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에게는 여섯 개의 이름이 있었다. 직접 쓴 연보는 거짓으로 가득했다.
- 사람들이 자신의 명성을 기억할수록, 대중이 자신의 소설에 열광할수록,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부모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부인하려 애썼다. 마지막 순간까지 ‘허구의 정체성’에 집착하며 ‘일본적인 것’을 좇던 굴절된 삶, 그 삶에 배어 있는 역사의 비극.
일본 최대의 발행부수(하루 1000만부)를 자랑하는 ‘요미우리신문’, 그 대(大)신문에 1968년과 1980년 두 차례나 연재소설을 쓴 작가 다치하라 세이슈(立原正秋). 그는 김윤규(金胤奎)라는 이름의 한국인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길 꺼렸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11세 때 일본에 건너가, 뒤늦게 익히고 배운 일본말로 일본사람보다 더 일본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대문호가 됐다. 먼 훗날, 그의 중세 일본어 구사력과 그에 대한 식견은 일본의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한 경지로 평가받는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적인 미학을 추구한 작가.
그의 모순은 이름을 여섯 번이나 바꾼 데서도 드러난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김윤규, 일본에서 아주 짧은 기간 썼던 노무라 신타로(野村震太郞), 본명 김윤규를 일본식으로 읽은 긴잉케이, 이른바 ‘창씨개명’ 바람이 거셀 때 만들어 쓰기 시작한 가나이 세이슈(金井正秋), 일본 여자와 결혼해 아내의 호적에 입적해 쓰기 시작한 요네모토 세이슈(米本正秋), 그리고 작가로서 필명으로 쓰다가 마침내 죽기 두 달 전 숙원대로 호적에 올린 다치하라 세이슈.
여섯 개의 이름으로 살다 간 허구투성이 인생.
내가 다치하라 마사키(세이슈의 다른 독음)라는 인물에 관해 처음 듣게 된 것은 10여 년 전 여류작가 박기원씨, 청산출판사를 경영하는 권도홍씨(전 ‘주부생활’ 사장)와의 대화에서였다.
‘일본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순수문학상 아쿠타가와(芥川)상의 후보로 최종심까지 두 번이나 오르고, 결국 대중문학상인 나오키(直木)상을 받은 인물’ ‘일본의 고전을 파고들어 아름다운 고대 중세 일어를 곤충채집하듯 메모하고 기억해 작품에 살려나간 작가’ ‘식민지 출신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거짓 이력서와 연보를 써서 인생 전체를 픽션으로 만들어버린, 소설 주인공을 능가하는 소설가’….
펜을 든 역도산
‘펜을 든 역도산’이라고나 할까. 역도산도 식민지 출신이라는 사실이 껄끄럽고 출세에 장애가 된다 하여 핏줄과 과거를 부정한 인물이다. 그런 행동에 대해 ‘비겁하고 더러운 친일분자’라고 팔매질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굴절되고 철저하게 꾸며진 그의 삶에 배인 비극을 캐보고 싶었다.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다치하라의 가면을 벗기고 그 까닭을 파헤쳐보고 싶었다.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씨를 만나는 기회가 있어 그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씨는 다치하라 마사키가 그토록 염원하던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가다.
“내가 문학지 ‘군상(群像)’이 주는 신인상을 받을 때 그분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선핏줄이라는 말은 안 했지만, ‘반가운 소식을 듣고 보니 집에 한번 초대하고 싶다’고 썼더군요. 그분은 벌써 유명한 대작가였고 나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데다, 와세다대 선배이므로 내가 미리 약속시간을 받아두고 가와고에(川越)에 있는 그분 집으로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유카타(일본의 헐렁한 겉옷) 차림으로 길가까지 마중을 나왔어요.
완전히 한국식 요리에 초장까지 차려놓은 식탁이었습니다. 쇠고기도 유명한 마쓰자카(松坂) 쇠고기로 요리한 불고기도 나왔습니다. 그분한테서 가족 같은, 피를 나눈 형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옛 식민지 시절 특고(特高)경찰(독립운동가를 비롯해 정치범이나 사상범을 전담하던 경찰)이 한국인을 잡으려면 그 집 제사 때 잠복하면 된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한국인은 숨어 있다가도 제사에는 반드시 참석하니까요. 그만큼 핏줄의식이 강하다는 거지요. 다치하라씨에게도 그런 의식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다치하라는 이회성에게 말했다.
“당신의 글 속에 ‘8월은 조선인에게 울고 웃는 달(희비가 엇갈리는 달)이다’라는 대목이 있지. 그 구절이 마음에 들었어.”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동시에 분단의 비극이 시작된 8월. 다치하라는 그렇게 말할 뿐이었지만, 이회성은 그날의 한마디를 가슴 저리게 기억하고 있다. 다치하라는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김달수(작가)와 허남기(시인)는 곧은 직선으로 (정면돌파하듯) 갔지만, 난 빙 돌아서 에둘러 갈 수밖에 없었어.”
김달수와 허남기는 당대 일본이 알아주던 재일 한국인 작가와 시인. 그들은 한국어로 작품을 쓰고 재일 한국인 문제를 정면에서 다뤘다. 하지만 다치하라 본인은 그럴 수 없었다는 고백이다. 일본어로 글을 쓰고, 내용도 일본적인 에로티시즘과 엔터테인먼트로 일관해야 했던 콤플렉스를 그렇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끊어진 감정의 끈
김윤규는 1926년 경북 안동군 서후면 태장동에서 태어났다. 마을 가까이에 ‘천등산 박달재…’로 시작하는 노래로 유명한 천등산(天燈山)이 있고 봉정사(鳳停寺)라는 절이 있었다. 아버지 김경문은 봉정사의 승려였다. 김경문과 어머니 권음전 사이에서 김윤규가 생겼다.
대처(帶妻)승을 받아들이는 절이 아닌 봉정사에서 어떻게 승려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는지는 미스터리다. 윤규 아래로 완규도 낳았으므로 김경문의 결혼이 비밀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경문은 사실 권음전과 결혼하기 전에 전처와의 사이에 규태라는 아들도 낳았다. 아무튼 윤규의 태생부터가 복잡하고 기이하다. 태생의 모순은 그가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이어진다.
어린 윤규는 아버지를 따라 봉정사에 드나들면서 글을 익히고 선사에게 사서오경을 배웠다. 이것이 원체험으로 자리잡아 훗날 그가 간소하고도 고고한 미적 감각을 글로 표현하는 바탕이 된다. 그는 그 시절에 대해 “봄이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여름이면 시냇물에 참외를 담가먹던 고향이 그립다”고 회상할 정도로 고향의 추억을 곱게 간직하고 있었다.
193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는 윤규와 동생 완규를 데리고 고향 안동을 등진다.
1935년 봄, 어머니는 동생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난다. 다치하라의 소설에서 어머니는 ‘속된 여자’ ‘복잡한 여자’로 묘사된다. 아버지가 죽은 뒤 곧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를 낳았지만 그 남자와 재혼한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 권음전의 일본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아이를 데리고 언니의 연고지인 교토와 오사카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렸다. 오사카에서는 메리야스 공장의 공원 노릇도 했다. 하지만 정말로 쥐꼬리만한 월급이어서 어린 동생 완규는 소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유리공장에서 심부름을 하며 밥을 벌어야 했다.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권음전은 가나가와현 요코스카(橫須賀)시에 정착해 노무라 다쓰조(본명 王命允)라는 고철수집업자와 재혼해 노무라 오토코(野村音子)가 된다.
어머니가 일본으로 가버릴 때 윤규는 의사이던 외삼촌 권태성씨에게 맡겨졌다. 이때부터 외삼촌 집에서 구미소학교에 다니게 됐다. 이때 같은 학교 상급반에는 박정희가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태 뒤인 1937년, 윤규는 일본의 요코스카에서 어머니와 재회한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기까지 열 살 전후의 윤규는 굶주리고 시린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구미에서 보낸 고독하고 고단한 2년8개월은 ‘겨울의 추억’이라는 작품에 녹아 있다.
‘저 바람마저 어는 듯한 겨울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초조하고 불안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사는 게 괴롭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던가.’
외삼촌 권태성이 제주도의 병원으로 부임해 간 뒤, 텅 빈 병원에 홀로 남은 윤규의 생활은 ‘겨울의 추억’에 나오는 시게유키 소년의 생활로 치환되어 묘사된다.
보리밥과 짜고 맛없는 김치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저녁식사용으로 빵을 사다가 알코올 램프로 삶은 달걀과 같이 먹고 자곤 했지만,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없어 소년은 야위어 간다. 겨울이 오는데 난로는 고장나고, 연탄불을 때는 것도 귀찮은 밤에는 싸늘한 침대에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자야만 한다. 38。가 넘는 고열의 감기에 걸려도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소년은 아스피린으로 잠을 청할 수밖에 없다.
이 무렵 어머니 권음전과도 서먹한 관계가 된다. 고독과 궁핍에 맞선 처절한 투쟁으로 그만 혈육이 미워진 것이가다. 작품 ‘겨울의 추억’에 그 실마리가 적혀 있다.
다치하라 세이슈가 중고등학교 시절 살던 요코스카항의 기누가사에 있는 절 만쇼지. 그는 이 절에 친구들과 놀러다녔다고 한다.
허구로 점철된 자필연보
그가 직접 쓴 작가 연보(年譜)는 거짓투성이다. 고단샤(講談社)에서 발간한 현대장편문학전집 제49권에 나오는 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27년 1월6일 조선 경북 대구시 어머니의 생가 나가노(永野)가에서 출생. 호적상의 신고는 1926년 1월6일. 아버지는 가나이 게이분(金井慶文), 어머니는 오토코(音子). 부모 모두 한일 혼혈이며, 아버지는 조선 말기 귀족 이(李)가에서 출생해 가나이가에 양자로 가서 처음에는 군인, 나중에 승려가 되었다. 아버지는 안동시 교외에 있는 봉선사(봉정사가 아니다)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집은 절의 기슭에 있고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산에서 내려왔다.’
귀족의 핏줄이라는 것도, 부모 이름도, 다 지어낸 허구였다.
자필 픽션은 계속된다.
‘1931년 무렵부터 절에 올라가 노사(老師)에게서 한문을 배우게 된다. 일주일에 사흘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노사의 방에서 묵으며 행각승(行脚僧)들과 함께 생활했다. 굴절된 그후의 생활에서 이 승당의 기억이 가장 선명하다. 이해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이듬해 1932년 봄 서둘러 안동시내로 이사 간다. 1933년 안동국민학교에 입학, 혼혈이라는 급우들의 놀림을 견딜 수 없어 반년 만에 안동보통학교로 전학. 보통학교는 조선인 아이를 위한 학교였다. 1935년 봄 어머니가 동생 세이토쿠(正德)를 데리고 고베(神戶)시 노무라(野村)가로 재혼해서 떠났다. 나는 대구 북쪽의 구미에서 병원을 연 외삼촌 나가노 데쓰오 집에 맡겨진다.
1937년 겨울, 외삼촌이 제주도립병원으로 부임할 때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있는 이모의 시댁인 오나카(大中)가에 맡겨져 요코스카 시립 기누가사(衣笠)심상고등소학교(尋常高等小學校)로 전학. 이 학교의 한 학년 아래에 현재의 아내인 요네모토 미쓰요가 있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참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어지럽다.
절에서 공부한 사실, 아버지의 사망, 어머니의 개가와 일본행, 외삼촌집에서 더부살이, 요코스카에 사는 어머니와 합류, 그리고 나중에 아내가 된 미쓰요와의 만남 같은 뼈대만 사실일 뿐 온통 꾸며낸 소설 같은 이야기가 연보를 이루고 있다.
그의 ‘소설 연보’는 더욱 드라마틱하게 이어진다.
‘요코스카 중학교에 합격했지만, 3월말에 네 살 연상인 소년의 놀림을 받고 단도로 상대방의 가슴을 찔러 입학을 취소당한다. 6월에 요코스카 시립 상업학교에 편입한다. 이해부터 검술을 익힌다. 검술의 스승은 기무라 7단. 스승은 ‘유단자가 되면 앞으로 귀찮아진다’고 말하며 승단시합에 내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1942년 봄 3단인 두 사람과 세 판을 겨뤄 6전 전승을 기록한다.’
이 모두가 거짓말이다.
윤규는 단도로 사람을 찌를 만큼 대담하지 못했다. 소심한 소년이었다.
그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기 전 요코스카 중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진다. 요코스카 중학교는 전형과정에서 성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출신인지, 부모의 직업과 가정환경이 어떤지를 따지는 까다로운 ‘명문’이었다. 그런 학교에 낙방한 데 대한 분노, 멸시와 차별로 맺힌 응어리가 그를 ‘단도로 상대방을 찌르는’ 식의 날조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필시 출생 때문에 앞길이 막히고 말았다는 좌절감이 극적으로 꾸며진 이력서에 스며 있을 것이다.
다치하라 마사키를 좋아하고 존경하던 다카이 유이치(高井有一)라는 작가가 있다. 1932년 도쿄 태생인 그는 와세다대 영문과를 나와 교도(共同)통신사에 입사해 문화부 기자가 된다. 기자 시절 문인들과 어울리며 ‘코뿔소’라는 동인지 창간에 참여, 다치하라와 연을 맺는다.
그는 다치하라의 문학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치하라가 후보에 올랐을 뿐 끝내 받지 못한 아쿠타가와상을 받는다. 1980년 8월 다치하라가 죽자 다카이는 6년여에 걸쳐 다치하라의 허구적인 삶을 파헤친 평전을 썼다. 이 평전은 마이니치 예술상을 받을 정도로 명저였다.
동료 작가 다카이 유이치가 쓴 다치하라 세이슈의 평전. 그의 삶을 낱낱이 들여다본 명저다.
우선 다카이는 다치하라의 동생 완규를 찾아내 만났다. 완규는 가나이 세이토쿠(正德)가 되어 요코스카와 가까운 구리하마(久里濱)에서 금융업 가나이 상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형님은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의연한(?) 사람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려서부터 장사를 멸시하고 글 쓰는 걸 고상하게 여겼어요. 더럽게 돈을 벌기보다는 죽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형님은 나중에 장성해서도 내가 구리하마에 사는 것을 못마땅해했지요. 문인들이 사는 고급 동네인 가마쿠라나 즈시 같은 데로 이사하라고 말입니다.”
열한 살이 되어 엄마와 재회한 소년 윤규는 반항적이 되어 있었다. 홀로 떨어져 지낸 2년간의 고독과 고통이 응어리진 앙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윤규는 물자가 귀하던 그 시절, 다른 아이들이 흔히 입던 헌 천조각을 덧대 기운 옷을 거부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억척같이 일하고 동생은 소학생으로 신문배달까지 했지만 윤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윤규네 가족은 요코스카의 기누가사(衣笠)역 북쪽에 살았다. 구리하마나 기누가사 일대는 도쿄에서 한참 떨어진, 소득수준이 처지는 노무자 동네였다. 해안가 항구라 조선에서 건너온 부두 노동자나 도로, 철도 노동자 가족도 느는 중이었다.
윤규는 열두 살 때인 1938년 1월 기누가사 고등소학교 5학년에 전입학했다. 학교에서의 이름은 의붓아버지의 성을 딴 노무라 신타로. 아이들은 그를 ‘신(震)짱’이라고 불렀다. 윤규는 점차 일본어를 익혀 일상 생활하는 데는 어려움은 없었으나 촌스러운 발음이었다.
그 시절 조선인 차별은 노골적이어서 아이들끼리 “너 ‘바비부베보’ 한번 발음해봐!” 하고 놀리는 건 예사였다. 말투에서 조선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 아이들은 “저 놈은 조센진이다. 이상한 짓 하니까 조심해라”고 쑤군댔다.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런 차별의식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소학교에서 상업학교까지 윤규와 함께 다닌 나가이 기요시(永井淸)씨는 작가 다카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윤규는) 일본어가 서툰 탓이었는지, 일본의 가정이라든가 풍습 같은 조선과 다른 것에 대해 상당히 강하게 의식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소설을 읽어보니 다도(茶道)나 노(能·전통연극), 니시진오리(西陣織·교토에서 나는 비단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고급 직물), 유우젠소메(비단에 새나 꽃, 인물 같은 무늬를 화려하게 염색하는 것) 같은 일본의 전통적인 요소가 참 많이 나오더군요. 어릴 때부터 자신과 이질적인 세계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것이 밖으로 표출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내면적인 고민도 무척 깊었겠지요.”
평전의 작가 다카이는 결론짓는다.
중세를 주무대로 한 일본 고전을 향한 몰입은 자신을 완벽한 일본인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거치지 않으면 안 될 과정이었다. 물론 그가 아무 단계도 없이 곧장 고전의 세계로 발을 디딘 건 아니었다. 평범한 문학소년들이 그렇듯이 그도 먼저 메이지 이후의 근대문학 공부를 바탕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일류에 대한 동경심
다시 다치하라의 허구투성이 자필 연보로 돌아간다.
‘1942년 16세가 되던 해 여름,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도모다 이과에 있는 외삼촌 나가노 데쓰오의 부름으로 후쿠오카에 간다. 외삼촌에게서 ‘올해 겨울에 서울에 가서 개업을 하는데 문학은 어디에서 공부해도 좋은 것이니 경성제국대학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는다.
그때까지 일본 근대문학 작품을 대부분 읽었지만 그중에서도 모리 오가이(森鷗外),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미에키치(三中吉)에 빠져 있었다. 1943년 봄 경성제대 예과에 합격해 서울의 외삼촌집에 기거하면서 고향 안동의 봉선사를 찾는다.
6월에는 다시 늑막염과 폐결핵을 앓으며 가마쿠라로 이사해 살던 어머니의 재혼 상대자인 노무라씨 집에 기거. 이해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와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주로 읽는다. 더불어 진학에 대한 생각도 엷어진다.
1944년 봄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마지못해 원서를 내 게이오대와 와세다대 두 군데 모두 합격한다. 화투패를 던져 둘 중 하나를 고르기로 하고 결과가 나온 대로 와세다에 간다. 전문부 법과였다.
학업은 이름뿐이고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근로동원된다. 그해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조선인 친척들이 강제로 학도병이 되어 출진하는 것을 전송한다. 그들은 나중에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는다. 1945년 일본과 조선이 멸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가 모리 오가이나 가와바타의 소설을 읽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울에는 간 적이 없고 경성대학에 들어간 사실도 없다. 어머니도 가마쿠라에는 살지 않았다. 1944년경 도쿄제대와 교토제대 재학 중이던 친척인 조선인 운운하는 대목도 날조다. 그는 동경하던 일류학교에의 꿈을 이렇듯 연보에 픽션화해서 적어넣었다.
1940년 윤규의 이름은 다시 가나이 세이슈(金井正秋)로 바뀐다. 일본식 성명 강요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일본 정부는 강제가 아니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식 성명을 쓰지 않으면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단정해 경찰이 감시하고 압박했다. 이로 인해 한국 이름의 8할이 일본식 통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의 상업학교 동기생 가운데 또 한 명의 조선인 학생이 있었다. 지금은 시즈오카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김송곤(金松坤)씨다. 윤규와는 서로 집을 오가고 여자친구 얘기를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는 자기의 조상이 1500년대 이즈모(出雲) 지역의 무장이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鹿介)라고 했습니다. 야마나카의 몇 대 손이 반도에 건너갔고 또 몇 대를 지나 태어난 것이 자신이라는 거지요. 자기의 민족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원래는 일본에서 건너간 사람의 후예라는 이미지를 드러내고 싶어 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소설가적인 기질이 강했던 사람이지요.”
검도 실력이 빼어나다는 주장도 열등감의 소산이다. 그 부분에 대해 친동생 가나이 세이토쿠도 픽션이라고 말한다.
내색하지 않은 고통
윤규의 인생을 바꾼 사람은 일본어와 한문 담당 교사인 요다 마사노리(依田正德)였다. 도요(東洋)대학 출신인 그는 독서광이었다. 사면이 책으로 싸인 서재에 틀어박혀 몇 시간이고 책만 읽는 사람이었다. 상고 2학년 때부터 윤규는 날마다 요다 선생 집에 가서 책을 읽었다. 열네 살 소년의 일본어는 아직 미약했다. 그 시절 윤규의 친구이던 우에사카(와세다대 교수)씨는 말한다.
“그 소년의 일본어는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였지만, 조리 있게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 더듬거렸고 어떤 때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짧은 기간에 외국어를 습득한 탓일 게다.”
이런 소년이 와세다에 입학할 정도의 학력을 갖추고 문학작품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을지 상상조차하기 어렵다고, 평전작가 다카이는 애정을 담아 적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다치하라 본인은 그런 고통에 대해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가 들춰지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던 것이다.
기누가사 상업학교 시절 윤규는 나중에 아내가 된 요네모토 미쓰요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미쓰요는 소학교 한 해 후배였는데 윤규를 오빠라고 부르며 무척이나 따랐다.
윤규는 용돈을 아껴 책을 샀다. 요다 선생의 서재가 부러웠던지 10대 소년치고는 엄청난 양의 책을 사들였다. 미쓰요의 집은 군항 요새지대에서 한참 떨어진 데 있었다. 1944년 전쟁의 패색이 짙을 무렵 윤규는 공습이나 함포사격에 대비해 갖고 있던 책들을 미쓰요의 집에 보관하고 싶다고 했다. 그것은 미쓰요와 관계를 깊게 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오빠 앞에 앉으면 멋쩍고 기쁨이 솟구쳐오르던 기억이 난다. 열일곱, 열여덟의 소녀라면 누구나 갖는 어렴풋한 연모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미쓰요가 훗날 ‘추상(追想)’이라는 책에 적은 내용이다.
1945년 4월9일 윤규, 정확히 말하면 가나이 세이슈는 와세다대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한다. 1년이 지나 문학부의 청강생으로 옮기고 문학을 향한 뜻을 다진다.
1947년 미쓰요와 결혼하고 이듬해 7월 장남이 태어나자 처가의 성(姓)인 요네모토가에 입적해 요네모토 세이슈가 된다.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순탄치 않았다. 미쓰요의 어머니는 조선 국적의 남자에게 맏딸을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학생 신분에다 장차 출세할 가망도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말려도 굽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친척 중에는 인연을 끊겠다는 사람도 나왔다. 미쓰요의 친구들도 모두 반대했다. 그래도 결혼이 관철되자 그녀에겐 ‘강골의 미쓰요’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렇게 결혼했으나 미쓰요는 10년 후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처절한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다치하라는 1957년 무렵부터 긴자의 바에 나가는 한 여성과 사귀었다. 작은 술집의 고용 마담이었다. 아내 미쓰요의 기억에는 가냘픈 몸매에 우수에 찬 눈빛을 지닌 여자였다.
다치하라는 그녀에게 빠져들었고, 밤이 으슥해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곤 밖으로 나가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돌아오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 두 남녀는 도쿄의 세타가야에 집을 얻어 동거생활에 들어갔던 것이다.
아내 미쓰요는 참을성 있는 여자였다. 외도를 알면서도 그를 태연히 맞아줬다. 밤이 으슥한 시간에 골목길에서 점점 멀어지는 남편의 구두 소리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다만 한 가지, 돌아온 남편이 곧장 집에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현관에서 양복에서 속옷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벗게 했다. 남편은 아무 불평 없이 벗었다. 그것을 세탁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미쯔요는 스트레스가 쌓여 심장신경증 진단을 받는다. 다치하라는 무슨 생각에선지 아내에게 애인과 동거하는 집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아내는 그 집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병세를 호소했다. 돌아온 다치하라는 아내가 그다지 급박한 증상이 아닌 것을 알고는 “이따위 일로 전화질하고 그래?” 하고 벌컥 화를 냈다. 그러고는 동거녀에게 돌아가버렸다.
미쯔요는 견디다 못해 다치하라가 동거녀와 사는 집에 쫓아갔다. 아침 이른 시각이었다. 놀란 동거녀는 부엌에 물러가 서 있고, 부부는 어색하게 마주앉았다.
“집으로 돌아와주세요.”
미쓰요의 호소에 다치하라는 금방 갈 테니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버스가 한 대가 지나가고 두 대가 지나가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세 대째만 기다리자고 하는데 다치하라가 나타났다. 집에 닿을 때까지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치하라가 애인과 관계를 완전히 청산한 것은 아니었다. 열흘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꼴로 횟수는 줄었지만 그후로도 5년 가까이 혼외정사를 지속한다.
다치하라의 독점욕은 오만방자할 정도로 강했다. 아내가 물건을 사러 갔다가 10분만 늦어도 흥분했으며, 어떤 때는 손바닥으로 아내의 뺨을 갈기기도 했다. 그래서 아내 미쓰요는 항상 종종걸음을 하기 일쑤였다. 그녀의 생애를 통틀어 혼자 도쿄로 나간 것이 딱 두 번뿐이라고 한다.
미쓰요 부인은 인터뷰에서 말했다.
“다치하라와 함께한 삶은 ‘참을 인(忍)’자 그대로였습니다. 참지 않고서야 같이 살 수가 없었지요. 나도 인간이니까 화가 나고 터뜨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의 어딘가에 끌린 것이지요. 정직한 사람이긴 했어요. 생활하면서 자극도 있었습니다. ‘야, 오늘 당신 너무 예쁜데’라고 말할 때가 있어요. 그게 가식적이라거나 징그럽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래서 같이 살 수 있었겠지요.
가족과 함께한 삶이 그 사람에게 보람이었다고 하면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본질적으로 가족에만 의지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쓸쓸한 사람이었지요. 가족 외에는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가족에게 욕을 퍼붓고 화를 내고 밥상을 뒤집어엎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격한 감정이 누그러지면 곧 순하디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됩니다. 가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세일즈맨, 책 외판원, 우유 판매원
다치하라의 출세는 늦은 편이었다.
1951년 ‘문학자’ 잡지에 단편소설 ‘늦여름 혹은 이별곡’을 발표한 것이 최초의 활자화다. 이때 ‘다치하라(立原)’라는 필명도 사용한다. 왜 하필 다치하라인지도 수수께끼다. 그는 친척 중에 그런 이름이 있다고 얼버무렸지만 아내 미쓰요에 따르면 그에게 그런 친척은 없다. 벌판에 우뚝 서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로였을까. 아무튼 적어도 재일 한국인의 이름으로 인식될 가능성은 없는 이름이었다.
작가가 되었으나 생계를 해결하는 전업작가가 되기까지 별의별 짓을 다 해야 했다. 약품회사의 세일즈맨도 했다. 다이슈칸 출판사의 책 외판원도 해봤다. 우유 판매원도 했다. 그래도 궁핍이 극에 달했다. 살고 있는 초가의 지붕이 새어 양동이, 세숫대야, 냄비까지 모두 동원했지만 빗물을 다 받아내지 못한 적도 있다. 아내 미쓰요는 영양실조에 걸려 밝은 대낮에는 눈이 부셔서 뜨지 못한 채 지냈다. 딸이 백일해에 걸린 것도 영양결핍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치하라는 큰소리를 쳤다.
“내가 대중소설을 쓰기만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일본 최고가 되고 돈을 거머쥘 수 있지만 순수문학의 대가가 되기 위해 참고 있다.”
그는 가마쿠라시의 오마치라는 동네에서 야경원(夜警員)으로도 일했다. 밤 8시에 도시락을 들고 대기소로 간다. 그러고는 날마다 정해진 코스를 따라 도둑을 쫓는 야경에 나선다. 한 손엔 랜턴을 들고 다른 한 손엔 4.5㎏이나 되는 쇠막대기를 든 채 밤길을 걷는 것은 중노동이었다. 그래도 다른 일보다 나았던지 그는 3년이나 야경을 계속한다. 낮에 원고를 쓸 수 있고 밤에는 아는 얼굴과 부딪치는 일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야경원 시절을 회고하는 글도 남아 있다.
“학창시절의 친구들은 이미 가정을 이뤄 잔디가 깔린 집에 살고 있었지만, 나는 밤늦은 거리에서 그들의 집 앞을 쇠막대기를 흔들며 헤매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유쾌한 계절이었습니다. 그 학창시절 친구들에게는 유쾌하지 못한 계절이었던 것 같아 이 글을 씁니다.”
초라한 야경꾼 생활의 아픔이 배인, 약간 뒤틀린 심사가 느껴지는 글이다. 사무침은 글에 무게를 더하고 울림으로 전달된다. 소설가 오탁번은 ‘한이 맺혀야 소설이 된다’는 이야기를 지론삼아 한 적이 있다.
그 시절의 악전고투는 ‘세일즈맨 쓰다 준이치’(1956년)라는 소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놀랍게도 평론가는 혼다 다치하라의 내면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미뤄보건대 작가는, 생활상은 파탄투성이지만 격한 성질로 밀려오는 모든 저항을 헤쳐나갈 사람이며, 그것이 작품의 성격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평이었다.
절벽에 서서
다치하라는 1964년 ‘다키기노(薪能)’를 발표해 그토록 염원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른다. 다키기노란 일본의 야외에서 장작불을 지펴가며 전통연극인 노(能)를 하는 것을 뜻한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젊은 부인이 속물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노의 가면 제조자인 남자와 연애하다 동반자살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아깝게도 아쿠타가와상에는 차점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는 주목받는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이어 1965년에는 한일 혼혈, 퇴폐의 미(美)라는 독특한 소재를 담은 ‘쓰루기가사키(劒が崎)’가 호평을 받는다. 이 작품의 주인공 지로(次郞)의 아버지 이경효는 한일강제합방 후 일본의 정책에 따라 조선인 고관과 일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으로, 일본 육사에 들어가 대위가 된 뒤 만주사변 무렵 탈영해 행방불명(광복군으로 변신)된다. 이경효의 동생 이경명은 일본해군에 입대해 미군과 싸우다 패전과 더불어 자살한다.
이경효의 탈영으로 지로와 형 다로(太郞), 어머니(일본인)는 헌병의 감시를 피해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미우라(三浦)반도의 쓰루기가사키 인근 어촌으로 이주한다. 어머니는 재혼한다. 다로는 일본인 새아버지의 질녀인 시즈코를 사랑하게 되고, 우익 성향인 시즈코의 오빠는 조선 피가 섞인 다로와 시즈코의 결합을 싫어한다.
1945년 천황의 항복선언이 나오자 우익적인 혈기를 참지 못한 시즈코의 오빠는 조선 핏줄인 다로를 표적삼아 죽창으로 찔러 죽인다. 시즈코는 그날 밤 쓰루기가사키 절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살하고 만다. 이 일로 지로는 정신병을 얻는다.
언뜻 훑어본 스토리는 이처럼 통속적이다. 그러나 실상은 지로라는 한일 혼혈아가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4분의 1의 조선인 피를 의식하면서 일본문학 연구자로서 일본문화에 동화된다는 구성이다. 작품에서 지로는 ‘혼혈아가 믿을 것은 미(美) 뿐’이라고 되뇌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치하라가 100% 조선 피지, 4분의 1이 섞인 혼혈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바로 피와 민족에 대한 배신이며, 부모의 언어·문화·역사에 대한 절대적인 배반이 아닐까.
이 점에 관해 다치하라를 용서하자는 평론가가 있다. 가와무라 미나토(川村溱)는 ‘전후문학을 묻는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다치하라가 ‘쓰루기가사키’의 허구를 통해 조립하려 한 것은 오히려 피와 출신에 대한 불신이며, 민족이라는 단어에 대한 혐오와 거부가 아니었던가. ‘혼혈이 믿을 건 미뿐’이라고 할 때는 핏줄이나 민족을 벗어남으로써 예술이 완성된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다치하라라는 작가는 그러한 관점으로 읽어야 비로소 그 미학적 굴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다치하라 세이슈의 대표작 ‘쓰루기가사키’에 등장하는 등대. 130년 전에 세워진 이 등대는 34km 멀리까지 빛을 보낸다.
도쿄 시나가와역에서 전차를 타고 한 시간을 달리면 미우라 해안역에 닿는다. 거기서 미사키히가시오카로 가는 버스를 타고 23분을 가면 쓰루기가사키 정류장에 닿는다. 해발 41m에 세운 등대가 보이고 그 등대를 목표로 걷다 보면 쓰루기가사키라는 단애절벽이 나온다.
시즈코가 몸을 던진 절벽 위에 서면 멀리 태평양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도쿄만을 감싸는 보소(房總)반도가 보인다. 다치하라는 소년시절 어느 땐가 이 자리에 서서 쓸쓸함을 달랬으리라. 어쩌면 외롭고 고단한 삶에 지쳐, 구리하마와 기누가사에서 멀지 않은 이곳까지 왔다가 먼 바다를 바라보며 자살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절벽에도 등대 주변에도 다치하라와 소설에 얽힌 얘기는 적힌 게 없다. 다만 미우라해안역의 ‘역 이야기’에 다치하라와 ‘쓰루기가사키’ 소설 얘기가 씌어 있을 뿐이다.
‘무너뜨릴 테면 무너뜨려 봐라’
‘쓰루기가사키’의 등장인물이 자살한 곳으로 설정된 절벽.<br>미우라 해안의 절경으로, 주말이면 산책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1966년 유명 출판사인 신조사(新潮社)가 내는 ‘주간신조’에서 다치하라에게 연재소설을 의뢰했다. 구성이 탁월한 그의 이야기, 에로티시즘과 허무의 미학이 묻어 나는 그의 문장을 탐낸 것이다. 다치하라는 망설였다. 돈과 명예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순수문학에는 도박이었다. 다치하라 본인의 실토다.
“나는 편집장에게 이제 시작이니 순수문학을 좀더 하고 싶다고 말했다. 편집장은 ‘당신은 (순수와 통속) 양쪽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뭘 그러냐’고 태연히 대꾸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아무 말 않고 담배만 피우며 웃었다. ‘결국에는 물러서서 통속작가로 굴러 떨어지는 놈도 있을 것이다. 그런 놈은 바보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루쯤 시간을 달라고 말하자 편집장은 ‘뭘 생각합니까. 여기서 소설 구상하시라는 건 아닙니다’ 하고 답한다.
나는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양쪽 다 써서 성공할 자신이 서질 않았다. 거절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렇지만 타고난 성격이 그렇듯 도전해보기로 했다. 나는 머리를 들이밀며, 무너뜨릴테면 무너뜨려 봐라 하는 심정으로, 눈앞의 편집장과 문단 저널리즘에 대해 협박이라도 하듯이, ‘일단 해봅시다’ 하고 대답해버렸다.”
대중작가 다치하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처절한 결단이었다. 그러고는 훗날 자신의 평전을 쓰게 되는 다카이 유이치에게 편지를 보냈다.
“난 주간지 소설을 시작했으니 아쿠타가와상과는 멀어졌다. 당신 다카이는 그 상을 목표로 꾸준히 정진하라.”
비통한 심정이 묻어난다.
1966년 다치하라는 아쿠타가와상(순수문학)과 쌍벽을 이루는 나오키상(대중문학)을 받는다. 그는 처음에 거부하는 자세를 보이다 결국 수상하기로 결정한다. 지인들도 몸값 올리기쯤으로 여겼을 뿐 그가 정작 상을 거부할 뜻이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화조풍월을 사랑하는 한 작가일 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그는 제국호텔에서 집필을 했다. 호텔비는 물론 출판사가 댔다. 1968년 5월부터 요미우리신문에 ‘겨울여행’을 연재한다.
‘형이 어머니를 덮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형의 가슴을 밀치며 저항하고 있었다. 치마가 걷어 올려져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있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동생(주인공)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 형의 머리를 내리치며 목에 팔을 감아 질질 끌고나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불량소년의 행적에 대해 독자의 반향은 거셌다. 연재를 중단하지 않으면 불매운동을 벌이겠다는 독자도 나왔다. 그러나 ‘요미우리신문’은 1980년 다시 한 번 이 인기작가에게 연재소설을 맡긴다.
다치하라는 정치적 문제에 관해 들쭉날쭉하고 괴팍한 태도를 취했다. 가령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 열도가 떠들썩할 때 그는 김대중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김대중은 김옥균과 마찬가지로 매국노다. 외국의 힘을 이용해 혁명을 하려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다른 지식인 작가가 “이승만, 박정희도 외국을 이용하지 않았느냐”고 반론하자 그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경우가 다르다고만 할 뿐 다른 이유는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희로(권희로) 사건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려 애썼다. 김희로 자신이 옥중에서 ‘쓰루기가사키’를 읽고 작가를 꼭 만나고 싶다고 애원했고, 진보적인 일본 문화인들이 다치하라에게 김을 도와주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뿌리치고 끝까지 외면했다.
그러면서도 서승·서준식 형제의 석방운동에는 가담한다. 그는 ‘나는 서군 형제가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만, 만일 형제가 남북통일의 실마리를 풀고자 무엇인가를 만들어낸 것이라면 이 사형 판결은 너무나도 무참한 것입니다. 나는 화조풍월(花鳥風月)을 사랑하는 한 작가에 불과합니다. 나는 진보적인 지식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두 젊은 생명을 생각하면 애석할 따름입니다. 관대한 조처를 바라마지 않습니다’라고 쓴 탄원서를 냈다.
재일작가 이회성이 데뷔할 무렵에는 “이회성은 일본의 루쉰(魯迅)이며 한국의 루쉰이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재일작가 김달수와 김석범이 아쿠타가와상 수상에서 누락됐을 때는 “심사위원들의 역사감각이 결여됐다”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비원을 이루다
1980년 요미우리에 소설 ‘그해 겨울’을 연재하던 중 식도암 판정을 받는다. 스무 살 이후 줄곧 유지해온 54㎏의 체중이 48㎏으로 내려갔다. 도쿄의 국립암센터에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가 누운 병원 침대에 요네모토 세이슈라는 이름패가 걸렸다. 그는 ‘다치하라 세이슈’라는 이름표도 바꾸어달라고 했다. 문우들과 가족은 부랴부랴 이름표를 떼내고 변호사와 법무성에 연락해 개명작업에 들어간다. 6월11일 요코하마 가정재판소에서 다치하라 성(姓)으로 변경을 허가했다. 숨을 거두기 딱 두 달 전의 일이다. 어떤 의미로 붙인 필명인지는 그 자신만이 안다. 어쨌든 그는 무덤으로 가는 마지막 순간에 다치하라라는 허구의 성을 호적에 올리는 비원을 이룬 것이다.
죽기 며칠 전 다치하라는 아내 미쓰요에게 손짓했다.
베갯밑으로 오라는 신호였다.
“미안했어….”
미쓰요가 대답했다.
“그런 거 없어요…. 당신과 살아서 나도 행복했어요.”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유골은 대불(大佛)로 유명한 가마쿠라시 서천사(西泉寺)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