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교수를 꿈꾸게 한 것도, 대학교수의 길을 포기하게 한 것도 길현모 교수님이다. 나는 지금도 인생의 고비마다 친구 같은 스승인 길 선생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내가 가야 할 길을 결정한다.
교수 시절의 길현모 선생님(가운데). 그의 강의는 언제나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질문은 지금도 계속된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초, 대학 입학 면접장에서였다. 당시 나는 재수의 피곤함에서 벗어나 얼른 대학에 들어와 젊음을 발산하고 싶은 풋내기였다.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뭘 하고 싶나?”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싶습니다.”
“교수가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잠시 망설였다.
“선생이며 학자입니다. 그러나 선생이기 이전에 학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럴 듯한 대답이라고 만족스럽게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내 대답이 별로 만족스러운 것 같지 않았다. 나처럼 기억을 잘 못하는 사람이 30년도 더 된 대화의 한 끝을 기억하고 있음은 신기한 일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선생님과 나눈 대화의 어떤 부분은 매우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만큼 선생님은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마다 커다란 지혜를 주셨다.
선생님 앞에서 한 담배질
선생님을 생각하면 대학 시절 몇 개의 장면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곤 한다.
1970년대 젊은이들은 주로 술을 퍼마시며 한 시절을 보내곤 했다. 입시에 치여 지낸 새내기들에게 대학은 유토피아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릴 수 있는 자유가 숨통을 틔어주곤 했다. 라일락 꽃이 활짝 피어날 때면 술을 사가지고 교정에 들어가서 그 향기를 맡으며 마시기도 했다.
역사학과는 짝도 잘 맞았다. 여학생 15명에 남학생 15명이었다. 3일에 소연(小宴), 5일에 대연(大宴)을 베풀며 술을 마셔댔다. 어느 날인가, 그날도 술을 마시다 문득 선생님 이야기가 나왔고 우리는 선생님댁으로 쳐들어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때 선생님댁은 성북초등학교 앞의 운치 있는 한옥이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작은 뜰이 정겨운 집이었다.
술이 좀 오른 풋내기들 앞에 선생님은 술과 안주를 내놓으셨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자네들 담배 피우나?”
대부분 골초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재떨이를 가져다주시며 담배를 피우라고 하셨다. 아무도 피우지 못했다. 선생님 앞에서 담배질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술과 달리 담배는 대단히 건방지고 껄렁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당시 결코 용납되지 않는 무례였다. 그러자 선생님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지 못하면 그 생각이 많이 나고, 결국 방을 나갔다 들어왔다 하게 되니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더 낫지 않으냐”고 하셨다.
얼마 후 우리는 술이 들어갈수록 더 많은 담배를 피웠다. 방안은 담배연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다음날 선생님 앞에서 담배질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떠벌이곤 했다. 선생님은 그렇게 젊은이들의 유치한, 그러나 일상 속의 무용담 속에 존재하셨다.
젊은 시절의 행운
이런 적도 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예일대에서 그리스·로마사를 전공하신 미국인 신부 진모덕(Murdock) 선생님의 조교를 꽤 오랫동안 한 적이 있다. 서양 고대사 책으로 가득 채워진 신부님 방을 내 방으로 착각할 정도로 신부님이 안 계실 때면 친구들이 찾아와 놀다가곤 했다.
그날은 여름방학 기간이었고 아침부터 후텁지근했다. 친구들이 찾아와 이 방에서 바둑을 두게 되었다. 교수님들은 토요일 이른 시간에는 연구실에 잘 나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창문과 방문을 모두 열어놓고 바둑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때 길현모 선생님이 러닝셔츠 바람으로 방에 들어왔는데 이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자네들 뭐하나. 뭐가 이렇게 시끄러운가?” 하는 소리에 우리는 경악했다. 이런, 선생님이 나와 계셨단 말인가. 선생님 연구실은 방 두 개 건너에 있었다. 놀라 벌떡 일어나 도열하듯 서 있는 우리들을 돌아보고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누가 제일 잘 두나? 한 판 두세.”
바둑판이 벌어졌다. 중간에 선생님은 담배를 한 대 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불을 붙여 피우시지는 않았다. 바둑이 점입가경으로 흐르는 동안 불붙지 않은 맨 담배를 정말 피우듯 ‘후’ 하고 뿜어내기도 했다.
선생님은 그때 2급쯤의 실력으로 바둑을 두신 것 같은데, 오랫동안 바둑을 두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우리 중에 바둑을 잘 두는 친구가 있어 선생님이 이기시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바둑 한 판으로 우리를 잠재웠고, 잔소리 한마디 없이 연구실을 연구하기 좋은 공간으로 만드셨다. 우린 늘 이런 선생님의 능력에 놀라곤 했다.
선생님의 강의는 늘 나를 놀라게 했다. 대학에 들어와 서양사 개설과 역사학 입문을 들으며 나는 수업의 진미를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강의 도중 지그시 눈을 감고 좋은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셨다. 이윽고 가장 적합한 표현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역사 속의 한 인물, 한 장면은 갑자기 두꺼운 먼지 속에서 벌떡 일어나 앉곤 했다. 그 사람들, 그 장면들이 시간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콜링우드의 역사학 개론을 가르치며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뜻은 대략 이랬다.
“이론이 그 자체로 모두 옳은 것 같아 진위를 구별하기 어려우면, 직접 겪어 체험해봐야 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두 개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와 ‘크리톤’에서 가르친 것을 연상시켰다. ‘논리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웅변이 되지 못하는 잡담이며, 경험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논리는 논리가 아니라 부조리’라는 가르침과 섞여 천둥같이 내 가슴을 울렸다.
나는 그때 비코, 랑케, 크로체의 역사이론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의 역사이론은 모두 빛나는 매력이었다. 서로 부딪치면서도 서로 말하지 못한 영역을 보완해주는 듯했다. 새내기의 풋지식은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조금씩 뿌리를 깊이 내렸고, 달달 외워야 했던 연대기 속의 역사적 사실과 가설들은 처음으로 지적 즐거움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 나는 선생님께 앞으로 역사학자가 될 것이고,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7년 후 대학원에 입학할 때도 같은 대답을 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두 번 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길도 있다’는 여운을 남기셨다. 그때는 좀 이상하다 생각했다. 혹시 선생님께서 좋은 학자가 되기에는 내 자질이 부족하다 여겨 그러신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마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뜻은 분명히 말 그대로 바로 그 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스스로 모색하라. 헌신하고 모든 것을 걸어라. 그러나 그 길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앞에 다른 길이 나오면 슬퍼하지 말고 새 길로 가라. 어느 길로 가든 훌륭함으로 가는 길은 있다.’
대학 시절의 필자. 입학할 때부터 역사학 교수를 꿈꿨지만, 길현모 교수가 교단을 떠나자 역사학자의 꿈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중국에 이탁오라는 학자가 있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친구가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선생님은 분주한 분이 아니셨다. 어울려 여기저기 다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상하게 늘 우리의 놀이 속에 흔쾌히 함께해주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두려워했다. 그 무서움은 깊은 존경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언젠가 늦게 장가가는 친구가 아내가 될 사람과 함께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갈 때 나도 따라간 적이 있다. 선생님을 뵙고 나오는데, 그 여인이 이런 말을 했다.
“두 분 다 왜 그렇게 쩔쩔 매세요? 선생님이 그렇게 어려우세요?”
그렇다. 우리는 그런데도 선생님을 좋아하고, 좋아함에도 선생님 앞에 늘 편히 앉지 못할 정도로 존경심이 마음에 가득했다. 마음으로 존경하는 분을 만날 수 있는 젊은 시절이란 얼마나 행운인가. 살면서 마음으로 깊이 머리 숙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야 좋은 선생님을 가진 우리가 얼마나 운 좋은 사람들인지 깨닫게 되었다.
인생의 갈림길 된 1980년
나는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가 되고 모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선생님 탓이기도 했다. 역사에 대한 떨림을 갖게 해준 분도 선생님이시지만, 내가 대학원을 떠난 것도 선생님 때문이다.
방황하듯 대학 생활 3년을 보낸 후 군대에 갔다와 복학했고, 1년 후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1980년이었다. 그해 첫 학기에 대학원에서 선생님과 우리들은 카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읽고 토론했다. 그러나 그해 희망으로 가득 찼던 봄은 가혹하고 잔인하게 지고 말았다.
그해 봄 학생들은 서울역으로 시청으로 날마다 운집했다. 젊은이들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으로 빛나는 조국을 가지고 싶어했고, 지식인들은 ‘지식인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은 긴 독재의 상처와 그늘에서 금방이라도 벗어날 듯 보였다. 그러나 학교는 다시 폐쇄되었고, 전두환 군부는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을 내란으로 규정했고 잔인하게 진압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써야 할 병력이 제 국민을 죽이기 위해 투입되었다.
‘지식인 성명’의 대표자이던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우리는 선생을 잃었다. 나의 길은 불투명해졌고, 나는 다른 분 밑에서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선생님께 배우는 것이었다. 대학원을 나와 그해 12월 나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역사학자가 되는 길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 길은 결국 내 길이 되지 못했다.
나는 일에 치여 사는 회사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작은 집을 장만하고 집을 넓혀가면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었다.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언젠가 추석 즈음에 선생님을 뵈러 갔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는데, 마침 선생님께서 시내에 사시는 동생 분에게(아우인 길현익 선생님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셨는데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동양사를 가르치셨다) 갈 예정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고 작별했다. 사모님께서 챙겨주신 음식 보따리를 들고 선생님은 추석 즈음의 그 빛나는 가을 속에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셨다. 혼자 사는 분들에게는 명절이 더 외로운 날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명절이 되면 늘 그렇게 사모님이 챙겨준 음식을 들고 혼자 사는 동생 집을 찾아가시곤 하셨다.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
이 글을 쓰다 내 노트북 한 구석에 선생님께 보내려고 써두었다가 보내지 못한 편지 한 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10년도 더 된 편지인 것 같다. 오래 전에 써두었지만 주인을 찾아 배달되지 않은 편지를 읽으면 왠지 추연해진다. 삶의 지나간 한 순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시간 여행처럼 이미 사라진 나와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인 모양이다.
길현모 교수는 1980년 ‘서울의 봄’에‘지식인 성명’을 주도한 후 군부에 의해 서강대를 떠나야 했다.
뵌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늘 뵙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 깨어나 보니 문득 선생님이 몹시 그리웠습니다. 짧은 편지를 드립니다.
어려울 때도 있었고 지루할 때도 있었고 그저 그러려니 건들거리며 산 때도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도 많았고 쓸데없는 걱정에 싸인 때도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처럼 때로는 넓은 강폭을 이루어 햇빛에 빛나기도 하고 때로는 좁고 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흐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제게 달 같은 분이셨습니다. 세상을 살며 아주 어두운 때에도 그렇게 깜깜하지만은 않아서 가끔 하늘을 볼 때가 있습니다. 어느 별빛이 그렇게 쏟아져내리나 하고 말입니다. 어두운 밤 나뭇가지에 달이 걸려 있는데, 때로는 비수처럼 날카로웠고 때로는 둥글어 참으로 넉넉하고 풍요롭게 보였습니다.
1973년에 서강에 입학하여 선생님을 뵐 때, 마침 햇빛이 환한 언덕을 다른 선생님 몇 분과 어울려 점심식사를 하러 가시는 것을 뵐 때, 저는 선생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공부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학생들의 빛이 되는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세상은 그 욕망으로 가득했었습니다.
80년 5월에 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떠나시게 되었고, 저 또한 대학원 1학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서강에 계시지 않으니 서강에서 더 공부할 수 없었습니다. 한 2년 일해서 1년 학비가 생기면 유학을 떠나려고 취직을 했더랬지요. 그러다 결국 눌러앉게 되고 저는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길이 달라져서, 사느라고, 혹은 부끄러움 때문에, 가지가지 이유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는 늘 제 마음속의 달빛으로, 어두운 길의 달빛으로 늘 그렇게 계셨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질문은 어둡고 어려울 때 저와 함께 살아온 오래된 물음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서강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의 선생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치기 어리고, 쓸데없는 명예를 좇고, 속이 허한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제자입니다. 헤매며 제 길이라 여긴 길을 가다 보면 조금은 나아지려니 하고 위로합니다.
아침에 이렇게 짧은 편지라도 쓰고 나니 그리움이 조금 덜어진 듯도 하고 더 깊어지는 것도 같습니다.]
세상을 살며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 이야기를 정리해 그것을 모아두면 한 사람의 자서전 노릇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발가벗은 자신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해야 하는 ‘나의 이야기’로서의 자서전이 아니라 내게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야말로 너무도 결정적인 내 삶의 증거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피터 드러커는 자서전을 쓰면서 자신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심대한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영향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것이 관찰자의 운명을 타고난 자신의 이야기라 불렀다. 선생님은 내 삶을 이룬 중요한 상징적 테마였고 질문이었고 가능한 대답의 하나였다.
‘보통의 선생은 그저 말을 하고, 좋은 선생은 설명을 해주고, 훌륭한 선생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는 말이 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학자의 모범을 보았고, 어두운 길 위에 뿌려진 달빛 같은 영감을 받았다. 내가 선생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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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나도 선생님처럼 누군가의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 한없이 모자라는 사람이지만 선생님은 내게 이 열망을 품게 해주셨다. 나이가 들어 연구원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책을 읽고 책을 쓰는 일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너무도 분명히 훌륭한 선생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고 만질 수 있는 행운을 가졌던 것이다.