐’. 이후로 그렇게 간혹 다툼을 벌이곤 했는데, 마지막 싸운 건 지난번 선거 때예요.”

    -대학시절 가장 큰 고민은 역시 ‘난 갈 데 없는 부르주아’라는 의식이었겠죠.

    “난 혜택을 참 많이 받고 자랐는데 그걸 어떻게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이렇게 세상에 정의로운 사람이 많은데, 사실 난 운동 같은 거 하기 싫은데 등 떠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 싫었어요. 저 마당극 싫어하거든요. 판소리도 싫어해요. 정제된 클래식 음악, 그런 걸 좋아해요. 획일적 운동권 문화가 무지 싫었고, 너는 도대체 치마가 뭐냐, 머리카락 좀 어떻게 해라, 그런 잔소리들도 말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괴로웠죠. 갈등도 많았어요.”

    “너 외모에 신경 좀 그만 쓸래?”

    -그런데 어떻게 노동운동까지 하게 됐을까요.

    “아휴, 저 운동 안 했어요. 그건 운동 축에도 못 끼어요. 한 달도 다 못 채운 걸. 어떻게 됐냐 하면, 대학교 졸업하면서 (사회활동의) ‘전망’을 세우잖아요. 전 최소한 전두환 정권에 도움 되는 일은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취업을 포기했어요. 마침 그때 만들어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전화 받을 사람이 필요하단 얘기를 듣고 그리 갔죠. 어찌 보면 집안 생계에 대한 부담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죠. 거기서 일하면서 채광석 형(1948~87, 시인·문학평론가)한테 무지 구박당했어요. 노동운동 안 한다고. 저말고 현준만(번역가), 위기철(작가), 김사인(시인), 김정환(시인) 같은 사람들도 야단 많이 맞았죠. 어쩌다 노동운동 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그렇게 극진히 잘 해주고. 자기도 노동운동 안 하면서 말이죠(웃음). 하여튼 우린 그 구박을 주눅들어가며 고스란히 받아냈어요. 그 땐 그래야 하는 줄 알았어요.

    공지영 “이제는 자만도, 자학도 하지 않는다”
    거기 있다가 작은 출판사 좀 다니다 다시 국문과 대학원에 들어갔죠. 1학기 끝날 때쯤 후배랑 술 마시며 ‘나 공부할 사람 아니지’ 하니까 맞대요. 그래서 그만두고 노동운동 조직에 들어갔어요. 그걸 거치지 않으면 (운동권) 사회에 발붙일 수 없다는 거, 어디 가서 ‘가오’ 잡을 수 없다는 걸 절감한 거지요. 한마디로 못 견뎌서 시작한 일이에요.”

    6개월간 교육을 받은 후 선배들의 지시로 현장 분위기 파악에 나섰다. 가서 보니 여공들 머리가 다 빠글빠글하기에 퍼머를 하고 갔더니 당장 한 여자 선배로부터 싸늘한 말이 돌아왔다.

    “너 외모에 신경 좀 그만 쓸래?”

    생김새와 관련해선 남들과 좀 다른 방향의 피해의식을 갖고 있던 그녀, 또 한번 상처를 받고 말았다. 어쨌거나 마침내 구로공단의 한 전기부품공장에 위장 취업을 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초라하기 짝이 없는 쪽방에 짐을 풀었다.

    “출근한 지 3일 만인가, 어떤 애가 ‘연극 본 적 있느냐’고 묻더라구요. 봤다 그러면 위장 취업인 거 들킬까봐 ‘없다’ 그랬죠. 그러니까 그애가 이러는 거예요. ‘언니는 꼭 연극 많이 보는 사람처럼 생겼어.’”

    입사하면서부터 빨리 ‘떡볶이 모임’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여공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친분도 쌓고 세(勢)도 넓히라는 지시였다. 어찌어찌 해서 몇몇이 모여 먹자골목의 한 분식집에 들어갔다. 이 집 만두 참 맛있다는 말을 들으며 한입 베어 문 순간, 그녀는 도무지 그놈의 만두를 삼킬 수가 없었다.

    “제가 뭐든지 정말 잘 먹거든요. 여자애들이 ‘어머, 난 이거 못 먹어, 저거 못 먹어’ 하는 거 정말 싫어하고. 그런데 만두 속에 뭐가 들었나 몰라. 몇 번을 삼키려고 해도 욱욱 토할 것만 같고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는 거예요. 다른 애들 접시는 다 비어가는데.”

    그녀가 취업하고 나서 열흘 후 새 여공이 들어왔다. 밝고 시원시원해 보이는 그이는 금세 다른 동료들과 친해졌다. 그녀는 조바심이 났다. 하는 모양새로 봐 분명 노선이 다른 조직에서 침투시킨 ‘학출(대학생 출신)’ 같은데 벌써 ‘떡볶이 모임’도 만드는 등 참 잘 해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 걔가 오더니 ‘나랑 술 한잔 할래’ 그러는 거예요. 드디어 노선 투쟁이 시작되는구나 싶어 결심을 단단히 했죠. 소주잔을 놓고 마주앉았는데 걔가 ‘63년생이구나. 82학번이지?’ 하고 묻는 거예요. 얼떨결에 대답했죠. ‘아니, 나 81이야.’ 제가 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갔거든요. 그리고 ‘62년생이면 너도 81이야?’ 하고 물었는데 얘가 대답을 안 해요. 그러다 헤어졌죠.”

    다음날 출근하니 사무실에서 그녀를 호출했다. 직원이 입사서류를 내던지며 말했다. “너 위장 취업한 거 다 알아.” 그 ‘62년생’이 프락치였던 것이다.

    “분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오기가 생겼죠. 그렇게 회사에서 쫓겨나 어느 날 세미나방에 앉아 있는데 여자후배 하나가 몰래 소주 한잔 하자는 거예요. 거기선 술 먹으면 안 되거든요. 좋다고 따라 나갔더니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면서 하는 말이, 글쎄 어떤 멍청한 인간이 ‘나 81이야’ 해서 회사에서 잘렸다는 거예요. 제가 그랬죠. 걔가 나야.”

    그때가 87년이었다. 다음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구로구청에서 대통령선거 부정투표함 사건이 발생했다. 현장에 있던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연행됐다. 구치소에서 열흘 남짓을 보낸 후 그는 노동운동가의 길을 버리고 소설가의 삶을 택했다.

    “情 주체 못해 비틀거린 인생인데”

    -두렵고 힘들었나요.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커피를 못 마시는 것도, 목욕을 못 하는 것도, 부실한 식사도 아니었어요. 바로 철창이었지요. 그 열흘간 몸무게가 7킬로그램이나 빠지도록 자신과 처절하게 대면하면서 깨달았어요. 만일 내가 언젠가 미치거나 죽게 된다면 그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음을. 그건 글을 쓰는 일이었어요.

    노동운동은 애초부터 나랑 맞지 않았어요. 현장 들어가기 전 글 쓰기를 포기한다는 서약까지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한번 버려봤기 때문에 문학을 다시 가져올 수 있었어요. 버렸다 다시 선택하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드는지를, 다시 못 버릴 거란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집안에서 알음알음으로 힘을 써 구치소를 나온 후 그는 스스로를 창살 없는 아파트에 유폐시켰다. 전화 코드를 빼놓고 소설을 썼다. 그리고 88년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가가 됐다.

    -책을 보면 ‘어떤 친구가 뭐라고 말했다’는 식의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요. 친구들에게 많이 기대는 편인가요.

    “많이 얘기하고, 의지하고, 조언도 구해요. 친구가 넘치는 타입은 아닌데, 살다 보니 쌓이고 쌓여 이젠 수가 제법 되지요. 그중 반 이상이 남자고.

    남들 말이, ‘차갑다’는 게 제 트레이드 마크라잖아요. 그런데 틀렸어요. 제가 얼마나 정이 많은데요. 그놈의 정을 주체 못해 비틀비틀 살아온 인생이라구요. 물론 운동권 얘기 주로 쓰던 시절엔 딱딱하고 냉정하고 논리적인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죠. 약한 모습을 감추고 싶었거든요. 실은 ‘난 왜 이렇게 정이 많게 태어난 걸까, 하늘이 원망스럽다’ 하는 편이 제 본모습이에요.”

    -‘여우과’ 아닌가요.

    “곰에 가깝죠. 사람들이 그걸 잘 몰라요. 초등학교 1학년 땐데, 첫날 첫 수업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저더러 임시 반장을 하라고 그러셨어요. 그 학교가 사립이라 입학 전 면담이 있었거든요. 어머니 말씀을 들으니 그때 제법 똑똑한 애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선생님들 사이에 돌았다나봐요.”

    -그런 친구, 좀 재수없어 뵈죠.

    “글쎄 말이에요. 그런 상황이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됐어요. 한마디로 질투의 대상이죠. 나중에는 도둑으로 몰리기도 하고 별 모함을 다 당했어요. 늘 ‘쟤는 못됐어’란 말. 그런 상황에 대해 ‘내가 우리 반 59명을 왕따시켰다’고 표현한 적도 있는데, 우연히 만난 여고 동창으로부터 ‘우리 반 59명을 다 왕따시킨 애’란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사실은 제가 왕따당한 거잖아요.

    어쨌든 학창시절엔 굉장히 괴로워서, 특히 고3 때는 아예 입을 꼭 닫고 살았어요. 애들이 미워하니 제 쪽에서 오히려 더 냉정하게, 더 못되게 군 거지요. 그런 기조가 계속됐어요. 사람들은 지금도 ‘이혼을 두 번이나 한 여자니 지 맘대로겠지’ 하는 식으로 편하게 생각해버리지만.”

    너무너무, 절대로, 다시는

    -남을 왕따시킨다, 그게 공지영씨의 생존 방식인가요.

    “도도한 척 무시하는 거, 안중에 없다는 듯 행동하는 거, 속은 만신창이가 다 됐으면서도 고개 빳빳이 쳐드는 거. 전 어린 시절, 젊은 날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30대 때도 싫어. 언젠가 누가 전생을 본다는 정신과 의사에게 가보지 않겠냐고 하길래 그랬죠. 미쳤냐, 이승도 기억하기 싫은데 전생은 무슨.”

    -도덕적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스타일인가요.

    “그런 거 있어요. 늘 옳아야 한다, 깨끗해야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재작년까지만 해도 그 많은 남자친구 중 누구와도 단둘이 술 마신 적이 없으니까. 사람들 눈 때문이 아니라 술 마시고 혹 무슨 일이라도 날까봐. 지금은 달리 생각하죠. 그게 더 불순한 거라고.”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이란 책을 보면 가톨릭 신앙인이었다 종교를 버렸고, 4,5년 전에야 비로소 다시 하느님께 귀의한 걸로 돼 있는데요.

    “신앙을 버린 건 제 어떤 면을 보여주는 상징이에요. 대학 들어가면 처음에 유물론을 공부하잖아요. 그 기본이 물질이 있은 후 정신도 있다는 거고. 하지만 가톨릭은 전체가 유심론이잖아요. 둘을 다 가져가진 못하겠고 하나를 택해야겠더라고요. 그렇게 선택한 후에는 다짐했죠. ‘절대로 돌아가선 안 돼!’ 근데, 제 말 중에 ‘절대로’란 단어가 참 많이 나오죠(웃음).”

    11년 전 달리는 차들마저 ‘우울해 우울해’ 염불을 외는 것 같던 그때는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그녀는 참 잘 웃는 여자다. 다른 감정 표현도 그렇게 모두 화사하다. ‘너무너무’ 절망했고 ‘절대로’ 맹세했으며 ‘다시는’ 않기로 했고 ‘굉장히’ 행복했던 순간들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런 수식어들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녀는 정말 열렬히 자신을 후벼 파며, 지치도록 곱씹으며 살아온 모양이다.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없는 일 앞에선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사람일 거라고, 분명 그럴 것이라 내 멋대로 생각해버린다.

    -전 ‘종교적 인간’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신성(神聖)에 심장을 빼앗길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거죠. 종교적 인간인가요.

    “그래요. 그 배경이, 난 어려서부터 똑똑하단 말 듣고 온갖 상 다 받고, 그런데 왜 내 인생은 행복하지 못하고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는 걸까. 다 갖췄는데, 아무 문제 없는데. 그 답을 알고 싶어 절에도 가고 성당에도 가보고 심지어 사주도 배워봤어요.”

    -종교적 인간이냐 아니냐는 종교라는 것의 궁극적 씨앗, 그러니까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최후최초의 신비를 ‘그냥’ 믿어버리는 거잖아요. 그게 되던가요.

    “네. 저 비합리적인 거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건 믿어져요. 도달하지 못한 것과 없는 것은 다르잖아요.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없다고 단정할 순 없는 거지요. 두 번째 이혼 하고 몹시 힘들던 시절 정신분석학 공부를 했어요. 아마 그때 신의 존재를 발견한 것 같아요. 인간의 정신적 문제는 대부분 유아기의 훈육에 따라 결정되잖아요. 인간 프로그래밍 자체가 선과 사랑에 좌우되도록 돼 있는 거지요. 성서 이야기랑 같아요.”

    “이제 그만 하라니, 지들이 뭔데”

    -용의주도한 편인가요.

    “전 지금껏 전략 없이 살았어요. 그러는 게 싫어 이전에는 변하려 애쓰고 사람들한테 자꾸 엎어지지 않으려고 노력도 했지요. 친구 하나가 그러더라구요. 넌 축구로 치면 수비수 없는 축구단이라고. 무슨 소리냐 하면, 기라성 같은 공격수만 있지 나쁠 때를 대비한 수비수는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나쁜 때라는 걸 아예 상정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내가 남을 안 속이니 남도 그러려니 다 믿고. 돈 사기는 크게 당한 적 없지만 관계의 사기는 많이 당했죠. 하지만 지금은 그래요. 그냥 이렇게 살래!”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죠. 이번에 상재한 ‘별들의 들판’도 이전 작품들처럼 여전히 80년대의 그림자, 그 가치와 절망을 되씹고 있는 듯한데요. 왜 ‘아직도 이 주제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요.

    “전 생각해요. 우리가 스무 살에서 과연 한치라도 변했을까. 예를 들어 사람을 보는 기준, 시대를 보는 기준이 하나라도 변한 게 있을까. 변한 거는 더 이상 완행열차는 못 탄다는 거, 화장실 안 딸린 방에서는 잠 못 잔다는 거. 깊어지고 넓어지는 건 있겠지만 중심축은 하나도 안 변했다는 거죠. 이상향에 대한 생각, 인간에 대한 예의. 그러니 쓰는 거예요. 이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오늘의 삶인 거죠.”

    -‘후일담 문학’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끝난 얘기라니, 광주항쟁만 해도 겨우 24년 전 일인데 그게 무슨 옛날이라고. 베트남전도 홀로코스트도 여전히 수많은 문학과 영화의 소재가 되고 있잖아요. 생각해보세요. 80년대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시대적 아픔으로 인해 자신의 진로를 어그러뜨리고 깊이깊이 고통 받았나요. 그런데 언론이고 어디고 나서서들 이젠 좀 그만 하라니. 전 오기가 나서라도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오히려 전의가 불타 오른다니까요.”

    -그냥 그만 하라는 게 아니라 어떤 ‘승화’가 필요한 시점이란 의미도 있겠지요.

    “분명 그런 변화는 제 작품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어요. 이전의 이분법적 선악 구분이나 낙관론은 사라지고 없죠. 대신 모든 것은 끝없이 연결돼 있다는 걸, 어제가 없는 오늘은 없고 내일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결혼, 그 불구덩이 속으로 세 번씩이나

    -그런데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결혼이라는 거에 그렇게 진저리를 치고 또 두 번이나 아픔을 겪었으면서 왜 자꾸 그 불구덩이로 다시 들어가는 거죠?

    “저 그거 지난 겨울에야 분석 끝냈어요. 첫째는 제가 보수적이라 그래요(웃음). 사랑하면, 같이 잘 거면 결혼해야 한다는 거죠. 둘째, 제 자신을 믿은 거죠. 마음 깊은 곳에 확신이 있었어요. 노력하면 결국 다 잘 되더라. 저 뭐든 집중해서 굉장히 열심히 하는 편이거든요. 그러니 결혼이라고 열심히 하면 왜 안 되겠나. 셋째는 제 행복의 표상 속에 행복한 가정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행복하게 사는 게 제 목표인데 그건 행복한 가정 없이는 달성 안 되니까. 넷째야 뭐 감언이설이죠(웃음). 온갖 미사여구에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제가 사람을 잘 믿잖아요. 물론 저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은 하지요. 그래서 확실하다 싶어 한 건데 나중에 보면 아니더라구요.”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실패를 경험했을까요.

    “왜, 아까 말했잖아요. 수비를 잘 못 한다고. 갈등이 생기면 요령 있게 풀지 못하고 그냥 솔직히 말하는 편이에요. 시댁에 가기 싫다, 뭐 그럼 그렇게 그냥 말하고. 그러면서 최선을 다한 거죠. 정말 최선을 다했다니까요.

    근데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아요. 아까 말했죠. 제 행복의 표상 속에 행복한 가정이 있다고. 그건 다시 말해 가정말고도 다른 행복의 조건들이 있었다는 거거든요. 가정은 제 ‘행복 프로젝트’의 일부분이고, 그러니까 뭐든 그 안에서 탁탁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자꾸 어그러지는 거예요. 그럼 전 가정에 끝까지 매달리는 게 아니라 정리를 해버려요. 다른 행복의 조건들에 방해가 될까봐.

    신랄하게 얘기하자면, 굉장히 오만한 거죠. 결혼을 통해 인생 전체를 통찰하며 함께 살 길을 찾는 게 아니라 내 프로젝트 속에 좋은 남자가 들어와야 한다, 내 그림에 꼭 들어맞아야 한다는 거니까. 그러니 내가 아무리 잘해주고 최선을 다한들 그걸 느낀 남자는 뭔가 불편하지 않았겠어요.”

    공지영 “이제는 자만도, 자학도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자학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전에는 달랐어요. 난 아니라고 우겼죠. 욕심 없다, 완벽한 거 따위 바란 적 없다…. 그렇게 억울하다며 수도 없이 말했지만 사실은 내 잘못도 있었던 거예요. 물론 ‘선택의 잘못’도 큰 몫을 했겠죠. 갈등의 강도가 좀 약했으면 그냥 살았을 테니까.”

    -안톤 체호프의 소설 ‘귀여운 여인’ 있지요. 사랑을 쏟을 대상 없인 살 수 없는 여자, 늘 상처받으면서도 결국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여자.

    “아, 나 그 책 읽으면서 무지 찔렸어 정말….”

    -‘공주과’란 얘기 안 듣나요? 글을 읽다 보면 ‘이건 공주병이 아니다, 원단 공주다’ 하는 느낌이 드는데.

    “그게, 전 정말 제가 ‘삼월이과’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얘기들을 하니까. 세상에 자기 연민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어쨌든 이젠 좋다, 그게 뭐 내 개성인가보지 하게 됐어요. 친구들한테도 ‘니들 오늘 내 공주심(公主心) 3번밖에 충족 못시켰어’ 그런 농담도 하고. 그런데, 왜 내가 공주예요?”

    외로운 공주, 외로운 삼월이

    -응석을 부리잖아요. 가짜 공주들은 자기 아픈 거 그렇게 솔직하게, 순진하게 말 못해요. 자신에게 감동하고 자기로 인해 슬퍼지는 에고이스트 같은 면모. 책에서 자꾸 그런 게 발견되니 뭐랄까, ‘됐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 그러고 싶은 기분.

    “그럼 안 보면 되잖아요. 취향이 아니면 안 보면 되는데. 내 속에 삼월이가 있는데.

    아닌게아니라 95년쯤 유명세를 타면서 삼월이가 강제로 퍼스트레이디가 된 것 같아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고민하다 문단을 멀리하기 시작했죠. 지난 2월쯤에야 ‘사교계’에 다시 발을 들여놓으며, 이제는 한술 더 뜨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어요. 옛날에는 ‘아니에요, 저 공주 아니에요’ 이러느라 볼장 다 봤는데, 지금은 ‘맘대로들 생각하세요…’”

    -소설가의 생명이 뭔가요.

    “전 소설 읽을 때 서사나 문장 같은 거에 별로 신경 안 써요. 그보다는 이 작품이 내 인식의 지평, 감성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그런 게 중요하지요. 또 하나는 캐릭터. 이야기가 있고 캐릭터가 살아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꽤 독한 비평에 시달린 적도 있지요.

    “여성운동, 학생운동을 핫도그처럼 판다는 평도 받아봤어요. 그땐 정말 머릿속에 전쟁이 나 폐허가 될 지경이었어요. 그 평론가에게 전화해 ‘내가 소설 써서 책상 속에 안 넣어놓고 시장에 내놔 미안하다, 그런데 핫도그는 어감이 너무 안 좋으니 햄버거로 바꿔달라’고 할 뻔했어요. 그리고 한겨레신문 1면에 저랑 최영미 시인이랑 얼굴 사진 대문짝만하게 넣은 광고가 실렸을 때. 선배 문인들이 ‘미모 내세워 책 팔아먹냐’고 비아냥대고. 용서할 수가 없었죠.”

    -문장이 안 된다, 그런 비평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저도 ‘별들의 들판’을 읽으며 그런가 싶은 구절을 몇 개 찾아보기도 했는데.(웃음)

    “문장이 꼭 그렇게 유려해야 하나요. 그냥 말이 멋있는 것보다는 차마 책장을 다 못 넘기고 한동안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게 하는, 뭐 그런게 더 중요한 거 아닌가…. 물론 미문과 통찰력이 결합돼 있으면 가장 좋겠죠. 하지만 김승옥의 ‘무진기행’ 같은 소설을 보세요. 화려한 문장은 하나도 없는데 구절구절 가슴을 치잖아요.”

    -대중과 눈높이가 비슷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쓰면서 제가 제일 고민한 게, 주인공 혜완이 남자친구 선우와 다투면서 그 와중에도 그의 흰 양말을 빨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부분 같은 거였어요. 그때가 93년이거든요. 당시에 운동 소설은 그러면 안 됐어요. 그런 충동 자체가 없어야 했다구요. 하지만 안 쓸 수 없었죠. 전 그것 때문에 욕 많이 먹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솔직해서 좋았다는 평이 많았어요. 전 그런 게 제가 지닌 대중성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랬어, 이렇게 느꼈어, 끝”

    -경험에 바탕한 소설을 많이 쓰는 듯해요. 어디 여행 갔다 오거나 하면 꼭 그와 관련한 작품이 나오는 것도 같고. 누군가 그걸 두고 ‘소설을 살고 있다’ ‘인생파 소설이다’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던데요.

    “제가 거짓말을 너무 잘하나 보지요(웃음). 물론 경험을 많이 참고해요. 가 보지 않은 곳에 대한 얘기를 막 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스토리들이 모두 자전적 이야기일 수야 물론 없죠. 제가 글 쓰는 스타일이 그런가봐요. 전 주인공 입장에 충분히 공감하지 않으면 소설을 못 쓰거든요.

    전 좀 통속적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소설이 좋아요. 그래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싫어하죠. 머리로 쓴 거라서.”

    -이건 꼭 공지영이 할 것 같은 말이다, 그런 게 주인공 입을 통해 나오는 경우도 많잖아요.

    “아,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게 좋다 나쁘다 하는 평가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 봐요.”

    -제 주변의 이른바 ‘지식인’이란 사람들에게 요즘 공지영씨 작품 읽은 게 있는지 물어봤어요. 없다더군요. 하지만 ‘별들의 들판’은 지금 분명 잘 팔려나가고 있거든요. 서점 직원에게 들으니 20대, 30대 여성독자가 많대요. 뭐, 그거야 다른 책들도 다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이제는 완전히 대중작가로 자리잡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인기 작가란 말이 통속 작가고 싸구려 작가라는 말처럼 들려 불편하던 때도 있었어요. 지금은 ‘대중적’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있죠.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포르노예요. 혁명 또한 지극히 대중적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내 위치는 포르노와 혁명 그 사이 어디쯤이 되겠구나, 되도록이면 혁명 가까운 쪽에 서고 싶다, 그게 제 생각이에요.

    감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 건드리는 게 포르노죠. 혁명은 몸과 마음을 다 터뜨리는 거예요. ‘혁명적’이란 건 몸과 마음에 다 불편과 고통을 주는 거고. 그 대가로 인간은 성장하게 되죠. 이번 책에 대해서도 ‘불편하다’는 소감을 밝혀온 독자들이 있어요. 광주항쟁에 관한 단편을 읽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 물었다는 분도 있구요.

    그렇게, 막 달려가던 누군가에게 멈춰 서서 담배도 한 대 피우고 아프게 반성하고 철학적 질문도 던져볼 수 있게 하는 거, 그게 대중소설이든 뭐든 좋은 문학 작품이 할 일이겠죠. 하지만 가르치려 들어서는 안 돼요. 나는 이랬어, 이렇게 느꼈어, 끝. 딱 요기까지만이어야죠.”

    세월은 그녀에게 좋은 일을 했다

    그렇다, 딱 요기까지다. 요기까지 오는 데 4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그녀의 열한 살 난 둘째, 유치원생인 막내아들이 서재를 들락거리며 엄마를 찾았다. 창 밖에는 어둠이 깔렸고 에쎄 라이트 두 갑이 날아갔다.

    “이제는 자만도 하지 않고 자학도 하지 않아요. 이전에는 누가 ‘베스트셀러 작가 공지영’ 하면 말할 수 없이 불편하고 그랬거든요. 유명세랄까 그런 걸 솔직히 긍정하지 못했어요. 근데 지금은 편해요. 누가 물으면, 최고는 아니지만 꽤 괜찮은 소설가라고 생각해요, 그렇게는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니 관자놀이에 묵직하니 고여 있던 지난 밤 폭음의 찌꺼기가 비로소 출렁 머리를 친다. 다시 11년 전 그날처럼 몹시 피곤하고 우울해진 나는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를 본다. 다시 봐도 그녀는 환하다. 여유롭고 건강해 뵌다. 세월은 그녀에게 좋은 일을 했다. 과거로 돌아가는 짓 따위, 그녀는 이제 필요치 않다.

    올 때처럼 살가운 배웅을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탄다. 출구를 못 찾아 한참 헤맨 끝에 낯선 분당 밤거리로 나선다. 그 제과점, 아직 거기 있을까. 배는 고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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